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쌍검난무 (1)
플라티온 평야의 전투가 끝나고, 뒤처리까지 마무리된 뒤.
나는 후방에서 홀로 틀어박혀 있는 세리느를 찾았다.
“세리느, 잠깐만 들어갈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어두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세리느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세리느…….”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세리느가 고개를 들고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초췌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눈빛이 살아 있었다.
“걱정을 끼친 것 같네요, 에르나스.”
세리느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
이번 전투에서 유스트 바스티안이 죽었다.
아버지가 눈앞에서 불타 죽는 모습을 봤으니…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리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설의 주인공 아칸델이었다면 이 시점에서 세리느를 끌어안고 솔직한 위로의 말을 건넸겠지만… 내가 그렇게 해 봤자 세리느를 더 당혹스럽게 만들 뿐이다.
“후방에서 쉬어도 괜찮아. 바스티안 가문으로 돌아가도 되고.”
“아니요, 그럴 수는 없어요.”
세리느가 고개를 저었다.
“계속해서 함께 싸우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에르나스.”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어요. 육체도 변질되어 평범한 인간이 아니게 되어 버렸고… 게다가 염옥공의 학살에도 가담했죠.”
“…….”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말한 뒤, 세리느가 씁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베리스리제도 아버지가 죽은 뒤 슈라이에르 가문을 잘 수습했어요. 저도 정신 차리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죠.”
“…….”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바스티안 가문은 제가 이어받아야 해요. 바스티안 가문의 후계자로서, 제 역할을 하겠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는 그런 캐릭터였지…….”
“네?”
세리느 바스티안.
항상 올곧고, 결코 꺾이지 않는… 내 소설의 히로인.
그녀가 아버지의 죽음에 절망할 리가 없다.
계속해서 검을 들고, 누구보다 앞에 나서서 싸우려 할 것이다.
“역시 내가 애정을 쏟던 히로인이야.”
“네……?”
세리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아니, 역시 내가 경애하던 세리느답다고. 명문 바스티안 가문의 후계자로서 항상 훌륭한 마음가짐을 보여 줬으니까…….”
“아, 네…….”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세리느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헛기침을 했다.
사실… 작가로서 내가 가장 애정을 쏟았던 히로인은 세리느다.
명색이 메인 히로인이니까 당연히 내 취향을 가득 담아서 조형했다.
다만 소설에서 주인공 아칸델과 짝을 이뤘던 히로인이라… 세리느와의 관계를 진전시킨다는 건 좀 거부감이 느껴졌다.
모든 싸움이 끝난 뒤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어, 어쨌든 에르나스.”
세리느도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적들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설명해 주세요. 앞으로도 계속 함께 싸울 테니까.”
“그래… 그렇게 해야겠지.”
황궁에 메시지를 보내긴 했지만, 자세한 건 설명하지 못했다.
세리느는 내 오른팔인 만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철혈검제와 6공작들이야.”
“영묘에 잠들었던 그분들이 부활한 거죠?”
“그래, 그리고 영묘에서 부활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란즈슈타인 가문도 그들의 아군이야.”
페르펙티오가 이끄는 란즈슈타인 가문.
그들은 그동안 영묘 내부에서 위령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에르나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요? 아버님이 그들을 돕고 있었다는 걸?”
“아버지가 비밀리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일일 거라 생각했지.”
소설의 에르나스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실제로 부활이 이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위령제는 그냥 위령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물론, 작가인 나는 진실을 다 알고 있지만 말이다.
“예전부터 아버지는 아무 쓸모 없는 일에 푹 빠져 있을 때가 많았으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죠.”
“하지만 총본산에서 총대주교가 마지막 순간에 얘기를 해 주더라고. 철혈검제가 부활할 수 있다고 말이야.”
“총대주교가 그런 얘기를 했다고요?”
“그래. 그걸 듣고 아버지가 하던 일이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거야.”
“그래서 급하게 움직였던 거군요.”
총대주교에게 들었다고 둘러대면, 내가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현재 영묘는 동부 해안에 상륙한 상태일 거야.”
“상륙이요? 바다 위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영묘의 정체는 고대 문명의 이동 요새야. 그러니 바다를 가로질러 해안까지 올 수 있는 거지.”
“세상에…….”
“내 아버지는 철혈검제와 함께 영묘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6공작들은 제국 제압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테고.”
염옥공을 쓰러뜨렸으니, 이제 다섯 명 남았다.
