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아버지 앞으로 (4)
아무도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소설의 작가인 나도, 소설의 흑막인 페르펙티오도, 이렇게 진행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나는 이 소설의 작가지만, 소설을 마지막까지 집필하지 못한 채 이 세계로 끌려들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에는 내가 파악하지 못하는 공백이 있었다.
종반부에 진행되어야 할 전개, 종반부에 드러나야 할 진실… 그런 것들은 미지수였다.
그래서 나는 소설에서 암시해 놓은 최종 경지를 향해 달려 나갔다.
소설에 등장한 적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면서 성장하다 보면 언젠가 검신급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한편 페르펙티오는 바라는 건 많았지만 전부 이루지 못할 운명이었다.
에르나스가 유스레흐트의 잠재 능력으로 성장하는 걸 바랐지만, 에르나스는 아버지의 뜻을 이해 못 한 채 권모술수에만 몰두했다.
영묘에 잠들어 있는 철혈검제를 부활시키기를 바랐지만, 흑천마교가 버젓이 남아 있는 이상 당대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에르나스는 권모술수만 부리다가 몰락할 수밖에 없고, 페르펙티오 본인도 영묘 안에서 위령제만 하게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내가 유스레흐트를 최대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구도 찾지 못했던 흑천마교 총본산이 토벌되면서, 페르펙티오는 철혈검제 부활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철혈검제가 만들 검의 세계에 6공작들은 필요 없기에, 페르펙티오는 내가 6공작들을 쓰러뜨리는 걸 그냥 방치했다.
그 결과 나는 6공작들을 쓰러뜨리면서 더욱 성장하여 검신급에 가까워졌고, 철혈검제의 새로운 육체가 되기에 걸맞은 존재가 되었다.
‘나의 행보와 페르펙티오의 행보가 서로 맞물리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적인 상황이 벌어졌어.’
서로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와 페르펙티오의 행보가 절묘하게 얽히면서, 이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문제는… 이 기적은 페르펙티오한테만 좋은 일이라는 거지.’
그렇다.
나한테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기적이다.
페르펙티오는 철혈검제를 진정한 검신으로 부활시킬 수 있다.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란즈슈타인 가문의 비원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황제한테 내 몸을 바치는 것도 거부했는데, 철혈검제를 위해 희생해 줄 이유가 없지.’
진짜 에르나스도 이런 건 거부했을 것이다.
철혈검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육체를 바치다니, 무극공 같은 충신들이나 할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바로 거절할 수는 없어.’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페르펙티오를 상대로 내 속마음을 숨겨야 한다.
“아버지, 질문이 있습니다.”
“뭐냐, 에르나스.”
페르펙티오 앞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꼭 희생해야 하는 겁니까?”
“…….”
“제가 희생하지 않으면, 철혈검제는 부활할 수 없는 겁니까?”
내 질문에 페르펙티오는 별다른 주저 없이 대답해 줬다.
“그렇지 않다.”
“…….”
“철혈검제 폐하께서는 지금도 바깥으로 나오실 수 있다. 딱히 잠들어 계신 상태가 아니니까.”
예상했던 거지만, 실망스러운 얘기였다.
잠들어 있는 철혈검제의 숨통을 끊어 버리면 쉽게 해결되는데, 역시 그렇게는 안 되는 모양이다.
“현재 폐하께서는 사자(死者)와 생자(生者)의 중간 상태다.”
“6공작들과는 다른 상태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조금씩 생자에 가까워지고 계시는 중이지. 살아 있는 육신을 획득해 가고 계신다.”
“…….”
“그러니, 네가 희생하지 않으면 부활하실 수 없는 상태는 아니다.”
6공작들 같은 해골 상태는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살아 있는 인간도 아니라는 얘기일까.
어쨌든 철혈검제가 마음만 먹으면 바깥으로 튀어나와 나를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건 이해했다.
“그러면 왜 굳이 제가 희생해야 하는 겁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알려 주십시오.”
“첫째, 지금처럼 육신을 재생하는 것보다 비더케렌 환혼술로 새로운 육신을 획득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
“…….”
“란즈슈타인 가문의 비더케렌 환혼술은 완벽하다. 철혈검제 폐하께서 네 육체를 얻으시면, 별다른 관리 없이도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실 것이다.”
