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아버지 앞으로 (3)
“아버지.”
나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페르펙티오의 의도를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 역할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페르펙티오의 얼굴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와서 아버지가 저한테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
“그동안 저를 계속 방치해 놓았으면서, 이제 와서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요.”
에르나스라면 어떤 식으로 말할지 생각하면서, 대사를 이어 갔다.
“아버지는 저한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죠.”
“…….”
“유스레흐트를 던져주고 영묘로 들어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뭘 바라는 겁니까?”
그렇게 묻고, 페르펙티오의 대답을 기다렸다.
대꾸하지 않으면 바로 다른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페르펙티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착각하고 있군, 에르나스.”
“네?”
“나는 너한테 유스레흐트를 줬다.”
페르펙티오가 냉정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한테 아무런 기대도 안 했는데 유스레흐트를 줬을 리가 없지.”
“…….”
나는 허를 찔렸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저한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스레흐트를 줬단 말입니까?”
“그렇다. 아무 기대도 없었다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제가 검술의 재능이 없어서 유스레흐트를 준 것 아니었습니까? 제대로 검술을 쓰지 못하는 상태로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란즈슈타인 가문의 이름이 더럽혀질 거라 생각해서…….”
“큰 착각을 하고 있었군, 에르나스.”
“착각이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다급히 소설 내용을 되새겼다.
확실히 페르펙티오가 어떤 의도로 유스레흐트를 줬는지 직접적으로 서술한 적은 없다
에르나스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는 장면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
“네가 아카데미에서 망신을 당하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다. 그걸로 란즈슈타인 가문의 위상이 하락해도 나는 상관없다.”
왜 이걸 생각 못 했을까.
페르펙티오는 모든 것에 냉담한 인물이다.
체면치레를 위해 에르나스에게 유스레흐트를 준다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페르펙티오는 왜 유스레흐트를 준 걸까?
“에르나스, 나는 네가 유스레흐트를 사용해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걸 기대했다.”
“마…….”
그 순간, 내가 정말로 에르나스 본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에르나스라면 지금 이 순간 격렬하게 분노했을 것이다.
에르나스를 대변하는 느낌으로, 나는 페르펙티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유스레흐트를 써서 어떻게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라는 겁니까? 고작 ‘능력 모방’ 따위로……!”
원래 유스레흐트는 남들의 능력을 몇 단계 떨어진 수준으로 모방하는 기능밖에 없었다.
내가 남들의 능력을 제대로 복사하여 강해질 수 있었던 건 유스레흐트의 잠재 능력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에르나스는 유스레흐트로 남들의 검술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것밖에 못했다.
“제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걸 진심으로 원했다면, 유스레흐트뿐만 아니라 다른 지원도 있어야 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에르나스.”
하지만, 페르펙티오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너는 유스레흐트의 잠재 능력을 개방하여 ‘능력 재현’을 터득한 것 아니었나? 그걸 통해 강해졌을 텐데?”
“……!”
“너라면 잠재 능력을 개방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유스레흐트를 맡긴 것이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페르펙티오는 유스레흐트가 다른 사람의 능력을 고스란히 복사하는 아티팩트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당대의 란즈슈타인 공작이 유스레흐트의 잠재 능력을 개방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잠재 능력을 개방하는 방법을 후세에 남기지 않았지. 악용되는 걸 우려했던 모양이다.”
“…….”
“나도 나름대로 연구해 봤지만, 유스레흐트의 잠재 능력을 개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너한테 맡긴 것이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페르펙티오가 말했다.
“너는 검술의 재능은 형편없었지만… 머리가 좋은 아이였으니까 말이다.”
“……!”
“아카데미는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너는 유스레흐트를 최대한 활용하려 할 터… 그 과정에서 유스레흐트의 잠재 능력을 개방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것이다.”
나는 전율했다.
페르펙티오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설 속 에르나스는 큰 실수를 저지른 셈이 된다.
