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쌍검난무 (4)
‘이건… 말도 안 된다!’
이천공은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자색의 검기에 의해 온몸이 붕괴하고 있었지만, 전혀 막아 낼 수 없었다.
어떻게든 검을 휘둘러 에르나스의 연속 공격을 막아 내려 해도, 양검도 음검도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아까 헨리를 상대할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공격을 펼칠 수 있는 놈이 아니었는데……!’
예상 이상의 힘을 발휘한 에르나스 때문에 완전히 허를 찔렸다.
그 영향으로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완벽하게 펼치지 못했다.
지금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더 완성도 높게 펼친 건 에르나스 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에르나스는 지금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더 진화시켰다!’
마르테리스 이륜검술의 발전형으로 보이는 자색 검기의 쌍검술.
거기에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조합하여 새로운 검술을 창조한 것 같았다.
즉석에서 새로운 검술을 만들어 내다니, 이천공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녀석… 정말로 검술의 천재란 말인가?!’
염옥공을 쓰러뜨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나머지 6공작들도 쓰러뜨리고 철혈검제의 계획을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다.
지금이라도 나머지 6공작들이 집결하여 에르나스를 말살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이천공에게는 이 얘기를 다른 동료들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젠장……!’
마음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순간.
에르나스가 흑색의 검을 높이 치켜드는 모습이 보였다.
두개골을 향해 떨어지는 시커먼 칼날 앞에서, 이천공은 그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 * *
콰직!
이천공의 두개골까지 파괴하자, 남아 있던 골격까지 전부 무너져 내렸다.
이걸로 이천공을 완전히 쓰러뜨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쉽지 않은 상대였어.’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숨을 가다듬었다.
변화무쌍한 검술을 펼치는 이천공은 염옥공보다 골치 아픈 상태였다.
헨리에게서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얻어 내고 이천공을 동요시키지 못했다면 내가 패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보다 다채로운 움직임이 가능해졌어.’
그동안 나는 서부 검술을 깊게 파고들지 못했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이 서부 검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었지만, 본류하고는 거리가 있었다.
변화무쌍한 서부 검술의 정수를 담은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터득했으니, 내 검술을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다.
‘유스레흐트로 복사한 검술만 쓸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 나는 스스로 생각한 검술을 펼칠 수 있는 상태야.’
창뢰검형, 백화검형, 자뢰검형… 전부 다 기존 검술을 베이스로 하고 있긴 하지만, 이제는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강적과의 실전을 경험했다. 또한 소설에서 묘사된 깨달음을 직접 실감하면서 계속 성장해 왔다.
그 결과, 지금 나는 검제급에 부끄럽지 않은 기량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계속해서 활용하면서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면… 나중에 삭제한다고 해도 그 노하우를 계속 활용할 수 있겠지.’
나머지 6공작들을 쓰러뜨리기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방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이천공이 끌고 나왔던 죄수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검귀가 되기 위한 의식이 진행 중이었지만, 의식이 중단되면서 결국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검귀가 대량으로 늘어나는 건 막을 수 있었지만, 씁쓸한 광경이었다.
‘어쨌든 이걸로… 놈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겠군.’
유스트 바스티안을 앞장세워 선봉으로 나선 염옥공.
병력을 확보하고 염옥공 뒤를 따를 예정이었던 이천공.
이렇게 두 명이 쓰러졌으니, 빠르게 황궁을 제압하려던 놈들의 작전은 초반부터 실패한 셈이다.
‘지금쯤이면 지도 교수들도 리히테나워 기사단과 합류했겠지.’
피해가 더 커지는 건 막아야 한다.
현재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놈들에게 대처해야 한다.
‘동부에서 놈들을 쓸어버린 뒤… 영묘에 돌입한다.’
철혈검제가 잠든, 고대 문명의 이동 요새.
그곳에서 최종 결전이 치러질 것이다.
* * *
몇 달 전에 있었던 전쟁에서 함락된 이그니아스 가문의 거대 요새.
무너져서 더 이상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요새 위에, 세 명의 해골 인간이 모여 있었다.
초대 슈라이에르 공작 ‘비룡공(飛龍公)’.
초대 발트펠트 공작 ‘금강공(金鋼公)’.
초대 아그리파 공작 ‘청월공(靑月公)’.
영묘 쪽에 남아 있는 초대 란즈슈타인 공작을 제외하면, 남아 있는 공작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태였다.
“염옥공에 이어서 이천공도 사망한 것 같군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비룡공이었다.
“검귀들의 시체와 함께 음양검이 발견되었습니다. 훼손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상태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목소리를 높인 건 금강공이었다.
다른 두 사람보다 훨씬 커다란 몸을 들썩거리며 거세게 소리쳤다.
“염옥공뿐만 아니라 이천공까지? 이 시대의 검사 중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 없다!”
“리히테나워 대공 후보라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겠죠.”
비룡공이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무래도 그는 심검을 터득한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돼! 이 시대의 인간이 무슨 수로 심검을 터득한단 말인가!”
“그러면 심검도 쓰지 못하는 평범한 절정급이 염옥공과 이천공을 쓰러뜨렸겠습니까? 자력으로 심검을 터득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겠죠.”
“크흠, 그래도 나는 믿지 못한다!”
“고집불통이군요, 금강공.”
