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쌍검난무 (2)
헨리 랭커스터는 깊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조직이 변질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이 되었을 때 경험했던 ‘환골탈태’와는 차원이 다른 변화다.
‘이것이… 검귀가 된다는 것인가.’
초대 랭커스터 공작인 ‘이천공(二天公)’이 설명해 줬다.
검귀가 되면 심검(心劍)을 펼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정신세계의 속도를 물질세계에 구현하는 것으로, 마음 가는 대로 적을 벨 수 있게 된다는 것 같다.
‘예전이라면 허황된 소리로 치부했겠지만…….’
지금이라면 믿을 수 있다.
검귀가 된다면 정말로 정신세계의 속도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존재가 된다면… 나는 절정급의 벽을 넘을 수 있다.’
헨리는 미소를 지었다.
미하엘 발트펠트도, 칼레온 이그니아스도,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도, 브랜틀리 아그리파도 넘지 못했던 벽을… 자신이 넘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환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초월적인 힘을 얻는다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칼레온 이그니아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헨리가 감옥에 갇히게 된 건 칼레온과의 대결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레온은 이미 죽었다고 한다.
그러니 칼레온에게 복수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내가 복수해야 할 대상은…….’
어차피 칼레온도 거짓된 정보에 휘둘려 랭커스터 가문으로 쳐들어온 거였다.
헨리 랭커스터가 정말로 복수해야 할 존재는 따로 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놈이다……!’
아들인 레스터가 에르나스의 함정에 빠지면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헨리는 에르나스에게 대처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왔지만,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에르나스의 계략에 말려들어 아카데미의 토벌 대상이 되어 버렸다.
칼레온도 따지고 보면 에르나스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다.
‘레스터도… 에르나스에게 죽었으니까!’
에르나스는 헨리에게서 모든 것을 뺏어 갔다.
아들도, 가문도, 미래도… 전부 다 에르나스에게 강탈당했다.
그런데 에르나스 본인은 현재 리히테나워 기사단장의 자리에 올라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한다.
감옥에서 들었을 때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걸 어떻게 용납하란 말인가.
‘결코… 용서하지 못한다!’
격렬한 분노에 휩싸인 채.
헨리는 마침내 눈을 떴다.
“크아아아아……!”
어둠 속에서 벗어난 순간, 헨리는 전신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물론, 실제로 피부가 불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헨리의 피부에 도마뱀 같은 비늘이 돋아나고 있을 뿐이다.
“검귀가 되었군, 후손이여.”
어두운 풀밭 위에서, 해골 인간이 뒷짐을 진 채 헨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매우 강한 의념을 갖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는 훌륭한 검귀가 될 수 있겠군.”
“이, 이천공이시여…….”
끔찍한 감각에 고통스러워하는 헨리를 향해, 이천공이 침착한 목소리를 건넸다.
“강한 의념을 지닌 존재일수록 심검을 제대로 펼칠 수 있다. 너 정도면 확실히 절정급을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절정급을, 초월…….”
“아직 검귀의 몸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겠지만, 지금 한번 시험해 보거라.”
헨리는 뒤늦게 깨달았다.
주위에서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는 것을.
“습격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인 것으로 보이는군.”
“……!”
그 순간.
헨리는 전신에서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좋은 의념이다, 후손이여.”
이천공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헀다.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면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놈을 상대로 네 힘을 시험해 보거라.”
“아아아……!
이천공의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도 않았다.
헨리는 마력을 끌어올리며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 * *
촤악!
창뢰검형으로 검귀의 목을 베었다.
옷차림을 보니 바스티안 가문 출신의 그래듀에이트인 것 같았다.
‘유스트는 그동안 동부 지역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었어. 그걸 6공작들이 가로챈 건가.’
바스티안 가문의 그래듀에이트 중에서 검귀가 될 수 있었던 건 극히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숫자가 적어도 검귀는 충분히 위협적이다.
욜스나 안겔라 같은 지도 교수들, 그리고 세리느 등의 학생들이 빨리 호신강기를 터득해야만 맞설 수 있다.
‘그들이 호신강기에 능숙해지기 전까지는… 내가 대처해야겠지.’
지금 이곳에서는 이천공이 바탈리안 감옥의 죄수들을 검귀로 만드는 중이었다.