그렇다면… 비더케렌 환혼술 없이는 안정성 문제가 생기는 건가.
“둘째, 너는 이미 검신급에 가까운 경지에 도달한 상태다. 그 육체를 손에 넣는다면 철혈검제 폐하는 바로 검신의 경지에 진입할 수 있다.”
“그 얘기는 아까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됩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제가 검신급에 근접한 건 맞습니다. 심검 외에도 의념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 의념으로 물질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검신의 경지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제 정신으로 하는 일입니다. 육체로 하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심검은 의념을 활용해 정신세계의 속도를 물질세계에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니 심검을 펼치는 주체는 내 정신이지 육체가 아니다.
내 육체만 가져간다고 해서 내 경지를 가져갈 수는 없다.
“너는 착각을 하고 있다, 에르나스.”
“네?”
“딱히 네 정신적 경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네 정신에 길들여진 육체를 원하는 것이다.”
“정신에 길들여진 육체……?”
“에르나스, 네 몸이 아직도 예전하고 같다고 생각하나?”
“…….”
검제급에 도달하여 마나 하트를 없애긴 했다.
하지만 페르펙티오는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정신의 그릇은 육체다. 정신세계의 의념을 물질세계에 적용하려면, 의념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육체에 열려 있어야 한다.”
“통로…….”
“너는 6공작들과 싸우면서 계속 의념을 활용해 왔다. 그 결과 네 육체에는 의념을 위한 통로가 아주 잘 뚫려 있게 되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현실세계에서 읽던 무협 소설의 개념을 떠올렸다.
몇몇 무협 소설에서는 상단전(上丹田)이 열리면 정신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하여 자연과 어우러져 마치 신선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식의 묘사가 나온다.
그것과 비슷한 개념 같았다.
“검신급에 도달하기에 가장 알맞은 육체다. 지금 폐하의 육체에는 그런 통로가 열려 있지 않으니, 검신급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아예 불가능한 겁니까?”
“불가능하지는 않지. 철혈검제 폐하라면 스스로 통로를 여실 수 있을 테니까.”
“…….”
“다만 쉬운 일이 아닐 뿐이다.”
페르펙티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방금 나온 통로라는 개념이 자꾸 신경 쓰였다.
지금까지 계속 심검을 사용하면서도 그런 개념은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검신급에 도달하기 위한 실마리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나는 페르펙티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철혈검제에게 육체를 제공하면, 제 정신은 어떻게 됩니까?”
“무슨 뜻이지?”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겁니다.”
“…….”
페르펙티오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에르나스, 죽음이 두려운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
“두려운 것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뒤, 페르펙티오가 덧붙였다.
“그러니,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죽는 것도 두렵다고 할 수 있겠군.”
“…….”
“에르나스, 네 목표는 무엇이냐.”
그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옛날 같았으면 ‘살아남는 것’이라 대답했을 것이다.
“결말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결말?”
“네, 이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
현실 세계에서는 결말에 도달하지 못 했다.
에르나스가 죽는 부분까지 쓰고 이쪽 세계로 끌려와 버렸다.
그러니 여기서는 제대로 이야기의 끝을 내고 싶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당연한 얘기지만, 페르펙티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죽으면 결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죠.”
“…….”
“아버지,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페르펙티오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폐하를 위해 희생하는 걸 거부하겠다는 얘기냐?”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아버지.”
“뭐라고?”
“죽지만 않는다면, 육체를 제공해 줄 생각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페르펙티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는 옛날부터 제 본성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
“저는 그동안 제 앞을 가로막는 모든 존재를 쓰러뜨려 왔습니다. 6대 검술명가도, 철혈기사단도, 흑천마교도 말입니다.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어 절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죠.”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소설 속의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최대한 의식하면서.
“하지만 아버지… 6공작들과 싸우면서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지?”
“제가 모든 적들을 쓰러뜨리고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군림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차기 황제에게 토사구팽당할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
내 말에 페르펙티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틀린 말은 아니다.”
페르펙티오가 천천히 말했다.
“너는 너무 강대한 존재다. 황궁은 리히테나워 대공이 황권을 지켜 주기를 바랐지만, 너처럼 너무 강대한 존재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면 오히려 황권이 우스워진다.”
