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181화 (180/212)

181화 염옥 (2)

“흑천마교 토벌, 수고 많으셨습니다.”

칼데아스 사무관은 만면의 미소와 함께 리히테나워 기사단을 맞이했다.

“기사단 여러분이 정말로 큰일을 해 주셨군요.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입니다.”

칼데아스는 그동안 계속 에르나스를 지지해 왔다.

철혈기사단의 난동 이후에는 사태를 수습하고 리히테나워 기사단 창설에도 협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히테나워 기사단이 흑천마교 총본산을 공략하여 총대주교를 쓰러뜨렸다는 건 정말로 반가운 일이었다.

“그런데… 에르나스 님은 어디 계십니까?”

“…….”

칼데아스가 아무리 주위를 살펴봐도 에르나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에르나스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칼데아스 사무관.”

“오오, 세리느 님.”

세리느가 앞으로 나섰다.

원래 에르나스가 없으면 부단장인 브랜틀리, 브랜틀리가 없으면 발렌티아노 교수나 안겔라 교수가 책임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

하지만 브랜틀리와 발렌티아노는 전사했고, 안겔라는 부상 때문에 휴식이 필요했다.

다른 평교수들도 있긴 하지만… 그동안 에르나스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하면서 오른팔 역할을 해 왔던 건 세리느다.

그래서 지금 세리느가 임시로 단장 대리 역할을 맡고 있었다.

“에르나스는 급한 일이 있어서 아카데미로 향한 상태입니다.”

“아카데미로?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칼데아스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에르나스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황궁으로 달려와 이번 공적을 어필해야 한다.

아직도 에르나스에게 의구심을 갖고 있는 대신이 많기 때문이다.

여러 검술명가를 쓰러뜨리고 철혈기사단을 무력화한 에르나스를 경계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세리느 님, 지금은 이번 공적을 대대적으로 어필하면서 황실의 수호자라는 점을 강조해야 할 때입니다만…….”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에르나스 본인이 아카데미로 가 버렸으니까요.”

“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아카데미에 무슨 볼일이 있길래…….”

“거기까지는 저희도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제국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았습니다.”

“제국의 미래……?”

그때 세리느 곁에 있던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벌어질 싸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에르나스 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앞으로 누구와 싸운다는 겁니까?”

칼데아스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흑천마교도 멸망했고, 검술명가들도 대부분 무력화되었습니다. 아그리파 가문조차 브랜틀리 님이 전사하셨기 때문에 군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제 에르나스 님과 싸울 상대는… 제국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얘기하다가, 칼데아스는 몸을 움찔했다.

“자, 잠깐만요. 혹시 몇몇 대신이 우려하는 것처럼…….”

“칼데아스 사무관,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에르나스도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저희들한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그러면 다행입니다만…….”

칼데아스가 우려한 건, 에르나스가 황실에 칼을 들이대는 상황이었다.

에르나스가 반역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예전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르나스가 그런 마음을 먹고 있다면… 굳이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어떤 준비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도 그렇군요.”

현재 황궁에는 에르나스를 막을 수 있는 전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에르나스가 반역을 저지를 생각이라면 바로 황궁을 습격하면 된다.

굳이 아카데미에 들르면서 수상한 행보를 보일 필요가 없다.

“그러면 대체 누구와 싸운다는 겁니까? 에르나스 님이 별도의 준비까지 하면서 싸워야 할 상대라니…….”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 대륙에는 더 이상 에르나스 님과 싸울 만한 세력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칼데아스는 피식 웃었다.

“아, 딱 하나 있긴 하군요. 란즈슈타인 가문이 건재하니까 말입니다.”

물론, 이건 칼데아스의 농담이다.

에르나스가 란즈슈타인 가문 출신인데 왜 란즈슈타인 가문과 싸운단 말인가.

“…….”

하지만, 세리느의 표정은 딱딱했다.

칼데아스의 발언을 전혀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건 옆에 있는 클로에도 마찬가지였다.

“어, 어라? 여러분, 왜 그런 표정을…….”

칼데아스가 당혹스러워하면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을 때.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러분!”

