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염옥 (6)
‘이것이 진짜 디 인페르노인가.’
눈앞에서 전개된 거대한 화염을 확인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칼레온이 펼쳤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화력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칼레온과의 전투를 묘사했을 때는 염옥공의 화력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썼는데, 잘못된 묘사였던 것 같다.
물론, 천 년 전보다 염옥공의 힘이 더 강해진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정말로 엄청난 화력이야.’
지금 염옥공의 뼈도 녹아내리고 있었다.
염옥공 자신도 이 화력을 견뎌 내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이것은… 의념이 담긴 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에르나스를 불태워 죽이겠다는 의지.
그것이 담긴 디 인페르노이기에 이렇게 화력이 극대화된 게 아닐까.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염옥공도 나처럼 의념으로 속도 외의 것을 강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염옥공은 철혈검제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
정신세계의 속도를 구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 이상을 추구하는 건 철혈검제의 영역을 넘보는 일이다.
그런 주제 넘는 짓은 하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 무의식적으로 그 한계를 넘어선 건가.’
나를 향한 분노 덕분에, 순간적으로 새로운 영역에 진입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정도는 아직 검제급의 범위 안이라 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6공작들도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
다른 6공작들도 염옥공처럼 소설 설정 이상의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항상 전력을 다하면서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나는 도중에 패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마찬가지.’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나를 덮치려 하는 거대한 화염.
저것을 막아 내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싸움에서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무엇이든 막아 낼 수 있는… 최강의 방패가 필요하다.’
상상력을 발휘해라.
발상력을 극대화해라.
내가 6공작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건 오로지 이것뿐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최강의 방어 기술을 만들어야 한다.
‘마력으로… 방어막을 만드는 거야.’
나는 흑천검을 움직였다.
원을 그리듯이, 의념을 담아서.
남아 있는 모든 마력을 쥐어짰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마력조차 모조리 끌어모았다.
그 모든 마력을 합쳐서, 궁극의 방어막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검막(劍幕)이다.’
쿠쿠쿠쿵!
디 인페르노의 막대한 화염이 나를 덮쳤다.
하지만 화염은 내 몸에 조금도 닿지 않았다.
내 의념이 담긴 방어막이 화염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흑천검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이라도 의지가 꺾이면 디 인페르노의 불꽃이 검막을 뚫고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큭……!”
한순간 정신세계에서 의념을 전개하는 것하고는 다르다.
디 인페르노의 지속 시간 동안, 이 의념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의념으로 염옥공의 디 인페르노를 막는다.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했다.
“오오오오!”
“하아아압!”
염옥공의 포효와 내 기합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디 인페르노의 화력이 극에 달했고, 내 검막도 한계를 넘어섰다.
“……!”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거대한 폭발에서 발생하는 빛이 내 시력을 마비시킨 것이다.
이어서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것도 폭발로 인한 굉음이 청력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의념을 유지했다.
그리고…….
“…….”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력과 청력이 회복되었을 때, 주위는 모조리 불타고 재만 남아 있었다.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들었다.
“아…….”
염옥공이 서 있었다.
그 두개골의 눈구멍에서는 여전히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원통하구나…….”
염옥공의 뼈가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화장터에 남은 뼛가루처럼, 하얀 가루가 되어서.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여… 자만하지 마라.”
염옥공이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이 아무리 날뛰어도… 다른 공작들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
“네놈이 나를 상대할 수 있었던 건… 네놈이 이미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은 정석적인 움직임을 중시하는 동부 검술이기에, 어떤 기술을 쓰는지 알고 있으면 대응하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다음에 네놈에게 칼을 들이댈 놈은 랭커스터다.”
“…….”
랭커스터.
이건 서부를 지배하던 공작 가문의 시조… 초대 랭커스터 공작을 가리키는 말이다.
“랭커스터의 변화무쌍한 검술에… 너 같은 애송이가 대항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게 저주의 말을 남기며, 염옥공이 웃었다.
“네놈의 패배를… 지옥에서 지켜보고 있겠다.”
웃음소리를 남긴 채, 염옥공의 골격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뼛가루조차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염살검뿐이었다.
