90. 드라쿨의 서열 정리
90. 드라쿨의 서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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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순이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강하온을 봤고, 강하온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밤하늘이나 봐야겠네.”
그녀는 기분이나 전환할 겸, 지붕 위로 올라갔다.
달을 보면, 왠지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 오늘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지구의 달도 예쁘네.”
하늘에 뜬 만월, 세 개의 달이 뜨는 판게아하고는 다르지만, 지구의 달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은순이는 달을 보며, 강하온과 낮에 했던 대화를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려 했지만,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와서 그럴 수 없었다.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게 선 드라쿨이었다.
“이봐, 늦게 들어왔으면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 아닌가? 참고로 나는 이 집의 서열 5인인 드라쿨이라고 한다.”
참고로 드라쿨은 얼마 전, 레아한테도 서열 정리를 당했다.
그렇다고 레아가 드라쿨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성인이 돼서 타고난 힘을 모두 소화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레아가 더 약했다.
그런데도 서열 정리를 당한 이유는 신분의 차이였다.
드라쿨은 집의 경비, 레아는 나래의 동생이다.
무슨 짓을 해도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 그것은 강하온의 집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은순이는 아니었다.
특별한 것이 없었다.
혹시 몰라서 강하온한테 물어봤지만, 애인도 아니라고 했다.
그렇기에 드라쿨은 은순이한테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은순이한테서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한몫했다.
물론, 드라쿨은 은순이가 드래곤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마족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기로 소문났었던 얼음 마녀라는 것도 말이다.
“집을 지키는 경비인가? 기분이 좋지 않으니 그냥 가라, 뱀파이어.”
은순이는 강하온한테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비를 거는 저런 마족을 가만 놔뒀을 리 없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냥 봐주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하온이 고용한 경비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분명 기회를 줬는데도 이렇게 나온다? 무지한 것도 죄다, 오늘 확실히 서열을 정리하고 후회하게 해주마.”
자신의 밑에 서열이 생길 거란 생각에 연신 미소가 가득하던 드라쿨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은 야만적인 강하온과 바오와는 다른 고귀한 밤의 귀족이었다. 그래서 신사답게 말로 한 것인데, 자신의 심기를 건든 것이다.
하지만 드라쿨은 몰랐다, 자신이 건드려선 안 될 존재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것을.
“무지한 것도 죄라······, 그거 좋은 말이군.”
은순이는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드라쿨의 태도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대체 서열에 왜 저렇게 집착하는지는 몰라도, 그냥 넘어갈 거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순이는 이참에 귀찮은 일을 확실히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악-!
운순이를 중심으로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거기에 푸른 사파이어를 박은 것처럼 아름다웠던 눈동자의 동공이 세로로 갈라졌다.
“서, 설마······.”
드라쿨은 단번에 은순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보지는 못해도, 그 역시 마족이었다.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섬뜩한 푸른 눈동자에 은발의 긴 머리를 가진 실버 드래곤, 마족들 사이에서는 전부 얼려 죽인다고 해서 얼음 마녀라고 불리는 존재.
“내, 내가 그대에게 실수를······.”
드라쿨은 당장에 사과하려 했지만, 은순이는 사과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사과는 됐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나? 무지는 죄라고, 그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도 말이야.”
“자, 잠깐!”
드라쿨은 체면을 버리고 다급하게 말했지만, 이미 은순이의 손은 움직였다.
“으윽······.”
드라쿨은 말을 하려 했지만, 사방에서 짓누르는 은순이의 기운 때문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의념을 사용하려고도 했지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냥 벌을 받아라. 그렇지 않다면 후회하게 해주지.』
은순이의 의념, 용언이 들렸기 때문이다.
드래곤에 입에서 나온 후회하게 해준다는 말, 무섭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피를 흡수한 덕에 뱀파이어의 시조가 될 수 있었던 드라쿨이었다.
누구보다 드래곤의 힘을 잘 아는 그였기에, 반항할 생각은 접었다.
『처음이니 하루 정도로 그냥 넘어가지, 하루면 몸속에 냉기가 전부 사라질 거다.』
결국, 드라쿨은 마당 한쪽 구석에서 몸을 덜덜 떨면서 있어야 했다.
혹시나 자신의 힘으로 저항도 해봤지만, 오히려 냉기가 더욱 거세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드라쿨은 그냥 하루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강하온이 데려오는 누구든, 조심하겠다고 생각했다.
“······.”
방해꾼을 치운 은순이는 달을 보며, 강하온과 낮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네 아내, 한빛나는 어디에 있지?”
그녀는 한빛나에 관해서 물었다.
판게아에서 그렇게 한빛나를 찾던 강하온이었는데, 정작 지구로 돌아왔는데 한빛나가 없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강하온은 지구로 돌아온 후에 일을 은순이한테 말했다.
돌아왔더니 나래가 있었고, 아내인 한빛나는 정체불명의 종족, 암인에게 납치됐다는 사실까지.
“······.”
은순이는 강하온의 안타까운 상황에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한빛나가 강하온에게 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안타까움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감정, 그녀는 얘기를 듣는 순간 기쁨? 희망? 자신 또한 그것이 어떤 감정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은순이는 현재 강하온의 옆에 한빛나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감정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후······, 진짜 아버지 말대로 미쳐버린 게 아닐까?”
은순이는 아카인이 말했던 대로, 자신이 광룡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사랑, 질투와 같은 평범한 감정이었지만, 애초에 드래곤 중에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존재가 드물어서 알 수가 없었다.