“염옥공은 선봉장으로서 가장 먼저 황궁으로 달려가려 하고 있었어. 그 염옥공이 쓰러졌으니, 다른 6공작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려 하겠지.”
“다른 6공작들…….”
“염옥공은 쓰러지기 전에 이천공(二天公)을 언급했어. 초대 랭커스터 공작 말이야.”
랭커스터 가문은 소검을 사용한 쌍검술이 뛰어났다.
이천공도 두 자루의 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쌍검사다.
“그러니 다음에는 이천공과 싸우게 되겠지. 하지만 나머지 네 명도 각자 동부에서 움직이고 있을 테고, 그들의 동향도 주의해야 해.”
“그러면 나머지 6공작들의 움직임도 파악해야 하겠군요.”
“그래, 올레아나 님을 통해서 동부의 여러 가문에게 협력을 요청할 생각이야.”
바스티안 가문이 그렇게 된 이상, 동부에서 의지할 만한 건 올레아나의 클라리온 가문뿐이다.
올레아나는 페르펙티오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나한테 붙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에르나스… 6공작들의 동향을 파악한다고 해서 그들을 막을 수 있을까요?”
세리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6공작도 6공작이지만, 그들의 부하도 무척 강했어요.”
“검귀 말이군…….”
검귀는 골치 아픈 적이다.
잔챙이조차 검귀가 되면 정신세계의 속도를 발휘할 수 있게 되니까.
“세리느, 검귀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속도로 검을 휘두를 수 있어. 만약 절정급이 검귀가 되면 나 말고는 쓰러뜨릴 수 없을 거야.”
“다른 절정급… 지도 교수님들도 불가능할까요?”
“어렵겠지. 다만 절정급 검귀는 거의 없을 테고… 그래듀에이트 상급이었던 검귀가 대부분일 거야.”
절정급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유스트처럼 그래듀에이트 상급 출신이 대부분일 것이다.
“문제는 그래듀에이트 상급이어도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속도를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야. 절정급의 지도 교수들도 이 속도에는 대응할 수 없어.”
“그,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래듀에이트 상급이었던 검귀는 그 속도를 자유자재로 발휘하지 못해. 아주 잠깐 동안만 발휘할 수 있을 뿐이고, 준비 과정이 필요하지.”
이건 유스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타이밍만 맞추면 막을 수 있어.”
“에르나스, 말이야 쉽지만 그걸 어떻게…….”
“아, 적의 공격을 보면서 막으라는 게 아니야.”
“네?”
“그냥 몸으로 받으면 돼.”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공격을… 몸으로 받으라고요?”
세리느가 눈을 깜박였다.
“호신기가 버티지 못할 텐데요?”
“호신기로 막으라는 게 아니야.”
“……?”
어리둥절해하는 세리느를 보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호신기보다 더 강력한 걸 전개하면 되거든.”
* * *
황궁 제4구역.
그곳에서 안겔라는 가부좌를 틀고 마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후우…….”
연공을 마친 안겔라가 몸을 일으키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욜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안겔라 교수님, 다 끝나셨습니까?”
“그래, 욜스 교수.”
안겔라는 가볍게 몸을 풀면서 대답했다.
“역시 흑색 엘릭시르야. 부상을 입기 전보다 몸 상태가 훨씬 좋아졌어.”
“다행이군요.”
“황녀 전하에게 고맙다고 말해야겠군.”
레이나데 황녀는 황실이 보유하고 있던 흑색 엘릭시르를 모조리 제공해 주기로 했다.
그동안 레이나데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애인 척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철혈검제가 부활하여 제국을 빼앗으려고 하는 상황이다.
레이나데는 에르나스를 등에 업고 빠르게 황궁 내부를 장악한 뒤, 전폭적인 협력을 해 주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우리도 빨리 동부로 달려가야겠어. 에르나스한테만 맡겨 둘 수는 없으니까.”
“그래야겠죠.”
지금 동부로 떠난 리히테나워 기사단에는 절정급 이상이 에르나스밖에 없다.
에르나스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빨리 가야 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조금 더 오래 걸릴 것 같군.”
“페르디난드 교수님!”
그때 페르디난드가 피곤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철혈기사단 4석이었던 폴티아나 클라리온과 함께였다.
“황실이 보유하고 있던 영약의 재료를 사용하면 암리타를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최대한 많이 제조한 뒤 동부로 들고 가도록 하지.”
“암리타를……!”
암리타는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닌 고대 영약이다.
