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검신 (1)
바닷가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전투 중이던 사람들도 깜짝 놀라 영묘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영묘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요새라던 영묘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부에서 엄청난 폭발이 발생한 것 같았다.
“에르나스……!”
세리느는 다급히 영묘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 어깨를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멈춰라, 세리느 바스티안.”
“하인리히, 이거 놔요!”
“그럴 수는 없지.’
하인리히가 세리느의 어깨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영묘 안으로 들어간 이후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느껴지는군.”
그렇게 말하며 하인리히가 영묘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에르나스의 기운이 느껴진다. 녀석은 무사하다.”
“……!”
쿠쿵!
굉음과 함께 영묘가 두 조각 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두 개의 빛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리고… 아무래도 벽을 깬 것 같군.”
그 빛의 궤적을 응시하면서, 하인리히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르나스, 너는 역시 대단한 놈이다.”
하인리히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리느는 떨리는 눈동자로 빛의 궤적을 좇았다.
은백색 빛이 흑적색 빛과 함께 바다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 * *
꽈아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공간이 진동했다.
지금까지 수십 번도 넘게 검을 부딪쳤는데, 에르나스는 철혈검제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 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하늘을 날면서 철혈검제는 에르나스를 살폈다.
‘마력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철혈검제는 상대방이 갖고 있는 마력량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지금 에르나스의 마력은 처음 영묘에 나타났을 때와 별 차이가 없다.
‘육체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
골격도 근육도 혈맥도 특별한 변화가 없다.
새롭게 환골탈태가 진행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따로 새로운 검술을 얻었을 리도 없다.’
에르나스는 유스레흐트를 사용해 타인의 검술을 빼앗을 수 있다.
하지만 에르나스가 새로운 검술을 얻을 만한 상대는 없었다.
유일한 상대는 철혈검제지만, 철혈검제는 에르나스의 접촉을 허용한 적이 없다.
애초에 에르나스가 지금 쓰고 있는 검술은 철혈검제의 검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어째서…….’
콰콰쾅!
충격파가 발생하여 바다가 요동쳤다.
지상이었다면 땅이 갈라졌을 것이다.
“궁금한 모양이군.”
검을 충돌시키면서 에르나스가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 내 움직임이 좋아져서 당혹스러운가?”
“네놈…….”
철혈검제는 에르나스를 노려봤다.
하지만 에르나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의념을 사용해라, 철혈검제.”
“뭐라고?”
“심검에 제대로 의념을 담으란 말이다. 속도만 끌어올리지 말고.”
“……!”
마음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속도.
그것을 물질세계에서 구현하는 것이 심검이다.
하지만 검신급에 가까워지면 속도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끌어올릴 수 있다.
의념의 힘으로 물질세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 진정한 심검이기 때문이다.
“이미 눈치챘겠지. 순수한 검술만으로는 결판이 나지 않을 거다.”
“네놈…….”
“그러니 의념의 힘으로 싸우자는 거다.”
에르나스의 도발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검신의 경지를 추구한다면, 그런 싸움을 해야겠지.”
“건방진……!”
철혈검제는 눈을 부릅떴다.
철혈검을 휘둘러 에르나스를 튕겨 낸 뒤, 의념을 끌어올렸다.
“다시 한번 무한한 어둠 속에 갇혀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철혈무량검.
엘더 드래곤의 우두머리조차 굴복시킨, 공간을 찢어 왜곡하는 검술.
그 시커먼 검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확실히 그건 고통스러웠어.”
시커먼 기운을 앞에 두고, 에르나스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아.”
“……!”
우우우우웅!
에르나스가 크게 검을 휘두르자 철혈무량검의 기운이 흩어졌다.
시커먼 기운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이 다시 나타나는 모습에 철혈검제는 경악했다.
“어떻게…….”
“의념을 실어서 싸우자고 했을 텐데.”
그 말을 듣고, 철혈검제는 깨달았다.
에르나스가 펼친 심검의 힘이 더 강했기 때문에 철혈무량검을 흩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에르나스가 의념의 힘을 철혈검제보다 더 잘 다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철혈검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군…….”
철혈무량검의 영역에 가둬 놓은 게 오히려 에르나스의 성장을 촉진한 모양이다.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까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다. 그렇다면…….”
철혈검제는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제대로 준비 자세를 취하는 건 천 년 만이었다.
“상대해 주마.”
지금 이 순간, 철혈검제는 눈앞의 남자를 자신의 적으로 인식했다.
* * *
철혈검제의 태도가 바뀌었다.
지금까지 철혈검제는 나를 진지하게 상대해 주지 않았다.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애송이를 혼내 주겠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지금 철혈검제는 제대로 자세를 취한 채 나하고 싸우려 하고 있다.
드디어 나를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인식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철혈일의검(鐵血一意劍)이 오겠군.’
철혈일의검.
철혈검제가 일대일 대결에서 즐겨 사용했다는 검술이다.
너무 심오한 검술이라 아무도 전수받지 못했다고 한다.
‘내가 상대할 수 있을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했다.
‘물론이지.’
나는 흑천검과 백인검을 들고 심호흡을 했다.
바람이 부는 바다 위에서 철혈검제와 대치했다.
“……!”
바람이 멎은 순간, 철혈검제가 움직였다.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자, 막강한 ‘참격(斬擊)’이 나에게로 날아왔다.
상대방을 베어 버리겠다는 ‘의념’ 자체가 참격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은 물질세계의 한계를 초월한 속도로 이루어졌다.
‘보인다!’