그렇게 쏘아붙인 뒤, 비룡공이 청월공에게 시선을 향했다.
“청월공,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놈이 심검을 터득했든 말든 상관없다.”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청월공이 입을 열었다.
“철혈검제 폐하의 적이라면, 참살(斬殺)할 뿐이다.”
“그야 뭐… 당연한 얘기죠.”
괜히 물어봤다는 듯이 비룡공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놈이 염옥공과 이천공을 쓰러뜨린 게 요행이 아니라면 우리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란즈슈타인의 후손 따위를 경계할 필요가 뭐가 있다고!”
금강공이 거친 목소리로 반발했다.
“그냥 나한테 맡겨라! 내가 놈을 죽이고 오겠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크윽……!”
“금강공,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에르나스는 만만치 않은 놈 같습니다.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비룡공이 고개를 움직였다.
“이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이 사람들?”
바로 그때.
무너진 요새 기둥 뒤에서 인영(人影)이 나타났다.
“아니, 어떻게……!”
“은신술이 제법 뛰어나지요? 이 시대의 암살자들이라고 합니다.”
비룡공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들을 소개했다.
“혈검장로회라고 하더군요. 저들이 먼저 저한테 접촉해 왔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공작님들.”
선두에 서 있던 노인이 공작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혈검장로회에서 수석 장로를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수석 장로…….”
“그동안 혈검장로회는 에르나스와 악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힘이 부족해 에르나스를 죽이지 못하고 있던 차에… 공작님들의 부활을 알고 다급히 달려온 것입니다.”
노인의 태도는 공손했다.
하지만 금강공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은신술을 사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상당한 실력자였다.
“저희들이 원하는 건 에르나스의 말살… 오직 그것뿐입니다.”
“정말로 원하는 건 그것뿐인가?”
“네, 다른 건 원치 않습니다.”
금강공에게 답하며 수석 장로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니 저희가 그동안 조사한 에르나스의 모든 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에르나스의 모든 것?”
“네, 특히…….”
수석 장로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놈의 약점이 될 만한 인물들의 리스트도 넘겨드리겠습니다. 놈의 여자들, 놈의 부하들, 놈의 스승들… 전부 말입니다.”
“흠, 약점이 될 만한 인물들이라…….”
“어떠십니까? 충분히 도움이 되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수석 장로 앞에서, 비룡공이 청월공에게 말을 건넸다.
“청월공, 어떻습니까? 쓸 만한 아군이지요?”
“…….”
청월공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대신, 수석 장로를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내밀었다.
“수석 장로라고 했나.”
“네, 공작님.”
“어째서 거짓말을 하는 거냐.”
“네?”
청월공의 말을 듣고 수석 장로가 몸을 움찔했다.
“에르나스의 목숨만을 원한다는 건 거짓말이다. 네 목소리에는 권력욕이 숨겨져 있더군.”
“무, 무슨 말씀을…….”
“이번 기회에 우리에게 접근하여, 철혈검제 폐하께서 만드실 세계에서 한자리 차지하려는 속셈이겠지.”
“……!”
수석 장로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청월공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착각하지 마라, 수석 장로.”
“무, 무슨…….”
“철혈검제 폐하께서 만드실 세계에, 네놈들 같은 암살자의 자리는 없다.”
“……!”
청월공이 허리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본 수석 장로가 다급히 단검을 뽑아 들었다. 옆에 있던 암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직후.
“……?”
청월공이 입을 다문 채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수석 장로가 당혹스러워했다.
“이, 이보시오, 대체…….”
“수석 장로.”
그때 금강공이 입을 열었다.
“이미 끝났다.”
“끝……?”
스르륵.
수석 장로의 상반신이 하반신 위에서 미끄러졌다.
청월공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둘러 수석 장로를 두 동강 낸 것이다.
“어떻게, 이런…….”
수석 장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숨을 거뒀다.
다른 암살자도 똑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정말로… 한숨만 나오는군요.”
비룡공이 답답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뼈밖에 남지 않았으면서 한숨을 쉴 수 있나? 신기하군.”
“비유적 표현입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어떤 인물인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는데, 이렇게 죽이면 어떻게 합니까.”
“정 궁금하다면, 네가 직접 확인하면 되지 않겠나.”
청월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더 확실할 텐데.”
“번거롭단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비룡공이 자신의 검을 뽑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두른 순간… 암살자들의 시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두 동강 난 시체들이 멋대로 움직이면서 서로 얽히더니… 하나의 기괴한 크리처가 되었다.
시체로 만들어졌지만, 그 형상은 날개 달린 드래곤에 가까웠다.
머리 부분에는 끔찍하게 일그러진 수석 장로의 머리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어쨌든 금강공, 청월공… 에르나스에게 무작정 달려드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비룡공의 검에서 기괴한 촉수가 뻗어 나갔다.
그리고 수석 장로의 머리에 달라붙어 꿈틀거렸다.
이제 곧… 수석 장로의 모든 기억이 비룡공에게 흡수될 것이다.
혈검장로회가 수집한 온갖 고급 정보가 비룡공의 것이 된다는 얘기다.
“염옥공이나 이천공처럼 각개격파당하면 곤란합니다. 에르나스는 우리 셋이 함께 토벌하도록 합시다.”
비룡공, 금강공, 청월공.
세 명의 초월적 존재가 에르나스를 표적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