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공작들 앞으로 (2)
각지에서 도착한 원군들과 함께, 리히테나워 기사단은 크리처 토벌을 위해 움직였다.
물론, 가장 중요한 토벌 대상은 크리처를 만들고 있을 초대 슈라이에르 공작 ‘비룡공’이었다.
하지만…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에르나스, 왜 그러죠?”
“커다란 마력이 세 개나 있어.”
언덕 위에서 전방을 주시하며, 함께 정찰을 나온 세리느에게 말했다.
“하나는 비룡공일 거야. 그리고 동급의 그래듀에이트가 두 명 더 있다는 거지.”
“그렇다면……!”
“6공작이 세 명 모여 있다는 거지.”
6공작의 절반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이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얘기였다.
“그 밖에도 크리처가 잔뜩 있는 것 같고… 검귀들도 있어. 사실상 철혈검제 세력의 본대(本隊)라고 해도 좋을 거야.”
“염옥공이나 이천공이 선봉대 역할을 하여 황궁부터 제압하고, 본대가 움직여서 제국 전체를 제압할 계획이었겠군요.”
“그렇겠지.”
적들의 전력이 예상했던 것 이상이다.
흑천마교 총본산보다 머릿수는 적지만, 개체 하나하나의 전투력은 훨씬 강하다.
그래듀에이트 상급 이상이 아니면 버티기 어려운 전장이 될 것이다.
“쉽지 않겠네요.”
“그래…….”
세리느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마력이 느껴지는 곳을 응시했다.
무너진 요새 안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 그곳에서 6공작 중 절반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놈들이 진형을 전개하고 있군.”
금강공이 팔짱을 낀 채 바깥을 내다봤다.
지금 리히테나워 기사단은 평야와 언덕을 활용해 진형을 전개하는 중이었다.
“제법 봐 줄 만하다. 뛰어난 지휘관이나 참모가 있는 것 같군.”
“금강공에게 그런 칭찬을 받다니, 놈들도 꽤 하는군요.”
거친 성격 때문에 오해받기 쉽지만, 6공작 중에서 군단 지휘관으로서 가장 우수한 능력을 지닌 게 금강공이었다.
비룡공이 크리처를 만들어 군단을 조직하고, 금강공이 군단을 지휘하여 적들을 공격하고, 청월공이 적진에 돌입해 수뇌부를 해치우는 것… 이것이 여기 모여 있는 세 명의 역할 분담이었다.
“하지만, 전력이 너무 부실하다.”
금강공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만든 군단을 상대하기에는 택도 없지.”
“그렇게 보십니까?”
“그래, 그래듀에이트 상급 이상만 최소 1천 명은 모아야 할 텐데, 절반도 안 되는군.”
“그동안의 전란으로 그래듀에이트가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비룡공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혈검장로회의 수석 장로에게서 흡수한 기억에 의하면… 흠, 지금 모아 놓은 전력도 무척 많다고 봐야 할 것 같군요. 아마 다른 지역에서도 그래듀에이트를 소집한 것 같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군.”
그때 구석에 앉아 있던 청월공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철혈검제 폐하의 군세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대항하려는 놈들이 저렇게 많지?”
“그 부분은 확실히 좀 이상하군. 처음에 나타난 바스티안 가문을 제외하면 자진해서 우리 밑으로 들어오는 놈들이 없어.”
“에르나스의 여론 조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룡공이 뒷짐을 진 채 말했다.
“수석 장로는 에르나스가 권모술수에 능한 놈이라고 분석한 모양입니다. 항상 교묘한 선동으로 자기 뜻대로 일을 진행했다고 하더군요.”
“제국의 신민들을 선동하여 우리들에게 대적하게 만들었다는 소리인가? 어처구니가 없군.”
금강공의 목소리에 분노가 담겼다.
“그놈은 반드시 내 검으로 쳐 죽여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좋습니다만, 단독 행동은 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대기해야 합니다.”
비룡공이 재차 강조했다.
“단독으로 움직였다가 에르나스에게 각개격파당하면 곤란합니다. 여기서 에르나스를 기다리면 됩니다.”
“알고 있어. 너무 자주 들어서 질릴 정도군.”