“…….”
나는 입을 다문 채 걸어갔다.
그리고 염살검을 집어 들었다.
“검집이 새로 필요하겠군.”
불꽃 무늬가 새겨져 있는 칼날을 살펴보고 있자, 멀리서 클로에가 다가왔다.
“에르나스 님…….”
불타 버린 평야를 둘러보면서, 클로에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싸움을 벌이신 건가요?”
“네가 지켜본 대로인데.”
“아니,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요. 마지막에 디 인페르노를 막던 걸 빼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었어요.”
클로에는 그래듀에이트 상급이다.
충분히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검제급의 심검 대결을 눈으로 좇기는 어려울 것이다.
“에르나스 님, 그러면 방금 상대한 그 해골은…….”
“초대 이그니아스 공작이야.”
“디 인페르노를 쓰는 모습을 보고 예상했긴 했지만… 정말 놀랍네요.”
예전에 클로에는 칼레온의 디 인페르노를 경험했다.
그러니 이그니아스 가문의 관련자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가 싸우는 상대는 역시…….”
“그래, 철혈검제의 측근이었던 6공작들이지.”
“후우…….”
클로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이런 괴물이 다섯이나 더 있다는 얘기네요.”
“철혈검제도 있고 말이지.”
“아이고, 머리야…….”
정말로 두통을 느끼는지 클로에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거죠? 천 년 전의 영웅들이 되살아나다니, 무슨 소설도 아니고.”
“그러게 말이야.”
미안하다, 클로에.
이건 소설 맞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에르나스 님…….”
“네가 원하는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라도, 놈들을 그냥 내버려 둬서는 안 돼.”
철혈검제는 제국을 다시 지배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 하고 있다.
클로에 같은 참모 스타일은 그런 세계에서 설 자리가 없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거든요.”
클로에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주위를 보세요. 놈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권력을 잡고 어쩌고 하기 전에 다 죽을 것 같은데요.”
“그건 뭐…….”
주위에는 동부의 그래듀에이트가 많이 쓰러져 있었다.
염옥공과 그 부하들이 죽인 것이다.
“클로에, 세리느는 지금…….”
“혼자 있게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염옥공의 부하가 되었던 유스트는 결국 목숨을 잃었다.
내가 숨통을 끊은 건 아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세리느가 진정되면 얘기를 나눠 봐야 할 것이다.
‘아칸델이라면 이럴 때 세리느와 정면에서 마주 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눌 텐데…….’
소설 속 주인공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에, 다음에 상대하게 될 건 초대 랭커스터 공작일 거야.”
심란한 가정을 쫓아 버리기 위해, 다른 얘기를 꺼냈다.
“헨리 랭커스터의 먼 조상이지.”
“헨리 랭커스터… 6대 검술명가 중에서 가장 먼저 탈락한 사람이군요.”
예전에 나는 아카데미에서 레스터 랭커스터를 쫓아냈다.
아버지인 헨리 랭커스터는 그 일로 나에게 원한을 가졌고, 나를 암살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헨리의 행보를 모조리 꿰뚫어 보고 있었고, 함정에 빠뜨려 아카데미의 토벌 대상으로 만들었다.
결국 헨리는 칼레온과의 싸움에서 패배했고, 랭커스터 가문도 괴멸되었다.
“솔직히 초대 이그니아스 공작보다 버거운 상대가 될 거야.”
“그럴까요?”
다른 가문의 검술은 알 만큼 안다.
하지만 랭커스터 가문의 검술은 별로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 당시에 나는 헨리와 싸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헨리는 칼레온이 쓰러뜨렸고, 나는 헨리와는 한 번도 검을 맞대지 못했다.
“헨리 랭커스터가 살아 있었다면… 좀 도움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유스레흐트로 복사하면 초대 랭커스터 공작과의 싸움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좀 아까웠다.
“에르나스 님? 무슨 소리죠?”
“뭐?”
“아, 모르셨나요? 그러고 보니 그 얘기가 나왔을 때 에르나스 님은 다른 곳에 가 있으셨구나.”
