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아버지 앞으로 (2)
에르나스가 영묘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실을 알고, 세리느는 잠시 동요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에르나스를 쫓아 영묘로 들어가고 싶었다.
“세리느 님.”
옆에서 적들과 싸우고 있던 클로에가 말을 걸어왔다.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클로에…….”
세리느가 흠칫 놀라며 쳐다보자, 클로에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방해가 될 테니까요.”
“…….”
“에르나스 님은 아무도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어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페르디난드와 하인리히가 원군으로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에르나스는 혼자서 영묘로 들어갔다.
이건 희생정신 같은 것이 아니다.
모든 싸움을 끝낼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희가 따라가 봤자 방해만 될 거예요. 그러니… 저희는 여기서 에르나스 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해요.”
“에르나스의 기대…….”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거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지금 해변에서는 철혈검제를 따르는 검사들과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냉정하게 검을 휘두르던 검귀들도 중간부터 이성을 잃고 광전사가 되었다.
그들을 여기서 반드시 섬멸해야 한다.
“에르나스 님은 아직 학생에 불과한 우리들한테 지휘를 맡기셨어요. 에르나스 님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게 저희들이기 때문이죠.”
“…….”
“그러니 그 기대에… 신뢰에 부응해야 되는 거예요.”
신뢰.
그 말에 세리느는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원래 세리느는 에르나스를 거부했던 여자다.
그런데도 에르나스는 세리느를 신뢰해 줬다.
혼자서 위험한 싸움에 나설 때마다, 에르나스는 매번 세리느에게 뒷일을 맡겼다.
흑색 6반 시절에 신입생 대항전을 치를 때부터 그랬다.
얄밉고 꼴 보기 싫은 여자한테, 항상 중책을 맡겼다.
그리고 너한테 맡기면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가장 위험한 전장을 향해 혼자서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세리느는 항상 복잡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클로에.”
“네, 세리느 님.”
“저는 항상 미안하고… 부끄러워요.”
세리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나스는 항상 저를 신뢰하고 뒷일을 맡겨 주는데, 저는…….”
“…….”
“저는, 그 이상의 것을 해 줄 수 없으니까.”
세리느가 할 수 있는 건, 에르나스가 맡긴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일은 하지 못한다.
에르나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것도 할 수 없다.
에르나스에 대한 신뢰와 존경과 감사를 솔직하게 전하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클로에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세리느 님의 그런 고민은 도와드리지 않을 거예요. 여전히 저는 세리느 님을 경쟁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클로에…….”
“그러니까 용기를 내는 건 세리느 님이 알아서 하세요.”
“용기……?”
“세리느 님한테 가장 부족한 건 그거잖아요?”
“……!”
그렇다.
세리느에게 부족한 건 용기다.
예전에 에르나스를 거부한 것을 사과하는 것도, 에르나스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고 밝히는 것도, 그 이상의 고백을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용기가 부족하니까… 세리느는 에르나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에르나스는 어땠을까.
에르나스는 세리느가 자신을 또 거부할까 봐 주저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약혼을 파기당한 남자가 약혼녀에게 다시 접근하면 꼴사나운 짓이다.
하지만 에르나스는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항상 당당하게 세리느에게 다가왔다.
세리느가 쌀쌀맞게 대응해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그래, 그뿐만 아니라…….’
에르나스는 자신보다 격상의 적에게도 두려움 없이 달려들었다.
그동안 에르나스 앞에 무수히 많은 강적들이 나타났지만, 에르나스는 항상 당당히 맞서 싸웠다.
그 용기 있는 진격이 없었다면, 에르나스가 지금처럼 크게 성장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정말로… 대단한 사람.’
그런 부분을 본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에르나스 곁에 있을 수 없다.
세리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어요, 클로에.”
심호흡을 하고, 세리느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에르나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에 전력을 다할게요. 용기를 내는 건 그다음에 할게요.”
“말해두지만, 저는 응원해 주지 않을 거예요.”
“네, 알고 있어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하는 클로에의 목소리에 세리느는 미소를 지었다.
“세리느! 이런 상황에서 무슨 잡담을 나누고 있어!”
“우익이 위험합니다! 지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으으, 역시 만만치 않아요!”