금강공이 불만스러운 태도로 투덜거렸다.
“네가 말한 대로라면,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선두에 서서 돌격해 올 거야.”
“네, 그렇겠죠.”
“정면 돌파를 시도하여 우리 진형을 무너뜨린 뒤, 부하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혼자서 선행하겠지. 그리고 여기까지 달려와… 지휘관인 우리들을 쓰러뜨리려 할 거다.”
비룡공이 흡수한 혈검장로회 수석 장로의 기억 덕분에, 에르나스의 행동 패턴은 이미 다 파악된 상태였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놈을 맞이해 쓰러뜨리면 되는 거지.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금강공이 두꺼운 손가락뼈를 치켜들며 말했다.
“마력을 잘 느끼는 놈이라면, 여기에 우리 셋이 함께 모여 있다는 걸 눈치챌 거다.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
“그래, 사전에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여기에 도착하면 바로 눈치챌 수밖에 없지. 그럴 경우 즉각 꽁무니를 뺄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며 금강공이 비룡공을 쳐다봤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수는 없어. 에르나스를 추격해야겠지.”
“그럴 경우도… 셋이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흥, 마음에 안 드는군.”
“그래도 이미 결정한 사항입니다.”
비룡공의 신중한 태도에 금강공이 불만을 드러냈다.
“어쨌든 이제 곧 드러나겠지. 놈이 어떻게 움직일지 말이야.”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때.
말없이 적진을 관찰하고 있던 청월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인다.”
“뭐?”
“다른 그래듀에이트들은 가만히 있는데… 가장 강한 기운을 지닌 놈이 움직이고 있군.”
금강공과 비룡공도 다급히 청월공과 같은 방향을 주목했다.
적들의 진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런데 오직 한 명만이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설마… 에르나스?”
“마력량을 보니 에르나스가 맞는 것 같습니다만…….”
“비룡공, 이건 어떤 의미의 행동이지?”
“모르겠습니다. 수석 장로의 기억에 이런 행동은…….”
비룡공도 당혹스러워했다.
“어째서 혼자 나오는 걸까요? 설마 혼자서 싸울 생각은 아닐 테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미치광이가 아니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금강공이 즉각 부정했다.
지금 이곳에는 크리처와 검귀가 잔뜩 있고, 심검을 터득한 공작들까지 있다.
에르나스 혼자서 전부를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싸우러 나오는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때 청월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대화가 목표일지도 모른다.”
“대화?”
“놈도 지금 상황이 불리하다는 걸 눈치챘겠지. 대화로 해결하려는 걸 수도 있다.”
“우리와 교섭할 생각이라는 건가?”
“충분히 가능성은 있지 않나?”
“…….”
청월공의 추측을 듣고, 금강공과 비룡공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놈이 우리들에게 겁을 먹고 항복하려는 걸지도 모르겠군.”
“글쎄요. 지금까지의 에르나스의 행적을 생각하면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계략이라니? 이 상황을 뒤집는 계략이 있을 거라 생각하나?”
금강공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그냥 여기까지 들여보내는 게 나을 것 같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크리처나 검귀들을 움직이지 않겠다는 건가요?”
“그래, 저놈 혼자서 걸어오고 있는데 총공격을 명령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금강공, 하지만…….”
“네가 원했던 대로 우리 셋이서 맞이하면 되는 거 아닌가. 에르나스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본 뒤, 셋이 함께 대처하면 되는 거지.”
“으음…….”
생각에 잠기는 비룡공을 내버려 둔 채, 금강공이 청월공을 쳐다봤다.
“청월공, 네 의견은 어떤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청월공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놈이 지금까지의 잘못을 사죄하고 폐하께 용서를 빌겠다고 하면, 일단 받아들여 줘야 한다. 놈을 용서할지 말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흠,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참살(斬殺)하겠다.”
청월공의 대답을 듣고 금강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룡공, 그러면 일단 에르나스를 여기로 불러들이기로 하지.”
“거참… 문제가 생겨도 저는 책임지지 않겠습니다.”
