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 (1)
모든 싸움이 끝났다.
동부를 유린했던 6공작은 쓰러졌고, 철혈검제도 소멸했다.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도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잘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싸움이 끝났을 뿐이니까.
건국 영웅이었던 철혈검제와 6공작이 부활하여 사람들을 학살하고 제국을 장악하려 했다.
이 엄청난 사건에 제국의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가치관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이었다.
게다가 동부 지역은 피해가 심각했다.
이미 이그니아스 가문이 약체화된 상태였는데, 란즈슈타인 가문과 바스티안 가문까지 괴멸되었다.
6공작들의 침공으로 다른 가문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원래 동부 지역은 여러 명문가가 몰려 있어 어느 지역보다 안정되어 있었지만, 순식간에 아노미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리더십을 발휘한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레이나데 황녀였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인 척 행세하고 있었지만, 철혈검제 세력의 부활 이후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레이나데는 철혈검제가 천 년 전에 달성한 위업과 이번에 저지른 폭거를 분리해서 취급했다.
인류의 적을 몰아내고 이 제국을 만든 철혈검제의 위업은 분명 대단한 것이지만, 그 이후 타락하여 제국의 신민을 위협하는 악의 무리가 되었다.
그렇게 타락한 철혈검제를 토벌하는 것이야말로 철혈검제의 영웅적인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며, 제국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검의 나라로서 신민을 수호할 것이다…….
그렇게 각지에서 연설을 하면서 레이나데는 제국 사회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레이나데는 기존 6대 검술명가 제도를 해체했다.
이미 많은 검술명가가 그동안의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그들에게 의존하는 봉건제로는 제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에서 선발한 실력자들을 각지로 파견하여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도록 했다.
앞으로는 각지에 아카데미의 ‘분교’를 설치하여 보다 많은 사람이 아카데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 뒤, 그들을 통해 제국 각지를 다스리는 정책을 실시할 예정이다.
모든 것은 황궁에 새롭게 설치될 ‘행정부’에서 중앙 집권적인 시스템으로 감독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레이나데 혼자서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중앙집권제 자체가 레이나데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게다가 레이나데는 아직 그래듀에이트도 되지 못한 소녀에 불과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레이나데에게 힘을 실어 줘야 했다.
철혈검제를 쓰러뜨리고 모든 전란을 종식시킨 제국 최강의 그래듀에이트…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가 리히테나워 대공으로서 레이나데를 보좌했다.
게다가 에르나스에게는 유능한 아군들이 있었다.
세리느 바스티안은 에르나스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새로운 체제를 불만스러워하는 여러 가문을 직접 만나 설득하는 것도 세리느의 역할이었다.
세리느의 성실하고 진정성 있는 태도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제국 전체의 화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클로에 유스부르크는 참모 겸 비서로서 에르나스를 보좌했다.
복잡한 정보들을 빠르게 분석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능력은 베테랑 관료들보다 우수했다.
그녀의 재능 덕분에 개혁은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고, 훗날 재상이 될 인재라고 평가받게 되었다.
슈미츠 하르트만은 각지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말귀를 못 알아듣고 반란을 일으킨 가문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서 봉기한 흑천마교 잔당들, 그동안 전력을 확충한 몬스터들… 그런 놈들을 토벌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많은 싸움을 경험하면서 실력이 일취월장했고, 4년 뒤 절정급에 도달하여 아카데미에 클래스를 개설할 자격을 갖게 되었다.
비올라 오리셔스는 북부 출신 학생들과 함께 고향으로 향했다.
북부 지역은 발트펠트 가문이 무너진 뒤 침체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그녀가 나타나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대형 몬스터 군락을 토벌하면서 명성을 떨쳤고, 5년 뒤 절정급에 도달하여 아카데미에 클래스를 개설할 자격을 갖게 되었다.
베리스리제 슈라이에르는 슈라이에르 가문의 힘을 이용해 남부 전체를 안정시켰다.
슈라이에르 가문은 일찌감치 아카데미와의 협력 관계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운 체제에도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베리스리제는 슈라이에르 가문의 새로운 가주로서 에르나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고, 단 한 번도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아그리파는 아그리파 기사단을 조직했다.
아그리파 가문은 6대 검술명가 중에서 유일하게 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하인리히는 그 힘을 제국의 안정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자적인 치안 유지 활동을 한 하인리히는, 5년 뒤 마침내 검제급에 도달하여 자신의 재능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루퍼스 이그니아스는 동부 지역의 부흥을 위해 힘썼다.
과거 이그니아스 가문과 적대했던 사람들과도 만나서 고개를 숙이며 협력을 요청했다.
그 결과, 루퍼스는 동부 지역의 명사로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욜스 교수는 홀로 아카데미를 떠났다.
새로운 제국에서 중책을 맡아 달라는 요청도 있었지만, 세상을 돌아다니며 검술 수행을 하고 싶다고 거절했다.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욜스는 많은 전설을 만들었고, 5년 뒤 심검을 터득하여 검제급에 도달했다.
페르디난드 교수는 아카데미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런 귀찮은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난색을 표했지만, 맡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금방 그만둘 거라고 툴툴댔지만, 결국 페르디난드가 총장 자리에서 내려온 건 10년이 흐른 뒤였다.
안겔라 교수는 예전과 다름없이 안겔라 클래스를 이끌며 교수 생활을 했다.
여전히 학생 교육에는 별다른 의욕이 없었지만, 전쟁에서의 무용담 때문에 제자가 되려 하는 학생들이 끊이지 않았다.
10년 뒤, 그녀는 리히테나워 경신술을 대신할 새로운 경신술을 완성하고 교수 자리에서 은퇴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협력으로 제국은 차츰 안정되어 갔다.