나도 물질세계의 한계를 초월한 감각으로 그 모든 것을 파악했다.
어설프게 방어하려고 하면 내 몸이 두 조각 날 뿐이다.
반드시 베어 버리겠다는 의념이 담긴 참격을 막아 내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계산된 일격이 필요하다.
“……!”
시간이 멈춘 듯한 세계 속에서 나는 하나뿐인 정답을 도출해 냈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철혈일의검의 참격을 받아치기 위해, 의념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
“……!”
“……!”
철혈일의검의 참격이 소멸했다.
내가 날린 공격과 충돌하여 상쇄된 것이다.
멀리 보이는 철혈검제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네놈…….”
살기가 담긴 중얼거림과 함께, 철혈검제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또다시 철혈일의검이 펼쳐지면서 참격이 나를 덮쳤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냉정을 유지한 채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
파앗!
참격이 또 소멸되었다.
내가 정확하게 요격했기 때문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내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계속해 봐, 철혈검제.”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얼마든지 받아쳐 줄 테니.”
“…….”
철혈검제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연속적인 공격이 왔다.
세 개의 참격이 교묘하게 교차하면서 나를 덮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나는 극한의 집중력으로 모든 공격을 받아쳤다.
“어떻게 된 거냐.”
철혈검제가 결국 참치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나는 네 접촉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랬지.”
“유스레흐트를 사용할 기회는 없었단 말이다.”
“그래, 맞아.”
“그런데… 어떻게 네가 철혈일의검을 사용하고 있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나는 피식 웃었다.
“어째서 내가 철혈일의검을 사용하면 안 되는 거지?”
“뭐라고?”
“당신이 내 눈앞에서 보여 줬잖아.”
“……!”
“철혈검제, 나는 남의 검술을 흉내 내며 싸워 온 인간이야.”
그렇다.
나는 남의 검술을 흉내 내며 싸워 왔다.
이건 세리느에게 죽었던 에르나스 본인도 마찬가지다.
“이제 슬슬… 아티팩트에 의존하지 않아도 흉내 낼 수 있어야지.”
“무슨 소리를……!”
철혈검제의 목소리에 분노가 담겼다.
“그냥 눈으로 보고 모방할 수 있을 정도로, 철혈일의검이 얄팍한 검술인 줄 아느냐……!”
쿠쿠쿠쿠쿠쿵!
지금까지보다 훨씬 강력한 참격이 연달아 날아왔다.
분노의 감정이 의념에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면서, 나는 양손의 검을 휘둘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우우우우우웅!
모조리 요격한 뒤,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철혈검제가 눈을 부릅뜨고 검을 휘둘렀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계속해서 날아오는 철혈일의검의 참격을 튕겨 낸 뒤, 의념을 집중했다.
“공수 교대다, 철혈검제.”
“……!”
쿠쿠쿠쿵!
철혈검제를 향해 연속적인 참격을 날렸다.
철혈검제도 내가 했던 것처럼 모든 공격을 요격했지만, 내 공격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대로 거리를 좁혀, 철혈검제에게 근접전을 시도했다.
“……!”
쿠웅!
검과 검이 직접적으로 부딪치면서 공간이 진동했다.
눈을 치켜뜬 철혈검제를 상대로 계속해서 공격을 쏟아부었다.
“소용없다……!”
철혈검제가 포효하면서 검을 크게 휘둘렀다.
흑천검으로 받아 냈지만, 막대한 충격이 나를 뒤로 튕겨 냈다.
“내 검술을 모방하는 것 정도로… 나를 능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물론, 그런 생각은 안 해.”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대꾸했지.
“흉내 낼 만큼 흉내 냈으니, 이제 능가해야지.”
“뭐라고?”
“덕분에 당신이 어떤 식으로 의념을 쓰는지는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
그동안 나는 유스레흐트로 타인의 검술을 흡수해 왔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타인의 검술을 이해한 뒤 나만의 검술로 발전시킬 수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네놈, 설마…….”
철혈검제가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연습 상대로 취급했다는 거냐?”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철혈검제와 검을 부딪치면서 의념을 제어하는 훈련을 했다.
이건 철혈검제의 방식을 관찰하면서 내 안에 흡수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제 몸도 충분히 풀렸고…….”
흑천검과 백인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자세였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철혈검제.”
“감히……!”
철혈검제가 분노를 터뜨렸다.
내 태도에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검술에 재능이 없어 아티팩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무능력자 주제에, 이 철혈검제를 능멸하는 거냐……!”
철혈검제의 기세가 더 강해졌다.
극한까지 위력을 끌어올린 철혈일의검이 올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철혈검제를 노려보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봐라, 에르나스.’
에르나스를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철혈무량검의 영역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이 아니다.
내 안에 따로 존재하던 에르나스의 영혼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에르나스의 영혼은 나와 일체화된 상태다.
그래서 지금 나는 에르나스의 심리를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검술에 재능이 없어 아티팩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무능력자… 철혈검제는 우리를 보고 그렇게 말했어.’
그건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에르나스는 그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극도의 모멸감을 느꼈다.
그 모멸감을 극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점에 오르려 했다.
그 의념은 이 세상 누구보다 강했다.
‘이제는 그 모멸감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자.’
우리는 보여 줄 것이다.
검술의 재능이 없는 가짜 천재가… 신역(神域)에 도달한 진짜 천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가 된 것이다.
‘검신절기(劍神絶技)… 일섬(一閃).’
모든 것을 뒤엎어, 마지막 승리자가 되기 위해.
검신의 일격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