베리스리제와 슈미츠, 비올라가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리느는 클로에와 눈빛을 교환한 뒤 바로 달려 나갔다.
‘에르나스, 저는 최선을 다할게요.’
최대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지키면서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다.
에르나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세리느는 전력을 다해 싸울 생각이었다.
‘그러니… 무사히 돌아와 줘요.’
주위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불길한 건조물.
철혈검제가 잠든 영묘에서 에르나스가 빨리 귀환하기를 기도하며, 세리느는 검을 휘둘렀다.
* * *
영묘 내부는 건조했다.
바다 위를 떠도는 건조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습도가 낮았다.
내 피부가 건조해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제습 기능이 있는 건가?’
수명이 다한 사람이 잠드는 곳이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습도를 낮게 유지하는 기능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정도로 건조하면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불쾌감이 느껴진다.
입안이 건조해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싶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품에서 약병을 꺼냈다.
방금 전에 페르디난드 교수가 건네준 암리타다.
대체 원료를 사용하지 않은 원방(原方) 암리타이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먹어 온 어떤 영약보다 효과가 좋을 것이다.
‘타이밍을 봐서 복용하려 했지만…….’
투명한 물약을 드링크제처럼 들이켰다.
그러자 막대한 기운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옛날 같으면 마력 연공법으로 체내를 순환시킨 뒤 마나 하트에 저장했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마나 하트가 없다.
암리타의 기운을 안정화한 뒤 전신의 혈맥에서 순환하게 만들면 된다.
“후우…….”
마력이 늘어나는 것과는 별개로, 전신에 활력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에 쌓인 피로가 사라지고, 배고픔과 갈증도 해결되었다.
게다가 아까 무극공과의 싸움에서 입었던 상처도 아물기 시작했다.
“역시 효과가 좋군…….”
이런 효과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위기에 몰렸을 때 복용하는 것도 고민했지만… 그냥 지금 복용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앞으로의 싸움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니, 일단 지금 당장 컨디션을 회복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래, 이 정도라면… 준비는 다 끝난 거지.”
나는 고개를 숙여 허리를 살폈다.
지금 나는 흑천검뿐만 아니라 백인검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원래 무극공이 쓰던 검이지만, 무극공이 쓰러진 뒤 내가 챙겼다.
그동안 사용하던 염살검이 란즈슈타인 무극검술에 두 동강 났기 때문에 검이 한 자루 더 필요했다.
“문제는…….”
이대로 돌격해서 다 쓰러뜨리고 완결…….
그렇게 진행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철혈검제가 검신급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라면 나는 필패(必敗)다.
마지막 순간에 내가 극적인 각성을 해서 동급의 존재가 된다면 이길 수도 있겠지만, 그런 우연을 기대할 수는 없다.
철혈검제가 검신급에 도달했는지 확인을 해야 하고, 검신급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정보를 얻어야 한다.
“결국 페르펙티오를 만나야 한다는 거지.”
모든 것의 원흉, 에르나스의 아버지.
만나자마자 검을 휘둘러 죽여 버린다면 편하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철혈검제와의 마지막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페르펙티오와 대화를 나눠야 한다.
“…….”
나는 건조한 복도를 계속해서 걸었다.
걷다 보면 여러 가지 의식을 진행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란즈슈타인 가문이 맡고 있던 ‘위령제’의 흔적일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짜 위령제였겠지.’
원래 위령제는 그냥 이름 그대로 철혈검제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사였다.
페르펙티오는 그동안 란즈슈타인 가문을 이끌고 영묘 안으로 들어가 위령제를 성실히 진행했다.
하지만, 바깥에서 흑천마교 멸망의 소식이 들려오자 위령제는 중단되었다.
‘검의 세계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흑천마교… 그 총본산을 내가 처음으로 찾아내서 멸망시켰으니까.’
위령제가 중단되고, 철혈검제와 6공작을 부활시키기 위한 의식이 시작되었다.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는 란즈슈타인 가문이 수백 년 동안 연구해서 이미 다 밝혀 놓은 상태라, 페르펙티오는 그대로 진행하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6공작이 먼저 부활해서 바깥으로 나왔지.’