“폴티아나 경?”

현재 철혈기사단의 임시 단장을 맡고 있는 폴티아나 클라리온이었다.

원래 그녀는 철혈기사단 4석이었지만, 카톨레아스 대주교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

“방금… 동부에서 통신 마법으로 급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동부라고요?”

칼데아스는 눈을 크게 떴다.

이그니아스 가문이 무력화된 이후로 조용하기만 했던 동부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대체 무슨 일이죠? 설마 란즈슈타인 가문이…….”

“그것이…….”

폴티아나가 주저하면서 말했다.

“정체불명의 군단이 동부 해안에 상륙해… 학살을 벌이며 진군하고 있다고 합니다!”

“……!”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소식에, 모든 이가 눈을 크게 떴다.

* *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올레아나 클라리온은 탄식했다.

동부에서 손꼽히는 대귀족인 클라리온 가문의 수장으로서, 올레아나는 동부 지역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올레아나의 능력으로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도저히 대처할 수 없었다.

“이게… 지옥인 걸까요?”

지금 올레아나의 눈앞에는 플라티온 평야가 펼쳐져 있다.

몇 달 전까지 검왕(劍王) 가르디우스 플라티온이 지배하던 곳으로, 아카데미가 이그니아스 가문에 큰 피해를 입힌 격전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플라티온 평야는 온통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사, 살려 줘……!”

“아아악……!”

평야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올레아나가 소집한 동부 지역의 그래듀에이트들이다.

최근 동부 지역을 유린하고 있는 괴집단을 막기 위해 소집한 것이었는데… 순식간에 괴멸되고 말았다.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들이…….”

며칠 전, 동부 해안에 괴이한 집단이 나타났다.

숫자는 고작 열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시체가 쌓였다.

그것도 평범한 시체가 아니라 ‘불에 탄’ 시체였다.

“이그니아스 가문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는데, 대체 어디서…….”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그들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부 지역에서 계속 서쪽으로 가면 황궁이 있는 중부 지역에 진입하게 된다.

그들의 목적지가 황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황궁에 가까이 가는 걸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리히테나워 기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고 했는데, 이래서는…….”

오늘 이곳에 모인 병력 중에는 그래듀에이트 상급도 수십 명이었다.

그런데 놈들에게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놈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래듀에이트 절정급 수준의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건 놈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다.

그는 막대한 양의 화염을 방출하여 이 평야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올레아나가 보기에… 그는 절정급을 초월한 힘을 갖고 있었다.

“지옥에서 나타난 악마라도 되는 걸까요……?”

솔직히 올레아나는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놈들의 우두머리가 보여 준 초월적인 힘도 두렵지만… 우두머리의 외견 자체가 무서웠다.

살점이 하나도 없는, 해골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뼈다귀가 검을 들고 전장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저건 아무래도…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듯합니다.”

저런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이 제국에 두 명뿐일 것이다.

최근 흑천마교를 멸망시켰다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리고 에르나스의 아버지인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이다.

하지만 페르펙티오는 현재 철혈검제의 영묘에서 위령제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니, 믿을 만한 건 에르나스밖에 없다.

“후퇴해야겠군요. 그리고 에르나스를 만나 제가 본 것들을 직접…….”

부관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올레아나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다.

등 뒤에 서 있던 부관들이 전원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어째서…….”

부관들의 목숨을 빼앗은 건, 소리 없이 나타난 중년의 남자였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올레아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건가요, 유스트 바스티안……?”

유스트 바스티안 후작.

그는 올레아나와 동격이라 할 수 있는 명문 귀족이다.

대표적인 친(親)란즈슈타인 세력이라 할 수 있으며. 지난번에도 올레아나와 함께 이그니아스 가문에 맞섰다.

그런 그가… 피에 물든 검을 들고 올레아나의 부관들을 참살한 것이다.

“바스티안 가문의 그래듀에이트들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서 혹시나 했는데, 설마 저 악마들의 한패가 된 것인가요?”

“악마라니.”

유스트가 피식 웃었다.

“불경하군요.”

“불경?”

