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아카데미 사변 (3)
아카데미 정문으로 다가가자, 경비 담당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쓸 만한 사람은 전부 다 전장으로 끌고 갔기 때문인지, 좀 어수룩한 인상이었다.
“잠시 괜찮겠습니까?”
“으, 음……?”
경비 담당이 눈을 뜨고 내 얼굴을 쳐다봤다.
“뭐야? 왜 이 시간에 돌아와?”
그는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쏘아붙였다.
“보아하니 무단 외출 했다가 지금 돌아온 모양인데… 요즘 너희들 왜 이리 엉망이야? 아무리 교수님들이 바깥에 많이 나가 있다고 해도, 이따위로 구는 게 허용될 것 같아?”
잠이 덜 깨서 그런지, 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 동기들은 지금 흑천마교와 싸우고 있는데 말이야. 빨리 실력을 길러서 그래듀에이트로서 전장에 나갈 생각을 해야지, 이딴 식으로… 쯧쯧.”
“…….”
“너, 이름이 뭐야?”
혀를 차면서 수첩을 꺼내는 경비 담당 앞에서, 나는 담담히 말했다.
“페르디난드 클래스 전공생인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입니다.”
“페르디난드 클래스, 전공생, 에르나스…….”
경비 담당이 수첩에 내 인적 사항을 적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에르나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입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네, 맞습니다.”
“허억……!”
그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쳤다.
수첩도 바닥에 떨어뜨렸다.
“에, 에르나스? 어떻게 에르나스가 여기에…….”
“급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무, 물론, 물론이지. 물론이지요!”
떨어뜨린 수첩을 줍지도 못한 채,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드, 들어가십시오! 어서!”
“감사합니다.”
문을 열어 주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나는 아카데미 정문을 지났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카데미는 그냥 조용하기만 했다.
호수에서 물결이 찰랑이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급히…….”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정문이나 잘 지켜 주시죠.”
“아, 알겠습니다!”
나는 바로 경신술을 사용했다.
호수 위로 도약하면서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하자, 아카데미 전역을 인식할 수 있었다.
‘본관 쪽에 커다란 기운이 몰려 있어.’
가장 큰 섬 위에 세워져 있는 본관.
그곳에 크고 강렬한 마력이 세 개 있다.
알드바우트, 페르디난드, 욜스일 것이다.
‘한곳에 모여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한밤중이다.
아무 이유 없이 모여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본관 쪽으로 향했다.
“헉?!”
본관 정문을 지키고 있던 교관이 다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내 얼굴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에, 에르나스?”
“오랜만입니다, 안네리제 교관님.”
안네리제 그레인저.
흑색 6반 시절의 담당 교관이다.
재능의 한계로 그래듀에이트 하급에 머무르고 있으나… 검술 실력은 제법 괜찮은 편이고, 교관으로서 상당히 우수한 인물이다.
“지금은 본관 근무이신 모양이군요.”
“네, 본관으로 배속되어서… 그, 근데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죠? 지금은 흑천마교 토벌을 하러 남부로 가신 거 아니었나요?”
“토벌은 다 끝났습니다.”
“네?!”
아직 말단 교관들한테는 소식이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총장님한테 긴히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남부에서 저 혼자만 달려왔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죄송합니다. 기밀 사항이라.”
“그, 그렇군요.”
안네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았으면 여기서 대기하게 하겠지만… 급한 일인 것 같으니 제가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 따라 오세요.”
“감사합니다, 교관님.”
그렇게 나는 안네리제의 안내를 받으면서 본관으로 들어갔다.
본관에는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한밤중에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네요. 그동안 쉴 새 없이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싸우셨던 것 같은데.”
어두운 복도를 걸으면서 안네리제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있나요? 흑색 6반 출신 중에서는 세리느, 클로에, 슈미츠, 비올라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걸로 아는데.”
“네, 다들 많은 공적을 세웠습니다.”
“그렇군요. 정말로 다들 훌륭한 그래듀에이트가 되었네요. 한때 교관을 맡았던 입장에서 정말 자랑스러워요.”
안네리제는 우리들의 활약을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흑천마교와의 싸움이 끝났으니… 다들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거죠? 앞으로도 계속 교과 과정을 밟아야 하니.”
“네… 그렇죠.”
나는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에르나스는 졸업 시험인 4차 시험에 바로 도전할 수 있겠네요.”
“아직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3차 시험에 통과하면 특정 클래스 소속의 전공생이 된다.
전공생은 자격을 갖추면 4차 시험에 응시할 수 있고, 4차 시험까지 통과하면 아카데미를 졸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졸업 시점은 학생들마다 다르다.
“에르나스 정도면 특례로 허용해 줘야죠.”
“글쎄요…….”
“솔직히 아카데미에서 배울 것도 더 이상 없지 않나요?”
“페르디난드 교수님과 함께 공부할 게 많이 남았습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다가 총장실 앞까지 왔다.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하지 않아도, 안쪽에 거대한 마력을 지닌 그래듀에이트들이 기다리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총장님,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방문했습니다. 급한 일이라고 합니다.”
안네리제가 노크를 하면서 말하자, 바로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해라.”
“에르나스, 들어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교관님.”
안네리제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뒤, 혼자서 총장실로 들어갔다.
총장실 내부는 어두웠고… 알드바우트는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페르디난드와 욜스가 서 있었다.
‘욜스까지…….’
욜스는 칼레온과의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전신 화상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라고 해도 장기간의 요양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보기에 욜스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이건… 흑색 엘릭시르를 먹인 건가.’
