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검신 (3)
중력에 의해, 육체가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전신을 구성하고 있었던 검이 하나둘씩 부서졌다.
검 자체가 되었던 철혈검제의 몸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지상을 향해 떨어지면서, 철혈검제는 하늘을 응시했다.
저 하늘을 뛰어넘어, 암흑의 공간을 돌파하여, 시공을 초월하고 싶었다.
평행세계의 이름 모를 실력자에게 도전하여 검사로서 승리를 거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
철혈검제는 아득한 과거를 떠올렸다.
천 년 전, 6명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대륙을 누볐다.
마인, 엘더 드래곤, 몬스터 엠페러… 수많은 강적들과 싸우면서 영광의 시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어져 버렸다.
마인과 엘더 드래곤은 전멸하여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군주를 잃은 몬스터들은 오합지졸이 되어 뿔뿔이 도망쳐 버렸다.
평화로워진 세상에는 철혈검제가 싸울 적이 없었다.
“…….”
6명의 부하들은 철혈검제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평화로워진 세상을 기뻐하면서 새롭게 건국된 나라를 통치하는 것에만 열을 올렸다.
평범한 귀족이 되어 버린 그들을 보면서, 철혈검제는 우울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 세계에 진정한 검사는 철혈검제 단 한 사람만 남았다.
“…….”
6공작들과 싸워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미 철혈검제는 너무 강해진 상태였다.
6공작들이 동시에 덤벼든다고 해도, 승리하는 건 철혈검제 쪽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쓰러뜨리면… 이제 이 세상에는 철혈검제가 싸워야 할 적이 없어진다.
그 이후는 끝없는 고독이 있을 뿐이다.
“…….”
철혈검제는 끝없는 싸움을 원했다.
그래서 다른 평행세계로 눈을 돌렸다.
엘더 드래곤들의 연구 자료를 접했기 때문에 평행세계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 세계에는 더 이상 적이 없지만, 다른 평행세계로 간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적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결심한 철혈검제는 검의 세계를 만들어 평행세계를 침략하는 계획을 세웠다.
“…….”
하지만… 아무리 계산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현 인류의 수준으로는 철혈검제가 죽기 전에 계획을 완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철혈검제는 계획을 수정했다.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를 만들고, 란즈슈타인 가문에 여러 가지 연구를 맡긴 뒤, 모든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영묘에 잠들기로 한 것이다.
“…….”
천 년의 시간이 흐른 뒤,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이 철혈검제를 깨웠다.
철혈검제가 기대한 대로, 모든 준비가 갖춰진 상태였다.
이제 제국을 다시 장악하여 검의 세게를 만든 뒤, 인류 전체의 역량을 활용해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면 된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
결국 철혈검제는 패배했다.
검의 세계를 만들지 못했고, 다른 세계는 구경도 하지 못했다.
검신의 경지에는 도달하였으나, 마지막 순간에 흔들렸다.
검사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철혈검제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철혈검제는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전력을 다해서 검을 부딪치며 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그렇게 싸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천 년의 기다림 끝에 자신과 동급인 검사와 사투를 벌일 수 있었다.
이 사실은 철혈검제에게 크나큰 만족감을 주었다.
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천수를 누리다가 침대 위에서 늙어 죽었다면 이런 기분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천 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구나…….”
그것이 철혈검제의 마지막 말이었다.
철혈검제의 부서진 육체는 대기 중에서 불타 사라졌고, 영혼도 산산이 흩어졌다.
영원한 싸움을 원했던 검사는 그렇게 소멸했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영원히.
* * *
여기가 대체 어디쯤일까.
대기권을 벗어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느 층인지 모르겠다.
애초에 이 세계의 대기 구조가 현실 세계와 같다는 보장도 없긴 하지만.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설정하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말이야.’