흑색 엘릭시르뿐만 아니라 암리타까지 보급된다면 앞으로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두 사람이 먼저 동부로 가서 내 몫까지 에르나스를 도와줘. 그 녀석 혼자만으로는 힘이 부칠 수도 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
“아, 그리고… 에르나스가 알려 준 그 기술은 제대로 습득했나?”
“물론입니다.”
욜스가 고개를 끄덕인 뒤 전신에 마력을 전개했다.
눈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평범한 호신기가 아니었다.
“폴티아나 경, 욜스 교수를 검기로 공격해 보게.”
“네? 검기로 말입니까?”
페르디난드의 요청에 폴티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어디라도 상관없으니, 검기를 전개한 칼날로 공격해 보라고.”
“교수님, 저도 그래듀에이트 상급입니다. 욜스 교수님이 아무리 절정급이라고 해도…….”
“시간이 부족해! 빨리 하라고!”
“아, 알겠습니다!”
폴티아나가 다급히 검기를 전개했다.
그리고 침을 삼키며 욜스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압……!”
쿠웅!
폴티아나의 검기가 욜스의 왼쪽 어깨와 충돌했다.
하지만… 충격파가 발생했을 뿐, 욜스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어, 어떻게 이런……!”
“대단한 방어력이군.”
“네, 정말 훌륭합니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마력으로 펼친 검기조차 막아 낼 수 있다니 말입니다.”
욜스가 육체 표면에 전개한 마력을 거둬들였다.
“오래 유지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타이밍을 맞춰서 사용하면 검귀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래, 에르나스의 말대로라면 다른 검귀들은 대부분 알드바우트 총장보다 약할 거라니 말이야.”
“네, 이 힘이 있으면 검귀들과도 싸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욜스가 미소를 지었다.
“에르나스가 자신의 검강(劍鋼)을 어레인지해서 만들어 낸… 이 호신강기(護身鋼氣)라면 말입니다.”
호신기의 상위 버전, 호신강기.
이것이 바로 에르나스가 준비한 검귀 대책이었다.
* * *
나는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한 사람들에게 호신강기를 전수했다.
호신강기는 일반 호신기보다 지속 시간이 짧지만, 그만큼 방어력이 우수하다.
검기보다 검강이 견고한 것과 같은 원리다.
타이밍만 잘 맞아떨어진다면 검귀가 정신세계의 속도로 공격해도 방어할 수 있다.
욜스나 안겔라 같은 절정급이라면 혼자서도 검귀 여럿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알드바우트 같은 절정급 출신 검귀가 아닐 경우에 한정된 얘기지만 말이다.
‘절정급 출신의 검귀는 오로지 나만이 쓰러뜨릴 수 있으니까.’
현재 철혈검제 진영의 전력을 살펴보면… 일단 맨 꼭대기에 철혈검제가 있고, 그다음에 검제급인 6공작들이 있다.
그리고 절정급인 페르펙티오와 알레이시가 있지만, 그 아래는… 절정급이 없다.
‘적어도 소설에서는 더 이상 절정급이 없었어. 하지만…….’
헨리 랭커스터.
소설이었다면 한참 전에 사망했을 랭커스터 가문의 가주.
절정급의 쌍검사였던 그 남자가 아직 살아 있다.
게다가 내 예상으로는…….
“…….”
나는 언덕 위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클로에한테 들었던 바탈리온 감옥이 불타고 있었다.
명문가의 그래듀에이트들을 가둬 놓는 저 시설이 불타고 있다는 건, 절정급 이상의 힘을 지닌 존재가 습격했다는 소리다.
그리고…….
‘마력이 느껴져.’
감옥을 중심으로 마법진이 전개되고 있었다.
수감되어 있던 그래듀에이트를 검귀로 변화시키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정말로 거대한 마력을 지닌 존재가 있었다.
‘염옥공하고 비슷한 수준의 존재감… 이천공인가.’
마법진의 영향으로 자세하게 감지할 수 없었지만, 아마 헨리 랭커스터도 함께 있을 것이다.
‘검귀가 더 늘어나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겠어.’
나는 소리 없이 언덕을 내려갔다.
지금 내 허리에는 흑천검뿐만 아니라… 염옥공을 쓰러뜨린 뒤 획득한 염살검까지 꽂혀 있는 상태였다.
‘이천공도, 헨리 랭커스터도… 내가 쓰러뜨린다.’
그렇게 다짐하면서, 나는 두 자루의 마검을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