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아카데미 사변 (4)
천 년 전부터 부활을 준비해 왔던 철혈검제야말로 우리들이 타도해야 할 적이다.
그 말을 꺼낸 이후, 나는 교수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내가 그들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특히… 알드바우트 총장.’
소설에서 알드바우트는 주인공 아칸델을 제거하려 했다.
이건 알드바우트 본인이 아칸델을 위험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에르나스의 모략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알드바우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알드바우트는 내가 황제 자리를 찬탈할 수 있는 인물이라 경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토사구팽 하려고 한다.
하지만 나보다 더 거대한 적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면, 일단 나를 제거하는 걸 보류할 수도 있다.
사냥감이 남아 있는데 사냥개를 처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알드바우트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만약 알드바우트가 검을 뽑아 든다면, 교섭은 결렬이다.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여기서 알드바우트를 처단하는 것이 맞다.
앞으로 알드바우트가 아카데미 총장의 권한을 사용하면서 다른 교수들까지 동요시키면 곤란하니, 여기서 쓰러뜨려 둬야 한다.
‘그럴 경우 페르디난드와 욜스는…….’
페르디난드와 욜스의 반응을 살피려고 했을 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알드바우트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어떻게 자네가 그걸 알고 있지, 에르나스?”
“네?”
“철혈검제 폐하의 부활…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고 있지?”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알드바우트의 발언은 전혀 예상 못 했던 것이었다.
‘알드바우트가 철혈검제의 부활을 알고 있었다고?’
소설에서 알드바우트는 아무것도 몰랐다.
황제 자리를 찬탈할까 봐 주인공 아칸델을 제거하려 했을 뿐이다.
철혈검제와 관련된 진실은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있는 알드바우트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이건 소설 설정과 맞지 않는다.
“이상하군. 자네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했었는데…….”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알드바우트의 혼잣말을 놓치지 않았다.
“제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누가 말했다는 겁니까?”
“그야…….”
대답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건 란즈슈타인 가문의 사람 정도일 테니까.
“혹시 란즈슈타인 가문의 그래듀에이트인 알레이시 란즈슈타인입니까?”
“……!”
알레이시 란즈슈타인.
그녀는 페르펙티오의 심복 중 한 명이다.
에르나스의 친척으로, 은밀하고 신속한 움직임을 특기로 하는 실력자다.
소설 내용을 생각했을 때 알드바우트와 접촉할 만한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
“총장님.”
그때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욜스가 입을 열었다.
“에르나스의 말이 사실입니까?”
“욜스 교수……?”
“철혈검제 폐하가 부활하셔서 이 세상을 피로 물들이실 거라는 얘기가, 사실입니까?”
욜스뿐만이 아니었다.
페르디난드도 외눈 안경의 위치를 손으로 고치면서 알드바우트에게 따지고 들었다.
“총장님, 방금 반응을 보니… 총장님은 이 얘기를 알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페르디난드 교수, 이건…….”
“철혈검제가 되살아나서 이 세상을 온통 피로 물들인다? 진정한 ‘검의 세계’를 만든다? 이게 허황된 얘기가 아니라 사실이란 말입니까?”
페르디난드의 목소리에는 상당한 흥분이 담겨 있었다.
“특히 천 년 전부터 부활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얘기…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동안 제가 연구했던 것에서 의문이었던 부분이 모두 해답을…….”
“다들 진정하게.”
알드바우트가 페르디난드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지금 시점에서 자네들이 알 필요가 없는 얘기야. 괜한 관심 갖지 말게.”
“총장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욜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총장님, 명확히 설명해 주십시오.”
“욜스 교수, 지금은 그럴 상황이…….”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지금은 에르나스와 다툴 때가 아닙니다.”
“뭐라고?”
알드바우트가 인상을 찡그렸다.
“에르나스와 다툴 때가 아니라니?”
“철혈검제 폐하가 그런 음모를 꾸미고 계셨던 게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대처해야 합니다.”
“음모라니……!”
알드바우트의 눈빛이 무서워졌다.
“불경스럽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게다가 힘을 합쳐 대처하다니, 철혈검제 폐하께 대적하겠다는 얘기인가?!”
“총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욜스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철혈검제 폐하가 이 세상을 온통 피로 물들일 생각으로 부활한다는 얘기가 사실이라면, 막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감히 그런 소리를……!”
알드바우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욜스 교수! 자네는 이 제국의 신하가 아닌가? 철혈검제 폐하께서 설립하신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의 교수이면서, 어떻게 그런 불충스러운 소리를……!”
“총장님! 그렇다고 해서……!”
“욜스 교수, 그만둬.”
그때 페르디난드가 다시 끼어들었다.
“총장님은 이미 입장을 정하신 것 같군.”
“페르디난드 교수님…….”
“그리고 말이야, 욜스 교수.”
페르디난드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눈치챘나? 아까부터 우리가 계속 확인하고 있는데도… 총장님은 에르나스의 말이 틀렸다는 소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날조나 음해가 아니라는 거지.”
“……!”
그렇다.
여기서 알드바우트가 조금이라도 변명을 했다면, 페르디난드도 욜스도 고민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드바우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철혈검제의 ‘숭고한 계획’을 부인하다니, 그런 불충스러운 짓은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총장님, 이 제국에 충성을 바치라고 하면 바치겠습니다. 하지만 천 년 전에 죽은 인물인 철혈검제에게 충성을 바칠 생각은 없습니다.”
“페르디난드 교수, 무슨……!”
“심지어 이 세상을 피로 물들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니… 어떻게 그런 존재에게 충성을 바칩니까?”