“그리고 너는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
“너는 유스레흐트의 잠재 능력을 개방하여 ‘능력 재현’을 손에 넣었다. 그 힘으로 온갖 검술과 마력 연공법을 터득하여 빠르게 강해졌지. 경쟁자를 짓밟고,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다.”
“…….”
“그렇게 빠르게 성장한 결과, 너는 유스레흐트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새로운 경지를 개척할 수 있는 검사가 되었다.”
차가운 목소리를 유지한 채, 페르펙티오가 말했다.
“내가 기대한 대로 성장해 준 것이다.”
“…….”
나는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소설의 에르나스는 아버지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에르나스는 자신의 진짜 실력을 위장하기 위해 유스레흐트를 써먹었을 뿐이다.
유스레흐트로 더 강해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권모술수만을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에르나스는 유스레흐트의 잠재 능력을 개방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검사로서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채, 가짜 천재로 죽었을 뿐이다.
“아버지…….”
말라붙은 입을 움직여, 페르펙티오에게 질문했다.
“제가 만약에 유스레흐트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도태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페르펙티오가 구체적으로 에르나스에게 지령을 내렸다면, 에르나스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펙티오는 그냥 에르나스를 방치했다.
에르나스가 유스레흐트를 제대로 활용해서 성장하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몰락하든… 페르펙티오는 어떤 결과든지 그냥 받아들일 생각이었으니까.
페르펙티오는 영묘에 틀어박혀 위령제만 진행했고, 그 결과 에르나스는 잘못된 길을 걸어 파멸했다.
“어떻게 이런…….”
나는 팔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소설 속의 진짜 에르나스는 아버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길을 걸어 몰락했다.
하지만 가짜 에르나스인 나는 의도치 않게 페르펙티오가 기대한 대로 성장했고, 그 결과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
소설을 쓸 때, 페르펙티오와의 결전에 대해서 몇 가지 구상이 있긴 했다.
하지만 페르펙티오가 에르나스를 왜 그렇게 대했는지는 특별히 생각해 둔 게 없었다.
소설에서 에르나스는 중간에 죽는 캐릭터고, 그 얘기를 굳이 마지막 결전에서 다룰 필요는 없으니까.
‘에르나스 입장에서는 정말… 황당한 얘기일 거야.’
그래도… 납득할 수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페르펙티오에게 그런 구상이 있었다면 소설에서 얼렁뚱땅 넘어간 부분들이 보다 자연스럽게 설명되니까.
만약 내가 계속해서 소설을 쓰면서 페르펙티오와 에르나스의 관계를 재조명해야 할 필요가 생기면 이런 식의 스토리를 지어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흥미로운 스토리이기는 해.’
슬슬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진짜 에르나스의 심정으로 페르펙티오를 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동요했지만, 메타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으로 다시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아버지는 저한테 무엇을 바란 겁니까?”
“내가 바라는 것?”
“단순히 제가 성장하는 걸 바라서 유스레흐트를 준 건 아닐 텐데요.”
“그게 맞다만.”
“네?”
“특별히 바라는 건 없었다.”
페르펙티오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란즈슈타인 가문의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재능이 부족했다. 그래서 마지막 기회를 줬을 뿐이지.”
“…….”
“기회를 활용해 성장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 이상 다른 걸 바라지는 않았다.”
이것도… 납득할 수 없는 얘기는 아니다.
페르펙티오는 권력에 큰 관심이 없는 남자니까, 에르나스를 성장시켜 제국의 실권을 잡겠다는 계획을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을 텐데요.”
“…….”
“제가 흑천마교의 총본산을 무너뜨린 덕분에, 검의 세계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흑천마교의 총본산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내가 작가의 특권으로 찾아냈기 때문에 토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도 위령제를 중단하고 철혈검제와 6공작의 부활을 진행하게 된 것 아닙니까?”
“맞다.”
