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아카데미 사변 (5)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는 철혈검제의 뜻을 받들어 제국의 적을 쓰러뜨릴 검사를 만드는 장소다.
알드바우트 총장은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다.
철혈검제가 아카데미 설립을 명하지 않았다면, 검술은 특정 집단 내부에서 도제식으로만 전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카데미가 세워지면서 전국의 검술이 한곳에 모이게 되었고, 다양한 검술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엘릭시르를 투여하여 그래듀에이트로 성장시키도록 한 것도 철혈검제의 방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카데미 학생들이 한 사람 몫을 하는 그래듀에이트로 성장한 건 전적으로 철혈검제의 은혜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철혈검제의 뜻을 받드는 것이 정상이다.
철혈검제가 원한 대로 제국의 적을 쓰러뜨리는 한 자루의 검이 되면 족하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철혈검제의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인간인 것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철혈검제 폐하의 뜻을 이해 못 하는 역적……!”
알드바우트는 에르나스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웠다.
그동안 알드바우트는 에르나스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어 제국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르나스는 자신의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고 철혈기사단조차 무력화시키면서 지나치게 패도적인 행보를 보였다.
심지어 흑천마교의 총대주교를 쓰러뜨리며 이 세계의 절대 강자로 등극했다.
그런 존재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네가 제대로 된 충성심을 보여 줬더라면, 나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르나스는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빠르게 아카데미로 날아와, 알드바우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드바우트가 페르디난드와 욜스를 설득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꿰뚫어 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타난 에르나스는 알드바우트의 추궁 앞에서도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 제국과 철혈검제에게 충성을 바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 놈을… 살려 둘 수는 없다.
“너를 죽이겠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알드바우트는 다시금 검을 치켜들었다.
방금 알드바우트는 에르나스의 공격에 피를 뿜었다.
하지만 지금 부상은 전부 치유된 상태였다.
란즈슈타인 가문의 알레이시가 전수해 준, 검귀화(劍鬼化)의 각인을 사용했으니까.
“오오오……!”
쿠쿵!
전신에서 마력이 용솟음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알드바우트는 엘더 드래곤처럼 전신에서 맹렬한 마력을 발생시키고 있다.
원래 그래듀에이트는 마나 하트에 저장해 놓은 마력만 사용하지만, 지금 알드바우트는 전신의 골격에서 마력을 추가로 생산하고 있었다.
지금 알드바우트의 뼈는 용골(龍骨)처럼 막대한 마력을 발생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이것이 바로 철혈검제 폐하를 위해 싸우는 검사… 검귀(劍鬼)의 힘이다!”
쿠쿠쿠쿵!
검을 휘두른 순간,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그냥 허공에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총장실이 무너져 내렸다.
붕괴한 천장을 통해 에르나스가 도망쳤기에, 알드바우트도 몸을 날려 추격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설마 네놈이 정신세계의 속도를 손에 넣었을 줄은 몰랐다!”
알드바우트는 에르나스를 추격하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납득은 되는군! 그 속도를 손에 넣어 총대주교를 쓰러뜨린 건가!’
물질세계의 유한(有限)을 극복하기 위해, 정신세계의 무한(無限)을 구현하는 경지.
방금 전에 에르나스가 펼친 공격은 분명 그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렇기에 알드바우트는 에르나스의 공격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눈을 깜박이는 것보다 더 빠르게 공격이 들어왔고, 알드바우트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 힘을 사용해 제국의 정점에 등극해 황제 자리까지 찬탈할 생각이겠지. 그러나……!”
알드바우트는 공중에서 솟구치며 소리쳤다.
“정신세계에 돌입할 수 있는 것이… 너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천 년 전, 철혈검제는 마인과 엘더 드래곤이라는 두 종족을 멸망시켰다.
마인은 육체의 극한을 추구한 종족이었지만… 엘더 드래곤은 정신의 극한을 추구했다.
엘더 드래곤들은 오랫동안 물질세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정신세계의 속도를 물질세계에 구현하는 것에 성공했다.