6공작들이 제국을 접수하기 위해 움직이는 동안, 페르펙티오는 영묘 안에서 철혈검제를 ‘보다 완벽하게’ 부활시키려 했다.
철혈검제는 6공작 같은 해골 인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으로 부활해야 했으니까.
살아 있는 인간의 몸으로 검신급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철혈검제가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 말하자면… 현인신(現人神)이 되는 것이지.’
내부 공간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게다가 마력 탐지가 불가능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도 위령제의 흔적을 살피면서 전진하다 보니, 광장처럼 넓은 공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섬뜩한 인상을 주는, 날카로운 이목구비의 남자였다.
“아버지.”
“…….”
그렇게 부르자, 남자가 나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 공허한 붉은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틀림없다.
저 섬뜩한 남자가 바로 에르나스의 아버지…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이다.
“오랜만입니다.”
“…….”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를 쳐다봤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으면 움직이기 어렵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 배후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도련님…….”
“……!”
알레이시가 비틀거리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처참한 부상을 입은 상태여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가주님에게, 거역하지 말아 주십시오…….”
“알레이시, 어째서…….”
“에르나스 도련님…….”
내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알레이시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옛날에… 도련님에게 검술을 가르쳤던 걸 기억하십니까?”
“…….”
“가주님의 명령으로, 아직 어렸던 도련님의 검술 선생 역할을 맡았었죠. 그때 이후… 저는 에르나스 도련님을 마치 자식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다.
이게 알레이시에게 숨겨진 설정이다.
알레이시가 에르나스를 설득하려고 애쓴 건, 이런 개인적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련님이 아카데미에서 검술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걸 알고, 저는 마음속으로 기뻐했습니다. 마음만 같아서는 도련님 곁으로 가서 축하해 주고 싶었지만, 가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라 그럴 수 없었죠.”
“…….”
“도련님, 저는 줄곧… 도련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란즈슈타인의 검사로서 함께 싸우는 날을 꿈꿔 왔습니다.”
알레이시가 숨을 헐떡이면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도련님은… 란즈슈타인의 후계자입니다. 앞으로 란즈슈타인을 이끄실 분이, 가주님에게 검을 들이대서는 안 됩니다.”
“…….”
“부디, 부디, 가주님과 화해하십시오. 그리고, 함께 란즈슈타인을 위해…….”
그리고 알레이시가 페르펙티오에게 시선을 향했다.
“가주님, 부디, 도련님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
“도련님의 재능이 부족했던 건 어렸을 적의 얘기입니다. 지금 도련님은 세계 최강의 검사… 란즈슈타인 가문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페르펙티오의 차가운 얼굴을 올려다보며, 알레이시가 간청했다.
그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어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철혈검제 폐하께서 만들어 나갈 세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
“에르나스 도련님을… 인정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알레이시가 저렇게 진심 어린 말을 해 봤자, 페르펙티오의 마음에는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페르펙티오는…….
“착각하지 마라, 알레이시.”
바로 그때.
페르펙티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에르나스를 이미 인정하고 있다.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말이다.”
“……!”
그 말을 듣고 알레이시가 눈을 크게 떴다.
나도 놀라서 페르펙티오를 쳐다봤다.
페르펙티오가 이런 소리를 할 줄은 예상 못 했기 때문이다.
“에르나스하고는 내가 얘기하겠다. 그러니, 알레이시.”
차디찬 목소리로 페르펙티오가 쏘아붙였다.
“더 이상 무의미한 소음을 발생시키지 마라.”
“…….”
알레이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르나스를 인정한다는 페르펙티오의 말에 만족하여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페르펙티오의 명령대로, 무의미한 소음을 발생시키지 않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 남자…….’
알레이시의 시체를 쳐다보는 페르펙티오의 눈빛에는 일말의 온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페르펙티오에게 알레이시는 그냥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도구에 불과했다.
알레이시가 얼마나 진심으로 페르펙티오와 에르나스의 화해를 바랐든… 페르펙티오에게는 중요치 않은 문제다.
“그러면… 에르나스.”
이윽고 페르펙티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제야 겨우 네 역할을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페르펙티오가 나를 보는 눈빛은, 알레이시의 시체를 보던 눈빛과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