배운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
그녀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크게 뜬 만월을 보며 멍때렸다.
그렇게 그녀는 결국, 해가 뜰 때까지 지붕 위에 있었고,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그래, 내 마음 움직이는 대로 하자.”
그녀는 혹시나 자신이 진짜 광룡이 되거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다시 판게아로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강하온의 곁에 남겠다고 결심했다.
다시는 후회를 하기는 싫었다.
만약, 진짜 광룡이 된다면 차라리 강하온의 손에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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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온은 오랜만에 본 친구를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솜씨를 발휘했다.
김치찌개, 불고기, 갈비찜, 잡채, 계란말이.
한식으로 제대로 준비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밤새 안자고 뭘 하는지.”
강하온은 은순이가 밤새 잠을 안 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자신도 판게아에 처음 갔을 때나, 지구로 처음 들어왔을 때 첫날에는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강하온이 잠을 자지 못했던 이유는 은순이와 달랐다.
판게아에 갔을 때는 자다가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고, 지구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 하온. 도, 도 와줄 수 없겠나?”
은순이를 부르기 위해서 베란다로 나간 강하온의 앞에 몸을 벌벌 떠는 드라쿨이 다가왔다.
밤새 추위에 얼마나 떨었는지, 피부가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변해 있었다.
“으음, 그랬다가는 은순이가 다시 또 냉기를 심을걸? 그쪽으로는 되게 단호한 친구라서.”
강하온의 말이 맞았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은순이가 꼭 지키는 것이었다.
만약, 제대로 벌을 받지 않았다가는 그 가중처벌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으면 말해, 냉기는 바로 뽑아줄 수 있으니까.”
“······엣취.”
드라쿨은 재채기 한 번을 하고는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차라리 조금 더 버티지, 이 고통을 오래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은순아, 밥 먹어!”
강하온은 피식 웃으면서 은순이를 불렀다.
“이 냄새는 김치찌개인가?”
은순이는 곧바로 내려오자마자, 냄새만으로 음식을 맞췄다.
판게아에서 강하온이 해준 걸 먹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하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네?”
강하온은 실없이 웃었다.
드래곤은 망각이라는 축복을 받지 못한 존재였다.
“빨리 먹자, 판게아에서 해준 것보다 훨씬 맛있을 거야. 그땐 재료가 제대로 없었으니까.”
“기대하지.”
그렇게 아침 식사가 시작됐다.
“맛있다.”
은순이는 먼저 김치찌개 국물을 먹더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온의 말대로, 판게아에서 해줬던 김치찌개보다 맛있었다.
“맛있어요!”
“맛있어!”
은순이가 말하자, 나래와 레아는 경쟁하듯 맛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얘들이 왜 이래? 매우니까 얼른 우유 먹어.”
강하온 두 아이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 다, 예민한 미각 때문에 평소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데, 은순이가 먹자 갑자기 따라서 먹은 것이다.
그래 놓고는 매워서 혀를 내밀고 있었다.
“이것도 맛있네, 그대가 그때 말했던 한우라는 건가?”
은순이는 갈비찜도 먹어봤다, 판게아의 먹었던 갈비찜하고는 다르게 확실히 부드러웠다.
“맛있어요!”
“맛있다!”
우유를 먹던 두 아이도 늦을세라, 갈비찜을 먹고는 맛있다고 말했다. 다행히 갈비찜은 두 아이가 잘 먹는 음식이었다.
“이것도 맛있네, 여전히 하온은 요리를 잘해.”
“마자! 우리 아빠 요리 잘해요! 맛있어!”
“······.”
그 뒤로도 나래는 은순이가 먹는 음식을 따라 먹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처음에 같이 시작했던 레아는 거기서 빠지게 됐다.
“고기 맛있다.”
레아는 갈비찜이 입맛에 맞았는지, 정신없이 갈비찜만 먹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래는 억울한 듯 레아를 쳐다봤지만, 레아의 시선은 오로지 갈비찜에 가 있었다.
강하온과 은순이는 그런 두 아이를 보고, 웃으면서 아침 식사를 했다.
“참, 오늘은 애들하고 케이크나 만들려고 했는데 같이 만들래?”
원래 아카데미가 쉬는 날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전날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강제 휴일로 변경되었다.
그래서 아이들하고, 케이크를 만들기로 했다.
“케이크?”
“그래, 케이크. 마침 잘됐네, 은순이 네가 온 거 축하도 할 겸 같이 만들자.”
“알았어.”
그렇게 은순이는 갑작스럽게 케이크 만들기에 참여하게 됐다.
“나래야, 레아야. 물놀이나 하고 있을까?”
잠시 후, 식사가 끝나고 강하온은 아이들에게 물놀이를 제안했다. 은순이와 잠시 할 얘기가 있었다.
“응!”
“물? 좋아!”
두 아이는 당연히 수락했다. 강하온이 저번에 욕실에 노는 모습을 보고, 특별히 마당에 수영장을 만들어 놨기 때문이다.
『무, 무슨 아침부터 물놀이냐!』
“원래 물놀이는 아침부터 하는 거야.”
물론, 자동으로 참여해야 하는 바오는 싫어했지만, 그에게 발언권은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바오가 놀러 나가고, 강하온과 은순이만 집 안에 남았다.
“혹시, 정신체로만 이루어진 존재의 기억도 읽어낼 수 있어?”
강하온은 아공간에서 영혼석을 꺼냈다.
전날, 신화 아카데미를 습격했던 광인들이 들어 있는 영혼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