클로에가 내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헨리 랭커스터는 처형되지 않았어요.”
“뭐?”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히는 무기징역으로 판결이 내려졌다고 아는데요.”
“……!”
처음 듣는 얘기였다.
소설에서는 사형이 내려졌기 때문에,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때문에 여러 가지 상황이 바뀌면서 헨리의 처벌 수위도 달라진 모양이었다.
“클로에, 그러면 지금 헨리는 어디 있지?”
헨리가 살아 있다면 이용 가치가 있다.
잠깐 만나서 SS랭크의 랭커스터 비익검술을 얻어 내기만 하면 된다.
“그게…….”
하지만… 클로에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릴 뿐이었다.
* * *
바탈리온 감옥.
동부 지역에 세워진 이곳은 평범한 감옥과는 다르다.
강력한 힘을 지닌 그래듀에이트를 가둬 놓는 감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검술명가의 실력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갇히게 된다.
랭커스터 가문의 가주였던 헨리 랭커스터 또한… 이곳에 갇혀 있는 죄수 중 한 사람이었다.
“…….”
헨리는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침침한 독방에서 축 처져 있었다.
원래 헨리는 감옥 정도는 깨부수고 탈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만, 마력을 흡수하는 쇠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에 탈옥은 불가능하다.
그냥 쇠사슬에 묶인 채… 무의미한 하루를 보낼 뿐이다.
“……?”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감옥 전체가 소란스러웠다.
심지어 비명 소리까지 들렸다.
혹시 간수가 쇠사슬 관리를 잘못해서 죄수가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걸까.
“여기인가?”
“그, 그렇습… 끄악!”
급기야 헨리의 독방 근처에서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당혹스러워하며 헨리가 고개를 치켜들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산산조각 났다.
“……!”
헨리는 숨을 삼켰다.
문이 산산조각 난 것 때문이 아니다.
독방 안으로 들어온 인물이… 무시무시한 외모를 지닌 해골이었기 때문이다.
“대, 대체 뭐냐?!”
옛날이었다면 검을 치켜들고 대항했겠지만, 지금 헨리는 무력하다.
독방 구석으로 도망치면서 목소리를 높이자, 해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들렀는데, 설마 후손이 갇혀 있었을 줄이야.”
“후, 후손?”
“그렇다, 후손이여.”
무시무시한 외모와는 달리, 해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위엄이 있긴 했지만, 친근감도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내가 바로 초대 랭커스터 공작… 이천공(二天公)이다.”
“……?!”
“못 믿겠나?”
해골이 허리에 차고 있던 두 자루의 검을 뽑았다.
그 칼날에 새겨진 해와 달의 문양을 확인하고, 헨리는 숨을 삼켰다.
“그, 그것은… 초대 랭커스터 공작이 사용했다던 음양검(陰陽劍)?”
“잘 알고 있구나, 후손이여.”
해골이 고개를 끄덕인 뒤, 갑자기 검을 휘둘렀다.
헨리는 죽음을 각오했지만, 해골의 검은 헨리를 속박하고 있던 쇠사슬을 절단했을 뿐이었다.
“나하고 함께 가자, 후손이여.”
“이, 이천공이시여…….”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헨리가 입을 열었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아주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저, 저는 오랜 감옥 생활로 몸도 약해진 상태입니다. 무슨 일을 하시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굳이 저 같은 걸 데려가실 필요는…….”
“걱정하지 마라.”
“네?”
“내가 너한테 힘을 주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해골이 손을 내밀었다.
“후손이여, 힘을 원하지 않나?”
“히, 힘을……?”
“너를 이런 감옥에 처박은 놈이 있을 텐데? 그놈한테 복수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지 않나?”
“……!”
헨리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해골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하고 싶은 놈이 있나 보군. 그러면 더더욱 힘이 필요할 터.”
“이, 이천공이시여…….”
“걱정 말거라, 후손이여.”
해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힘을 주마. 우리 함께 이 세상의 모든 원적(怨敵)을 베어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꾸나.”
“…….”
헨리는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뼈밖에 없는 선조의 손을 잡고…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