“감히 저분에게 그런 표현을 쓰다니… 동부를 대표하는 명문가답지 못합니다. 반성하십시오.”

올레아나는 허를 찔렸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 못 했기 때문이다.

“유스트 님, 그게 무슨 소리죠?”

“저분은 우리가 섬겨야 할 분입니다.”

“뭐라고요?”

“위대하신 시조 황제… 철혈검제 폐하의 뜻을 대행하는 분이시죠.”

“처, 철혈검제 폐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천 년 전에 죽은 철혈검제의 이름이 왜 여기에서 언급된단 말인가.

“저 해골이 대체 뭐길래…….”

“어허, 말조심하십시오, 올레아나 님.”

유스트가 훈계하듯이 말했다.

“저분이야말로 초대 이그니아스 공작… ‘염옥공’이십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올레아나는 유스트가 실성한 거라 생각했다.

천 년 전에 철혈검제와 함께 영묘에 잠든 초대 이그니아스 공작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믿지 못하시나 보군요.”

그런 올레아나를 보면서 유스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올레아나 님, 그러면 저처럼 경험해 보시겠습니까?”

“경험이라니, 무엇을…….”

“염옥공의 불꽃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유스트가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감춰져 있던 맨얼굴이 드러났다.

“저처럼 염옥공의 불꽃을 직접 경험해 보시면… 올레아나 님도 모든 걸 내던지고 저분에게 절대복종하게 될 겁니다.”

“……!”

유스트는 얼굴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심지어 살이 타서 뼈가 드러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불타 죽은 시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평범한 인간은 그냥 그 자리에서 잿더미가 되어 죽겠지만… 올레아나 님도 왕년에는 일세를 풍미했던 그래듀에이트 아닙니까. 저처럼 살아남아서 힘을 얻을 수 있겠죠.”

“히, 힘이라고요?”

“네, 저는 힘을 얻었습니다. 충성의 대가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유스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댔다.

“이제 저는 바스티안 공작 따위가 아니라… 철혈검제 폐하와 6공작을 위해 싸우는 한 명의 검귀(劍鬼)에 불과합니다.”

“유, 유스트 님!”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올레아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뭡니까! 철혈검제? 6공작? 어째서 그분들이 다시 이 땅에…….”

“그야 당연히 이 땅을 통치하기 위해 돌아오신 것이지요.”

“토, 통치라고요?”

“네, 제국의 지배권은 철혈검제 폐하에게 있으니까요.”

유스트가 두 팔을 벌리면서 말했다.

“이 불완전한 제국을 재편하여… 철혈검제 폐하가 진정으로 원했던 ‘검의 세계’를 만드는 겁니다.”

“그, 그러면 지금의 황제 폐하와 황녀 전하는……?”

“하하,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국의 원래 주인인 철혈검제 폐하가 돌아오시는데, 당연히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죠.”

“……!”

지금의 황제와 황녀를 끌어내리고, 철혈검제가 다시 황제 자리에 오른다는 건가.

“마, 말도 안 됩니다, 유스트 님.”

“무슨 소리죠?”

“그건 섭리에 어긋난 일입니다. 아무리 철혈검제 폐하가 이 제국을 세운 분이라고 해도, 그런 건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것 참…….”

올레아나의 말을 듣고, 유스트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무서운 눈빛으로 올레아나를 노려봤다.

“그런 불경한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

그 순간, 올레아나는 깨달았다.

유스트의 눈동자가 어느새 파충류처럼 세로로 길어진 상태라는 것을.

그 소름 끼치는 눈동자에 살의가 깃들었다.

“이거 아무래도, 제 선에서 처단해야 할 것 같…….”

푸욱!

검을 치켜들려 했던 유스트의 복부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어디선가 날아온 검이 유스트를 배후에서 관통한 것이다.

“아……!”

그리고 올레아나는 눈치챘다.

서쪽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집단이 있다는 것을.

“리히테나워 기사단……!”

흑천마교를 무너뜨린 에르나스의 기사단이 마침내 동부에 나타났다.

지금 이 순간, 유일한 희망은 그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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