철혈검제는 중력에 의해 추락하여 소멸했지만, 나는 아직 이곳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공기가 희박하고 온도가 낮았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의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멀리 끝없는 우주가 펼쳐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주를 가로질러 시공조차 초월한 여행을 하면… 언젠가 내가 원래 있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가능할 것 같다.
검신의 힘을 사용해 시공을 절단하여 웜홀을 만들면 된다.
나 자신을 나침반으로 사용하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철혈검제가 원한 것처럼 자유자재로 평행세계를 넘나들려면 검의 세계를 구축해야 하겠지만, 나 혼자 특정 세계로 이동하기 위한 일회용 통로를 만드는 건 내 능력만으로도 가능할 것 같다.
‘어떻게 할까?’
나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곧바로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럴 필요는 없지.’
원래 세계로 돌아가 봤자, 내가 있을 곳은 없다.
나는 이미 내가 멀쩡한 상태로 원래 세계에서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내 인격은 그 복사본에 지나지 않는다.
비더케렌 환혼술로 육체를 빼앗는다면 모를까, 작가로서의 삶을 되찾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나는 이미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니까.’
내 인격은 에르나스와 하나가 되었다.
에르나스 본인의 기억이나 감정도 그대로 나에게 계승된 상태다.
그렇기에 ‘원래 세계’라는 표현에도 위화감이 있었다.
나에게 원래 세계는 이곳 소설 속 세계일까, 아니면 소설 밖 세계일까?
“…….”
나는 시선을 움직였다.
저 멀리 지상이 보였다.
에르나스는 저곳에서 정점에 오르려 했다.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인정받고 철혈검제를 쓰러뜨린 이상, 그 바람은 달성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에르나스가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 상태라고 느꼈다.
그것은 어째서일까.
검신이 되어 세계의 법칙을 이해한 상태라고 해도, 인간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어려웠다.
그것이 나 자신의 마음이라고 해도 말이다.
“……?”
갑자기 감정이 요동쳤다.
아래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탓이다.
나는 곧바로 하강을 시작했다.
대기를 돌파하면서 발생하는 열기를 의념으로 버티면서.
“…….”
바다 위에 영묘의 잔해가 부유하고 있었다.
영묘는 내가 검신으로 각성할 때 완전히 박살이 났는데, 그 파편이 여기까지 흘러온 모양이었다.
나는 파편 위에 천천히 착지했다.
“에르나스인가.”
“…….”
파편 위에는 페르펙티오가 있었다.
나와 철혈검제의 격돌에 휘말린 탓인지 육체가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특히 하반신의 손상이 심해서, 아예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상태였다.
페르펙티오는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였지만, 저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검신의 경지에 도달한 모양이군.”
페르펙티오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죽어 가고 있는 몸인데도 불구하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냉정한 눈빛이었다.
“철혈검제 폐하를 쓰러뜨린 건가.”
“네, 아버지.”
나는 페르펙티오의 질문에 답했다.
“철혈검제는 소멸했습니다. 검신의 경지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결국 패배했죠.”
“그렇군.”
페르펙티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실패인가.”
“실패?”
“란즈슈타인 가문은 천 년 동안 철혈검제 폐하의 숙원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나도 그것을 계승하여 인생을 바쳤지만,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군.”
페르펙티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다고……?”
나는 믿기지 않았다.
페르펙티오가 저렇게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 그게 전부입니까?”
“무슨 소리지?”
“그걸로 끝이냔 말입니다.”
“…….”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화를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 대답 없는 페르펙티오를 향해 다그쳤다.
“당신의 아들이, 란즈슈타인 가문 천 년의 노력을 망쳤습니다.”
“…….”
“아버지도 이것에 인생을 바쳤다면서요? 그런데 아들이 그걸 망쳐 버린 겁니다. 아들에 의해 당신의 인생이 무의미해진 겁니다. 그런데 왜 화를 내지 않는 겁니까?”
내 목소리는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너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화를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를 질러야죠. 근데 왜 가만히 있는 겁니까? 애초에…….”