그렇게 말하는 페르디난드 옆에서 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총장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욜스 교수……!”
“저는 철혈검제 폐하를 존경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철혈검제 폐하가 그런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설 설정상 이 제국의 사람들은 철혈검제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알드바우트처럼 철혈검제에게 충성을 바치려 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페르디난드도 욜스도 명확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
철혈검제의 본질을 알게 된 이상, 알드바우트처럼 맹목적인 충성을 바칠 수는 없다고 반발한 것이다.
‘다행이야. 이렇게 되면 두 사람과 싸울 일은 없겠군.’
솔직히 나는 이 두 사람하고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스승들이니까.
그래서 알드바우트 옆에 이 두 사람이 있는 걸 보고 심란했었는데… 현명한 판단을 해 줘서 다행이다.
“에르나스, 네가 한 말… 틀림없는 거겠지?”
“네, 욜스 교수님.”
“그렇군.”
욜스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오늘 네 태도에 수상한 부분이 있으면 총장님과 함께 너를 칠 생각이었다.”
“그러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라는 남자를 신뢰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네 행보가 지나칠 정도로 패도적이었던 건 사실이다.”
“…….”
“네 진짜 목적이 이 제국의 정점에 오르는 것이라면…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욜스도 상당히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내 얼굴을 직접 보고 결론을 내리려 했던 모양이다.
알드바우트와 손을 잡고 나를 칠지, 아니면 알드바우트에게서 나를 보호할지.
다행스럽게도… 욜스는 후자를 선택해 줬다.
“욜스 교수……!”
알드바우트가 눈을 치켜뜨고 욜스를 노려봤다.
“함께 에르나스를 치기로 한 것 아니었나! 그래서 흑색 엘릭시르를 준 것이었는데……!”
“저는 확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에르나스를 직접 만나 보고 결심하겠다고 말씀드렸을 뿐이죠.”
“그런 말장난을……!”
욜스에 이어 페르디난드도 입을 열었다.
“총장님, 저는 처음부터 계속 에르나스하고 대화로 해결해 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페르디난드 교수!”
“그런데 이렇게 된 이상… 총장님과의 문제를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지부터 고민해야겠군요.”
그렇게 말한 뒤, 페르디난드는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에르나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야…….”
나는 알드바우트에게 시선을 향했다.
“총장님 태도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에르나스, 자네…….”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총장님.”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알드바우트를 향해, 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제부터 리히테나워 기사단을 이끌고 동부 영묘에서 부활하려는 철혈검제와 그 신하들을 막으러 움직일 겁니다. 그걸 막으려 하신다면, 총장님도 저희들의 적입니다.”
“에르나스……!”
알드바우트의 목소리에는 격렬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역시 예상대로 이 사람하고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정말로… 어쩔 수 없군.’
알드바우트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이 있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여기서 처단하는 수밖에 없다.
“반역자의 본색을 드러내는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알드바우트가 검을 뽑았다.
칼날이 은색으로 빛나는, 진은(眞銀) 함량이 높은 명검이었다.
“에르나스, 조심해라!”
욜스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알드바우트의 전신에서 하얀 기운이 솟구쳤다.
이 시대에서는 오로지 알드바우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아카데미 최강 검술… 리히테나워 백랑검술(白狼劍術)이 전개된 것이다.
“총장님이 익힌 리히테나워 백랑검술은 최고의 파워와 최고의 스피드를 동시에 구현하는 궁극의 검술이다! 우리 모두 함께 협공을……!”
“아니요, 교수님.”
목소리를 높이는 페르디난드에게 대꾸하면서, 나는 검을 거둬들였다.
나는 이미 알드바우트 상대로 공격을 펼친 상태였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
촤악!
알드바우트가 전개한 하얀색 기운이 갈라지고, 피가 뿜어져 나왔다.
검제급의 힘으로 심검을 펼쳐 정신세계의 속도로 공격을 가한 것이다.
알드바우트는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크윽……!”
“……!”
욜스와 페르디난드가 숨을 삼켰다.
그들도 내 공격을 감지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오오오오……!”
하지만, 바로 그때.
알드바우트에게서 예상치 못한 반응이 일어났다.
전신에서 마력을 뿜어 대며 육체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알레이시 란즈슈타인을 만난 거라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드바우트가 이미 알레이시를 만났다면, 저런 모습이 되어도 이상할 건 없다.
“에, 에르나스, 총장님이 왜 저러는 거지?!”
“교수님들, 잘 보십시오.”
흑천마교에서 사람을 괴물로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
천 년 전 철혈검제에 의해 멸망한 존재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기술이니까.
하지만 흑천마교의 기술보다 이쪽이 훨씬 더 완성도가 높다.
흑천마교는 마인에 관련된 기록들을 뒤지면서 기술을 확립했지만… 놈들은 엘더 드래곤의 사체를 직접 활용해서 기술을 완성시켰으니까.
“철혈검제의 수하들이 흑천마교보다 나을 게 없는… 지독한 악인(惡人)들이라는 증거입니다.”
“……!”
근육이 증대한 알드바우트의 전신에 파충류 같은 비늘이 돋아났다.
안구도 변화하면서 세로로 길쭉한 동공이 되었다.
철혈검제의 수하들이 개발한 인체 개조술… 검귀화(劍鬼化)의 결과였다.
“일단 물러서십시오, 교수님들.”
“에르나스, 어떻게…….”
“지금 알드바우트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습니다.”
욜스도, 페르디난드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검제급에 도달한 내가 쓰러뜨려야 한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칼자루를 꽉 쥐었다.
흑천마교 총본산에서 가져온 흑천검… 그 진정한 힘을 발휘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