“하인리히 정도였다면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죠.”
“마음만 먹으면 하루아침에 황궁을 불바다로 만들고 황제 자리를 찬탈할 수 있는 강자… 그런 존재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으니, 독약 같은 것을 먹여 암살하려 할 거다.”
“제가 아무리 강해져도 그런 위험이 계속 남아 있다면, 발 뻗고 잘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버지, 그러니 제안하겠습니다.”
“무슨 제안이지?”
“검의 세계에서 제가 2인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2인자?”
“제가 란즈슈타인 가문의 정점이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일선에서 물러나 주십시오. 제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서 철혈검제를 보좌하겠습니다.”
“…….”
페르펙티오는 권력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나한테 2인자 자리를 넘겨줘도 문제 될 게 없다.
“에르나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뭐가 말입니까?”
“지금 너는 폐하를 위해 희생하는 대신에 2인자 자리를 달라는 것 아니냐?”
“맞습니다.”
“육체를 제공해서 죽게 되는데 어떻게 2인자 자리에 오를 수 있지?”
“새로운 육체를 저한테 주십시오.”
“뭐라고?”
“철혈검제 폐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육체가 있지 않습니까.”
“……!”
페르펙티오가 처음으로 눈을 크게 떴다.
“교환하는 겁니다. 철혈검제 폐하의 영혼은 제 육체로 들어가는 거고, 제 영혼은 폐하의 육체로 들어가는 겁니다. 비더케렌 환혼술을 응용하면 가능하겠죠.”
“이제야 네 의도를 알겠군…….”
내 얼굴을 쳐다보며 페르펙티오가 신음했다.
“폐하께서는 네 육체를 얻어 검신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리고 너는 자신의 육체를 제공해 준 1등 공신이 되어, 검의 세계에서 2인자로 군림하겠다는 건가…….”
“철혈검제 폐하도 자신을 위해 육체까지 제공해 준 기특한 신하를 숙청하지는 않겠죠.”
그렇게 말하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떻습니까, 완벽하지 않습니까?”
“으음…….”
“철혈검제 폐하는 새로운 육체를 얻어 검신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그러면 아버지도 오랜 숙원을 달성하는 것이죠. 그리고 저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철혈검제도, 페르펙티오도, 에르나스도.
세 사람 다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완벽하기 그지없는 세계의 완성이다.
“아버지, 어떻습니까?”
“에르나스…….”
페르펙티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너는 머리가 좋구나. 완벽한 해법이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좋다. 네 제안대로 진행하마.”
그동안 나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지금 내 모습을 봤다면, 내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펙티오는 결코 눈치채지 못한다.
그동안 페르펙티오는 나를 제대로 지켜보지 않았다.
유스레흐트를 던져 준 뒤 영묘에 틀어박혀 있었을 뿐이다.
페르펙티오가 알고 있는 건, 재능이 없다고 아버지에게 무시당해 속으로 이를 갈고 있던 에르나스뿐이다.
‘페르펙티오, 나는 에르나스하고는 달라.’
이 방식은 철혈검제도 페르펙티오도 에르나스도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만족할 수 없다.
이런 결말을 원해서 지금까지 싸워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철혈검제 폐하의 허가가 필요하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태입니까?”
“물론이지. 잠들어 계신 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렇군요. 그러면 저도 직접 폐하를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폐하도 기뻐하실 거다.”
“그럴까요?”
“그렇지. 오랜 숙원을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으니까.”
“…….”
평화적이라.
기가 차는 얘기다.
그렇게 수많은 피를 흘렸으면서, 우리들끼리 대화로 해결하기만 하면 평화적인 건가.
“따라와라, 에르나스.”
“네, 아버지.”
페르펙티오를 따라가면서, 나는 아까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철혈검제가 내 육체를 얻기만 하면 바로 검신급이 될 수 있다는 건… 철혈검제의 정신은 이미 검신급이나 다름없는 상태라는 얘기다.
아직 검신급의 실마리를 잡았을 뿐인 내가 무작정 철혈검제에게 덤벼들면 위험하다.
‘그러니… 페르펙티오를 이용하는 거지.’
나는 페르펙티오의 뒤를 따랐다.
에르나스의 가면을 쓰고, 속마음을 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