“나는 네 바람을 충족해 줄 수 없다, 에르나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페르펙티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딱히 화가 나지 않는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게 무슨…….”
“애초에 네가 한 것이든 다른 사람이 한 것이든 차이도 없다. 너 때문에 실패했다고 해서 특별히 더 화를 낼 이유는 없는 것이다.”
페르펙티오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아쉬운 점을 찾자면… 네가 그런 인물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내 무능함이 아쉬울 뿐이다.”
“……!”
나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 검을 뽑아 들고 그 몸을 난도질하고 싶어졌다.
에르나스의 격정(激情)이 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군. 네 눈빛을 보니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내 눈빛 앞에서, 페르펙티오가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너는 내가 너를 무시했다고 여겼나 보군. 그래서 나를 줄곧 미워했던 건가.”
“……!”
“에르나스, 그건 네 착각이다.”
페르펙티오가 계속 말했다.
“너는 검술의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에게 실망한 적은 없었다.”
“무, 무슨…….”
“검술명가의 아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검술의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확률적으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고,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
“내가 너한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은 건, 딱히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한테 검술을 가르쳐 봤자 의미가 없고… 다른 것들은 네가 알아서 잘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알아서 잘할 거라고……?”
“아까도 말했을 텐데. 너는 검술의 재능은 없지만, 매우 뛰어난 두뇌를 갖고 있었다.”
“…….”
“굳이 내가 일일이 확인하면서 간섭하는 것보다 네 스스로 앞길을 개척하게 하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페르펙티오가 담담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내가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너는 이렇게 대단한 존재로 성장했지.”
“……!”
“결국, 이 부분에 한정하자면 내 방침이 옳았던 것이다.”
내 방침이 옳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에르나스로서의 인격을 전면에 드러내면서, 고함을 질렀다.
“웃기지 마!”
“에르나스……?”
“방침이 옳았다고? 그렇게 자식을 키운 게 옳았다고? 웃기지 마라,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
“어디까지나 이 부분에 한정한 얘기다. 내 인생의 목표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네가 그렇게 성장한 탓에 실패했으니 그런 측면에서는…….”
“닥쳐……!”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페르펙티오를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소년이었어! 란즈슈타인 가문의 후계자로서 훌륭한 검사가 되어, 제국을 지키는 한 자루의 검이 되는 것을 꿈꿨지!”
“……?”
“하지만 나는 검의 재능이 없었어! 아직 열 살도 되기 전에 그 바닥이 드러났지! 그런 어린애가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당신은 조금도 상상할 수 없겠지!”
아버지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 내 아들이면서 어떻게 그 모양이냐고 짜증을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웃으면서 달래 줄지도 모른다.
검술의 재능이 없어도 너는 내 아들이다, 검술 대신 다른 능력을 길러서 란즈슈타인 가문과 제국을 위해 일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그런 말을 해 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열 살도 안 된 소년이 불안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쳐다본 순간이 있었다.
“당신은 차가운 눈동자로 힐끔 쳐다봤을 뿐이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버렸지!”
그 모습을 보면서.
소년의 마음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소년에게, 아버지의 냉담한 뒷모습을 보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충격적인 일이었다.
“오해한 모양이군. 나는 딱히 너에게 실망해서 그런 반응을 보인 게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래, 당신은 원래 처음부터 그렇게 냉담한 인간이었지! 그게 당신 본래 성격이야! 하지만 그걸 열 살도 안 된 어린애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
“당신은 아들의 능력을 충분히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아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나? 당신이 아버지로서 아들의 마음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어루만져 주려고 했었다면……!”
어느새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버지를 노려보면서, 당신이야말로 모든 것의 원흉이라고 울부짖었다.
“지금 나는 당신의 맞은편이 아니라 당신의 옆자리에 있었을 거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울부짖었다.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상처를 드러내면서.
열 살도 안 된 어린애처럼, 그렇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