검귀의 숫자가 더 늘어나기 전에 이천공을 쓰러뜨리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지금 이천공은…….’
그 순간.
나는 이쪽을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마력을 감지했다.
“에르나스……!”
중년 남성이 나를 부르면서 미친 듯이 돌진해 오고 있었다.
랭커스터 가문의 가주였던 헨리 랭커스터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예전에 봤던 우아한 미중년이 아니었다.
얼굴에 온통 파충류의 비늘이 돋아나 있는, 추악한 모습이었다.
“검귀가 되었군, 헨리 랭커스터!”
다른 검귀들과 비교해도 추한 몰골이었다.
검귀화 과정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구나,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헨리는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었다.
일반적인 장검보다는 짧은 길이를 지닌 소검이다.
아들인 레스터가 그랬듯이, 헨리는 두 자루의 소검을 사용하여 변화무쌍한 검술을 펼치는 검사였다.
“이제야 비로소 네놈한테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거친 목소리로 외치면서 헨리가 두 자루의 검을 교차시켰다.
나는 그가 랭커스터 비익검술(比翼劍術)을 사용하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그가 심검을 손에 넣었다는 것도 눈치챘다.
“오오오……!”
헨리가 포효와 함께 심검을 펼쳤다.
마음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과 똑같은 속도로 현실의 검을 휘두른 것이다.
유스트 등 다른 검귀들의 유사 심검과는 비교가 안 되는 속도였다.
‘그래, 헨리도 6대 검술명가의 가주… 절정급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나도 정신세계의 속도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중이었다.
“……!”
콰콰콰쾅!
칼날이 연달아 부딪치면서, 연속적인 폭음이 퍼져 나갔다.
내가 공격을 전부 받아치자 헨리가 눈을 크게 떴다.
“네놈, 어떻게 내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자뢰검형이라는 거다, 헨리 랭커스터.”
자뢰검형은 자뢰검기 및 자뢰검강의 발전형으로, 알드바우트를 쓰러뜨릴 때 사용했던 검술이다.
흑천검의 공간지각력을 활용해서 치밀하게 계산된 연속 공격을 펼친다.
심검의 경지로 펼쳐지는 자뢰검형이라면, 헨리가 펼치는 랭커스터 비익검술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다.
게다가 지금 나는… 헨리와 마찬가지로 두 자루의 검을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윽……!”
쿠웅!
흑천검으로 헨리의 우검(右劍)을 흘려 보낸 뒤, 염살검으로 헨리의 좌검(左劍)을 쳐 냈다.
염살검은 염옥공이 사용하던 마검으로, 흑천검 같은 특수 기능은 없지만 순수한 성능은 흑천검 이상이다.
원래 자뢰검기 및 자뢰검강은 쌍검술이었기 때문에, 자뢰검형도 흑천검과 염살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으로 한층 더 현란한 연속 공격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에르나스……!”
촤악!
보라색 검기가 전개된 흑천검이 헨리의 우측 어깨를 스쳤지만, 헨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깨에서 피를 뿜으면서 미친 듯이 나한테 달려들었다.
“대단한 힘을 얻었구나! 하지만……!”
파앗!
헨리의 공격이 한 단계 더 교묘해졌다.
역시 변칙적인 서부 검술을 대표하는 검사답게, 불규칙한 연속 공격으로 나를 몰아세우려 했다.
“네놈 같은 애송이가 랭커스터 비익검술에 대항할 수 있을 리 없다……!”
“확실히, 랭커스터 비익검술은 대단한 검술인 것 같군.”
지금까지 나는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제대로 구경해 본 적이 없다.
궁지에 몰린 레스터가 억지로 사용하던 모습을 봤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구경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 할 수 있는데…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했다.
“헨리 랭커스터,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어.”
“뭐라고?”
“첫째, 당신은 이성을 잃은 상태야.”
촤악!
내 흑천검이 헨리의 우측 허벅지를 꿰뚫었다.
헨리가 너무 공격에만 치중한 나머지 방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랭커스터 비익검술이 변화무쌍하다고 해도, 당신이 그렇게 흥분한 상태에서는 허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어.”
“네놈……!”
“게다가 당신은 다른 검귀들보다 더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군.”
내가 이렇게 말해도 헨리는 냉정을 되찾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흥분해서 나한테 달려들었다.
“그리고 둘째… 나는 당신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 상태야.”