에르나스는 황제 자리에 오른 레이나데를 철저히 보좌했다.
하지만 레이나데와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약혼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리히테나워 대공으로서 레이나데의 힘이 되어 주었다.
시간이 흘러, 철혈검제가 소멸한 지 10년이 지난 날.
에르나스는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레이나데 황제와의 혼약이 결정된 하인리히에게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를 넘겨주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황궁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흘렀다.
* * *
서부 대미궁.
제국 서부에 존재하는 지하 던전 심층부에, 어떤 인간도 발을 들인 적이 없는 구역이 있었다.
그곳이야말로 천 년 전에 철혈검제에 치명상을 입었던 몬스터 엠페러가 묻힌 묘지였다.
몬스터들조차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그 마경(魔境)에… 한 마리의 오크가 들어와 있었다.
“이것이 바로… 몬스터 엠페러가 남긴 마검(魔劍) ‘그레이트 슬레이어’!”
오크의 목적은 몬스터 엠페러의 애검인 그레이트 슬레이어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레이트 슬레이어를 다시 손에 넣는 자는 모든 종족을 굴복시키고 지상을 정복할 수 있을 거라고 오크 샤먼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손에 넣었다! 제왕의 검을 이 몸이 손에 넣었단 말이다!”
오크는 거대한 검을 치켜들면서 환호했다.
물론, 이렇게 대검 한 자루를 얻었다고 지상을 정복할 힘이 손에 들어오는 건 아니다.
그레이트 슬레이어는 현대 오크의 기술력으로는 절대로 만들 수 없는 명검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검에 불과하다.
그저 소유자의 힘을 극대화해 줄 뿐이다.
다만… 그걸 손에 넣은 오크는 천 년 만에 처음으로 태어난 돌연변이였다.
“크하하하……!”
오크의 몸집은 일반 오크보다 4배 이상 컸다.
전신의 혈맥에 대량의 마력이 흐르고 있었으며, 인간의 마나 하트와 유사한 기관이 총 9개 존재했다.
포로로 잡은 인간 그래듀에이트를 고문하여 검기와 호신기의 사용법도 익혔다.
그 힘으로 오크 종족은 물론이고 다른 몬스터들도 복속시켜 왔다.
하지만 오크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지상을 지배하는 인간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오크 종족을 정점으로 하는 몬스터의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천 년 전 세상을 호령했던 몬스터 엠페러를 계승한… 오크 엠페러로서.
“내가 바로 오크 엠페러다!”
그레이트 슬레이어를 들고, 그는 미궁을 올랐다.
중간 지점에서는 측근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그레이트 슬레이어를 가져온 주군의 모습을 보고 찬사를 보냈다.
“오오, 위대한 제왕이시여!”
“오크 엠페러, 오크 엠페러!”
“카아아악! 카아아악!”
오크 엠페러의 등장에 다른 몬스터들도 호응했다.
미궁에 있던 코볼트, 고블린, 타우로스, 버그베어, 오거, 심지어 레서 드래곤들까지 오크 엠페러 앞에 모여들었다.
“이제 인간들에게 반격할 때가 되었다, 동포들이여!”
“오크 엠페러, 오크 엠페러!”
“키아아악! 키아아아악!”
“구오오오! 구오오오오오오!”
오크 엠페러는 순식간에 군단을 조성했고, 미궁의 출구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상시 배치되어 있던 인간 그래듀에이트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레이트 슬레이어를 손에 넣은 오크 엠페러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앞을 가로막는 인간들을 말 그대로 짓이겨 버리면서, 오크 엠페러는 미궁 바깥으로 나갔다.
“그레이트 슬레이어 앞에 모여라, 이 세상의 모든 몬스터들이여!”
“오크 엠페러 만세!”
“인류에게 죽음을! 인류에게 멸망을!”
“가르르르! 가르르르르르!”
오크 엠페러의 군단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다른 몬스터들도 본능적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군단의 규모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황야를 가로지른 오크 엠페러의 군단이 첫 번째 도시를 포착했다.
“봐라, 몬스터들이여!”
오크 엠페러는 굵은 손가락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저 인간들의 도시를 봐라! 온갖 불필요한 것들로 넘쳐 나는 난잡한 공간을!”
“우우우……!”
“인간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저따위 쓰레기들을 만드는 것에 낭비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들이 인간들의 생명을 보다 유용하게 사용해 줘야 한다!”
“오오오오……!”
“부숴라, 죽여라, 먹어 치워라……!”
“쿠오오오오오오!”
오크 엠페러의 포효에 모든 몬스터가 호응했다.
몬스터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돌격이다……!”
그렇게 오크 엠페러가 몬스터들을 이끌고 도시로 돌격하려던 순간.
도시로 들어가는 길 한가운데에, 갑자기 한 인간이 나타났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곳이다.
그런데 마치 땅에서 솟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다들 본능적으로 주춤했다.
“페르디난드 교수님의 논문에 적혀 있던 대로군. 그레이트 슬레이어를 손에 넣은 ‘엠페러급’ 몬스터는 다른 몬스터들의 전투 본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건가.”
“……?”
그는 수많은 몬스터를 앞에 두고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몬스터들을 보면서 흥미롭다는 듯이 혼잣말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혈맥을 갖고 있군. 마나 하트와 유사한 기관이 9개나 있다니, 자연적으로 저렇게 된 건가?”
“뭐 하는 놈이냐……!”
오크 엠페러는 목소리를 높였다.
특별히 체격이 큰 것도 아닌 평범한 인간 수컷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체 뭐 하는 놈이기에 이 오크 엠페러의 앞길을 막는 것이냐!”
“나 말인가?”
그가 은백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온화한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교활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기묘한 미소였다.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의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총장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렇게 자기 이름을 밝힌 남자가 검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