비룡공이 불만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런 비룡공을 내버려 둔 채 금강공이 손을 치켜들자, 지상에 있던 크리처와 검귀들이 에르나스에게 길을 열어 줬다.
과연 에르나스는 항복을 하러 찾아오는 것일까.
궁금증에 사로잡힌 채, 세 공작은 에르나스의 도착을 기다렸다.
* * *
무너진 요새를 올라가는 동안, 나는 역대 최고의 압박감을 느꼈다.
검제급의 그래듀에이트 세 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동료도 없이 혼자서 그들에게 접근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압박감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한곳에 모여 있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들이 서로 흩어져서 아군을 공격했다면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을 테니까.
그들이 이곳에 모여 나를 기다려 준다면, 나한테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
마침내 목표 지점에 도달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거대한 크리처였다.
‘누구지?’
다른 크리처들과 마찬가지로 시체를 사용한 드래곤 형태의 크리처였는데, 머리 부위에 노인의 얼굴이 달려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머리를 그대로 남겨 놓은 크리처는 처음이어서 신경 쓰였다.
“혈검장로회의 수석 장로입니다.”
“……!”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우아한 예복을 걸친 해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석 장로라고?”
“네, 우리에게 협력을 제안했죠.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는 혀를 찼다.
차석 장로를 죽인 뒤 혈검장로회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나를 죽이는 걸 포기했나 생각했는데, 설마 6공작들에게 접근했을 줄이야.
원래 혈검장로회는 권력자들에게 인정받는 걸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6공작들에게 협력하여 철혈검제의 세계에서 공신이 되는 걸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비룡공인가?”
“어라, 용케 알아봤군요.”
비룡공 곁에는 해골 인간이 두 명 더 있었다.
커다란 골격을 지닌 해골은 금강공일 테고, 나머지 한 명은…….
“이쪽은 금강공과 청월공입니다.”
“…….”
초대 슈라이에르 공작인 비룡공.
초대 발트펠트 공작인 금강공.
초대 아그리파 공작인 청월공.
이렇게 셋인 건가.
“흥, 가까이서 보니 더 건방진 인상이군.”
“…….”
이렇게 보니 후손들과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비룡공은 존댓말을 쓰고 있긴 하지만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처럼 교활하게 느껴졌고.
금강공은 커다란 체구와 오만한 말투가 미하일 발트펠트와 비슷했으며.
청월공은 냉랭하고 과묵한 분위기가 브랜틀리 아그리파를 연상케 했다.
설정을 생각하면 전투 스타일도 비슷할 것이다.
비룡공은 원거리에서 일방적인 공격을 하는 걸 좋아하고, 금강공은 파워풀한 한 방을 선호하고, 청월공은 공간까지 절단하는 초고속의 일격을 펼친다.
“그래서…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비룡공이 느긋한 목소리로 나한테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혼자서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까?”
“대화를 하고 싶었거든.”
“흠, 대화라.”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룡공이 금강공과 청월공을 한 번씩 쳐다봤다.
아마 내가 무슨 목적으로 찾아온 건지 사전에 함께 예상해 봤을 것이다.
“에르나스, 항복을 하고 싶은 거라면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네, 당신이 또 쓸데없는 음모를 꾸밀 수 있으니까요. 저는 수석 장로의 기억을 흡수한 상태라, 당신이 잔꾀에 능한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비룡공이 자신의 두개골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당신의 측근들 중 몇 명을 인질로 제시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팔 한쪽 정도는 내놓는 게 좋겠군요.”
“…….”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당신이 제대로 충성을 바친다면 인질들은 무사할 테고, 팔도 다시 복구해 줄 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비룡공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세한 건 그 이후에 얘기하도록 하죠. 어떻습니까?”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착각이라고요?”
“너희는 내가 항복을 하러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눈앞의 공작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나는 너희들한테 항복을 요구하러 온 거다.”
“네?”
만약 그들이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면 눈을 크게 떴을 것이다.
“비룡공, 금강공, 청월공… 항복해라.”
나는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순순히 항복한다면, 제국 검술명가의 시조로서 후한 대우를 해 주겠다.”
“…….”
나를 쳐다보는 그들의 눈구멍에서, 격렬한 불꽃이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