“크윽?!”
헨리의 우측 안구가 파열되었다.
염살검이 헨리의 얼굴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절정급을 초월해 검제급에 도달했어. 하지만 당신은… 인위적으로 검귀가 되었을 뿐이지.”
“네놈……!”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고 해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
게다가 헨리는 검귀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이미 총대주교, 알드바우트, 염옥공과 싸우면서 검제급의 힘에 익숙해진 나한테 대적할 수는 없다.
“닥쳐라, 에르나스……!”
헨리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네놈에게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네놈을……!”
“적반하장이야, 헨리.”
“뭐라고?!”
“애초에 당신 아들인 레스터가 나를 노리면서 시작된 일이었어.”
레스터가 아카데미에서 퇴출된 건 1차 시험에서 나를 기습하려 했다가 역공을 당했기 때문이다.
만약 레스터가 나를 건드리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면, 지금쯤 리히테나워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내 곁에서 싸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당신은 나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를 보냈고, 흑천마교와 손을 잡기도 했지. 당신은 나를 원망할 자격이 없어.”
“다, 닥쳐라!”
“랭커스터 가문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자업자득인 거지.”
“닥치란 말이다……!”
우측 눈구멍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헨리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뜩이나 흥분한 상태인데 한쪽 눈까지 잃어서 허점이 늘어났다.
나는 흑천검을 가로 방향으로 휘둘러 헨리의 공격을 튕겨 낸 뒤, 그대로 염살검을 뻗었다.
“끄아악……!”
처절한 비명.
헨리의 가슴 정중앙에 염살검이 꽂혔다.
검귀의 급소라 할 수 있는 흉골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심장까지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계속 나를 공격하려 했지만… 결국 검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에르나스, 에르나스, 네놈을, 네놈을…….”
마지막 발버둥을 치면서 헨리가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하지만 나는 헨리에게 시선을 향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인물에게 시선을 향했다.
우아한 예복 차림의 해골 인간… 초대 랭커스터 공작 ‘이천공’이었다.
“참으로 훌륭한 솜씨였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염옥공과 비교하면 신사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태도였다.
“염옥공을 쓰러뜨렸다는 얘기… 거짓이 아니었던 것 같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천공.”
하지만, 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헨리를 활용해서 내 정보는 많이 얻었나?”
“…….”
내 목소리를 듣고, 이천공이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헨리를 검귀로 개조해서 나한테 미끼로 던져 줬지. 그리고 나와 헨리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내 검술을 관찰한 거야.”
“…….”
“헨리의 이성을 마비시켜 복수의 화신으로 만든 것도, 마지막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한테 달려드는 걸 기대했기 때문 아닌가?”
이천공은 겉으로 보기에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신사지만, 실제로는 교활하고 주도면밀한 악당이다.
적어도 내 설정에서는 그렇다.
“자신의 후손을 그런 식으로 써먹다니… 염옥공이 보면 눈살을 찌푸렸겠어.”
“그럴 리가 없지. 찌푸릴 눈살이 없으니까.”
이천공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에르나스, 네 추측이 맞다. 염옥공을 쓰러뜨린 검사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충분히 확인했나?”
“그래, 대충 파악했다. 염옥공을 쓰러뜨렸다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그렇게 말하면서 이천공이 허리에 차고 있던 쌍검을 뽑았다.
해와 달의 문양이 새겨진 쌍검, 음양검(陰陽劍).
이천공은 저 쌍검을 사용해 누구보다 변화무쌍한 검술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펼치는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당해 낼 수는 없을 것 같구나.”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검제급에 도달한 본인의 힘이라면 내 자뢰검형을 충분히 파훼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실 이건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내가 염옥공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건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이 비교적 대응하기 쉬운 검술이었기 때문이다.
이천공이 변화무쌍한 랭커스터 비익검술로 심검을 펼친다면… 현재의 자뢰검형으로는 대응하기 힘들다.
애초에 자뢰검형은 변화에 약한 동부 검술인 마르테리스 이륜검술을 바탕으로 한 검술이니… 한계가 있다.
“글쎄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이천공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겠지, 이천공.”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내 옷자락을 잡고 있던 헨리의 손을 꽉 쥐었다.
[인물 ‘헨리 랭커스터’에 대한 ‘능력 재현’을 시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