철혈검제의 수하들이 그들의 노하우를 활용해 개발한 것이… 바로 검귀다.
“죽어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 순간.
알드바우트를 둘러싼 공간이 멈췄다.
도망치던 에르나스도, 무너지는 건물도, 멀리서 지켜보던 페르디난드와 욜스도,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물론, 실제로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니다.
알드바우트의 의식이 물질세계의 속도가 아니라 정신세계의 속도에 맞춰졌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지금 알드바우트는 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다.
“하아아압!”
슈우우욱!
하얀 검기가 전개된 리히테나워 천랑검술이 펼쳐졌다.
리히테나워 천랑검술은 동서남북 모든 검술을 연구하여 완성한 아카데미 최강 검술이다.
이 하얀 검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러운 연기 같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의 검기와 호신기를 무력화하고 치명상을 입히는 힘을 갖고 있다.
알드바우트는 정신세계의 속도로 하얀 검기를 날려 에르나스를 죽일 생각이었다.
“소용없어.”
“……?!”
쿠쿠쿵!
공간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파가 주위로 퍼져 나갔다.
그 충격에 집중이 깨진 알드바우트는 다시 물질세계로 돌아왔다.
다시금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공간 속에서, 에르나스가 멀쩡한 상태로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 공격을… 완벽히 막아 냈다고?”
“알드바우트, 당신은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어.”
“착각이라니?”
“검귀라는 것이 무슨 대단한 것인 줄 아나 본데, 결코 그렇지 않아.”
에르나스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귀는 철혈검제의 수하들이 그냥 소모품으로 개발한 존재야.”
“소모품……?”
“그래, 철혈검제와 6공작만으로는 머릿수가 부족하니까 말이야. 밑에서 말단 병사 역할을 할 놈들도 필요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에르나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정신세계의 속도를 구현할 수 있는 병사를 원했어. 하지만 일반 그래듀에이트한테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래서 정신력에 특화된 엘더 드래곤의 사체를 활용해, 억지로 정신세계에 돌입시키는 기술을 만든 거야.”
“…….”
“그 부작용으로 검귀는 조금씩 이성을 잃게 돼. 지금도 당신은… 예전보다 판단력이 떨어진 상태일 거야.”
그 말을 듣고, 알드바우트는 숨을 삼켰다.
자신이 평소보다 흥분한 상태인 건 사실이었다.
“알드바우트, 당신은 원래 이 정도로 감정적인 성격의 캐릭터가 아니었어. 검귀화의 부작용인 거지.”
“…….”
“한번 스스로를 돌이켜 봐. 자신이 정말로… 검사로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중인지.”
검사로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중일까.
그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곧바로 알드바우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닥쳐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알드바우트…….”
“나는 제국의 검! 철혈검제 폐하의 검! 너 같은 역적의 말에는 현혹되지 않는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저런 배은망덕한 역적의 말에 흔들릴 필요는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알드바우트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죽어라, 에르나스……!”
에르나스를 죽이기 위해, 알드바우트는 리히테나워 천랑검술의 최종 기술을 펼쳤다.
* * *
‘조금 동정심이 느껴지는군.’
알드바우트를 보면서 나는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지금 알드바우트는 자신이 철혈검제에게 선택받는 검사라는 자부심에 휩싸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엘더 드래곤의 요소가 적용되어 비늘이 돋아난 저 모습을 보면, 철혈검제와 측근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경멸할 것이다.
‘검귀는 어디까지나 급조된 소모품이야. 철혈검제의 방식도 아니고.’
육체를 변화시키는 건 원래 흑천마교의 방식이다.
철혈검제 쪽의 방식은 육체를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육체를 전혀 개조하지 않고, 오로지 정신적으로 높은 경지에 올라 초월적 존재가 되는 것을 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혈검제 쪽에서 검귀를 개발한 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쓸 만한 병사를 만들려면 흑천마교처럼 육체를 개조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잠깐 쓰고 버릴 소모품이니… 아무런 미학(美學)도 없는 괴물이어도 괜찮지.’