“그리고 지금은 6공작이 전부 소멸했죠. 이제 남은 건 아버지… 아니, 란즈슈타인 가문뿐입니다.”
나는 페르펙티오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건 저하고 힘을 합쳐 세계를 정복해… 란즈슈타인 가문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획득하는 겁니까?”
“…….”
페르펙티오가 잠시 침묵했다.
내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착각이다.”
“착각이라고요?”
“보아하니 알레이시에게 잘못된 정보를 들었나 보군.”
“…….”
“알레이시는 란즈슈타인 가문에 집착하고 있었지. 그래서 가문의 영광을 우선적으로 생각했을 거다.”
페르펙티오의 목소리는 냉혹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란즈슈타인 가문의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다.”
“란즈슈타인 가문의 의무라면…….”
“철혈검제 폐하의 뜻대로 검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 그것이 란즈슈타인의 의무다.”
“…….”
페르펙티오의 눈빛에서는 광기가 느껴졌다.
선조였던 무극공조차 이 정도로 광기 어린 충성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천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가문 내부에서 심화된 걸까.
아니면 페르펙티오라는 인간이 특별한 걸까.
“에르나스, 나는 폐하와 직접 대화하는 것으로 폐하의 사상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페르펙티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검의 세계는 모든 인류가 일체화된 세계다. 모든 구성원은 완벽하게 통제되며, 한 자루의 검처럼 모든 역량을 합칠 수 있어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철혈검제 폐하도 다른 구성원들처럼 살아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면서 신(神)의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하지.”
인간이면서 신.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살아 있는 인간을 신처럼 신앙하는 경우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나라에서는 그걸 현인신(現人神)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렇게 믿으려고 했을 뿐이다.
현실 세계의 현인신은 그냥 인간을 신처럼 취급하며 떠받들었을 뿐이다.
페르펙티오가 추구하는 건… 인간이면서 정말로 신과 동일한 힘을 지닌 존재다.
“검신(劍神)…….”
“그렇다, 검의 세계를 지배하는 검사의 신… 검신이야말로 철혈검제 폐하가 도달할 곳이다.”
페르펙티오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이것이다.”
“그러면, 아버지.”
슬슬… 나도 감이 오기 시작했다.
페르펙티오는 세계를 제압하기 위해 나를 원하는 게 아니다.
페르펙티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 목표를 위해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에르나스, 비더케렌 환혼술을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비더케렌 환혼술.
천 년 전부터 이 제국에 전해져 내려오는 ‘마법’으로, 인간의 영혼을 타인의 육체에 깃들게 한다.
지금 병석에 누워 있는 현(現) 황제는 비더케렌 환혼술을 사용해 수명을 연장하려 했다.
“너도 알다시피, 황실에서 전해지는 비더케렌 환혼술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진정한 비더케렌 환혼술은 란즈슈타인 가문이 계승하여 연구하고 있었지.”
“…….”
“에르나스, 이건 운명이다. 아무도 이런 상황을 계획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조각이 이곳에 모였다.”
페르펙티오가 에르나스에게 유스레흐트를 줬다.
에르나스에게 내가 깃들어 유스레흐트의 잠재 능력을 개발했다.
나는 유스레흐트의 도움으로 성장해 흑천마교까지 무너뜨렸다.
흑천마교가 무너지자 페르펙티오는 철혈검제 부활을 진행했다.
철혈검제 부활을 막기 위해 나는 계속 힘을 길러 검신급에 근접했다.
검신급에 근접한 내가 영묘 안으로 들어오면서, 페르펙티오는 비더케렌 환혼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 페르펙티오의 행보가 서로 얽히고 얽히면서, 기적적인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검신급에 가까운 인간이다. 네 육체를 제공해 준다면 철혈검제 폐하는 지금 당장 검신으로서 이 세상에 강림하실 수 있다.”
기적적인 상황을 맞이한 페르펙티오가 원하는 것.
그것은 철혈검제를 위해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