알드바우트는 철혈검제를 위해 싸운다는 긍지를 갖고 있지만… 철혈검제 측은 그런 긍지는 조금도 존중해 주지 않는다.
씁쓸한 얘기였다.
‘그러니… 여기서 쓰러뜨린다.’
지금 알드바우트는 리히테나워 천랑검술의 최종기 ‘시리우스 팽’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시리우스 팽은 막대한 마력을 검기로 날리는 기술인데, 처음에는 하나의 공격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0개의 검기가 중첩되어 있다.
공격을 막아 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10개의 검기가 복잡한 궤도로 전개되면서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기술이다.
‘똑같이 정신세계의 속도를 구현할 수 있는 존재라면, 어느 쪽이 더 높은 수준이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지.’
정신세계에서도 속도의 우열은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검제급 초입이다.
지금 이 실력으로는… 철혈검제나 6공작에게 승리할 수 없다.
‘다만… 검귀가 되어 억지로 정신세계에 들어선 알드바우트도 나하고 비슷한 수준이야.’
알드바우트를 꺾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더 높은 경지에 올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철혈검제나 6공작에게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흑천검으로 알드바우트를 죽인다.’
지금 내 손에는 흑천마교 총본산에서 가져온 흑천검이 있다.
이건 단순한 마검이 아니라 유스레흐트나 니플가디르와 같은 아티팩트다.
나는 흑천검을 쥔 채 정신을 집중했다.
‘흑천검의 원래 기능은… 공간 감지.’
소설에서 흑천검은 ‘공간 감지’라는 기능을 가진 아티팩트였다.
공간 지각력을 극대화하는 효과로, 유효 범위 안에서 적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저절로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소설 속에서는 마치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적들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다고 묘사되었다.
하지만 나는 소설의 작가이기 때문에 아티팩트의 세부 설정까지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유스레흐트와 니플가디르 때와 마찬가지로 잠재 능력을 개방할 수 있었다.
[유효 범위 안에서 ‘공간 이해’를 시도합니다.]
[유효 범위 안에 ‘공간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가 없습니다.]
[유효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움직임을 이해합니다.]
그 순간.
이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공간 감지’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는 느낌으로 묘사되었지만, ‘공간 이해’는 실시간 3차원 데이터가 내 머릿속에 입력되는 느낌이다.
“……!”
정신세계의 속도로 알드바우트가 나에게 시리우스 팽을 시전했다.
하나로 보이는 검기를 받아치려 한 순간, 검기가 10개로 분열하면서 복잡한 궤도로 나를 덮쳤다.
눈으로 봐서는 결코 대응할 수 없는, 교묘하기 그지없는 복합 검기.
하지만 나는 ‘공간 이해’를 통해 그 궤도를 모조리 이해할 수 있었다.
‘받아친다……!’
그동안 나는 초고속의 연속 공격을 위해 자뢰검기와 자뢰검강을 사용했다.
그것은 소설에도 등장하지 않은, 나 혼자서 만들어 낸 나만의 기술이다.
이제 그것을 더욱 발전시킬 때가 되었다.
‘자뢰검형(紫雷劍形)!’
자뢰검기는 속도는 빨랐지만 위력은 부족했다.
자뢰검강은 위력은 강했지만 정교함이 부족했다.
자뢰검형은 흑천검의 공간 지각력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계산된 연속 공격을 펼치는 기술이다.
시리우스 팽처럼 복잡하고 교묘한 궤도의 공격도… 모조리 받아칠 수 있다.
“……!”
파아아앗!
철저하게 계산된 움직임이 열 갈래의 검기를 모조리 파훼했다.
알드바우트가 경악하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시리우스 팽을 완전히 파훼하면서 뻗어 나간 자색 검기가 알드바우트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으니까.
“아…….”
설정상 검귀의 약점은 가슴의 흉골(胸骨)이다.
엘더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흉골에 마력이 집중되니까.
검귀에게 흉골이 파괴되는 건 심장과 마나 하트가 동시에 파괴되는 것과 같다.
“에르나스…….”
원통한 목소리를 내면서, 알드바우트가 호수 위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