엘릭시르 중 최고 등급인 흑색 엘릭시르에는 치유력을 극대화하는 효과도 있다.
평범한 사람이 먹으면 그냥 상처가 빨리 낫는 정도지만, 절정급에 도달한 그래듀에이트가 흑색 엘릭시르를 먹고 그 기운을 상처에 집중시키면 실시간으로 새살이 돋아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흑색 엘릭시르의 주요 원료 중 하나인 육아초(肉芽草)의 작용이다.
‘황궁에서 지금 욜스에게 흑색 엘릭시르를 지급할 이유가 없으니, 알드바우트의 판단이겠지.’
소설이었다면 욜스는 한참 전에 사망했을 인물이다.
내가 제때 개입하지 않았다면 미하일과의 전투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 욜스가 알드바우트의 편에 서서 나에게 검을 치켜들게 될까?
“한밤중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나는 세 명의 교수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페르디난드와 욜스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고, 알드바우트 혼자서만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에르나스.”
알드바우트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흑천마교 총대주교를 쓰러뜨렸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네. 아주 훌륭하군.”
“벌써 들으셨군요.”
“황궁에서도 매우 기뻐할 거야. 자네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임명하려 하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알드바우트는 딱히 칭찬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황궁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온 건가? 리히테나워 기사단장으로서 황궁에 보고를 올리는 것을 우선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급한 일이 뭐지?”
알드바우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봤다.
“에르나스, 혹시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무슨 뜻이죠?”
“지금까지 자네는 다른 검술명가들을 무너뜨리고, 흑천마교까지 멸망시켰어. 심지어 철혈기사단조차 무력화시켰지.”
“…….”
“브랜틀리 아그리파조차 사망한 시점에서… 이제 제국에서 자네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여기 아카데미밖에 남지 않게 되었군.”
그 말을 듣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조금 잘못된 인식 같습니다.”
“어째서지?”
“저는 아카데미 소속입니다. 그러니 방금 하신 말씀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자네가 아카데미를 나가면 되는 문제지.”
“지금 당장 4차 시험을 치를 생각은 없습니다. 요건도 충족하지 못했고요.”
“그냥 스스로 나가면 된다는 얘기야.”
“…….”
“그러니까, 에르나스.”
알드바우트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가 이곳으로 달려온 건… 이제 마지막 걸림돌이 되는 아카데미를 치기 위한 것 아닌가?”
“아카데미가 무슨 걸림돌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제국의 절대 권력자가 되는 것… 그걸 방해하는 걸림돌이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황제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에르나스… 자네는 무서운 사람이야.”
알드바우트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동안 자네는 자신에게 방해가 될 만한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해 왔지. 처음에는 다른 검술명가의 후계자들이었고, 나중에는 검술명가의 가주들까지 직접 제거하기 시작했어. 최근에는 철혈기사단을 무력화시켰고, 마침내 흑천마교까지 없애 버렸지.”
“…….”
“그런 자네가… 황실에는 칼을 들이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나?”
알드바우트가 터무니없는 의심을 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 행적을 보면 충분히 그런 의심을 할 만하니까.
“그래서 나는 의심을 하고 있는 걸세. 자네가… 제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세력인 아카데미까지 무력화시키려고 찾아온 게 아닌가 하고.”
“총장님의 생각은 잘 알았습니다.”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제가 아니라고 변명해 봤자 들을 생각도 없으시겠죠.”
“그래, 잘 알고 있군.”
알드바우트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자네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해 봤자… 자네를 옹립할 사람이 많겠지. 리히테나워 대공이 아니라, 아예 황제로 추대하자고 말이야.”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예를 들어… 세리느의 아버지인 유스트 바스티안 후작은 이미 수면하에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억울해하지 말게, 에르나스.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런 사례가 적지 않았으니까.”
“토사구팽의 사례도 수없이 많죠.”
큰 공적을 세운 인물을 제거하는 건 역사상 흔히 있던 일이다.
힘과 명성을 지닌 신하는 언제든지 군주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으니까.
사냥이 끝나 사냥개가 필요 없어지면, 그냥 죽여 버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총장님.”
“뭐지?”
“저를 토사구팽하는 건 아직 너무 이릅니다. 조금 더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욜스와 페르디난드에게도 시선을 향했다.
“욜스 교수님, 페르디난드 교수님.”
“…….”
“교수님들에게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국의 미래를 위해 싸워야 하는 적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욜스와 페르디난드가 눈을 크게 떴다.
“총장님이 교수님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저한테 힘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에, 에르나스…….”
페르디난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아직도 적이 남아 있다고?”
“남아 있습니다.”
“흑천마교도 멸망했고, 검술명가들도 다 무력화되었어. 그런데 대체 어떤 세력과 싸운다는 거지?”
“그건…….”
“설마… 란즈슈타인 가문과 싸운다는 소리인가? 네 아버지하고?”
란즈슈타인 가문.
엄연히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지만, 지금까지의 싸움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가주인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이 동쪽 바다에 존재하는 영묘(靈廟)에서 철혈검제의 위령제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교수님.”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네 아버지와…….”
“제 아버지하고도 싸워야 합니다만, 진정한 적은 제 아버지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
그렇다.
이제부터 나는 에르나스의 아버지인 페르펙티오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진정한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쓰러뜨려야 하는 적은 페르펙티오가 아니다.
“이제부터 저는 이 세상을 온통 피로 물들일 존재와 싸울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수님들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을 온통 피로 물들이다니? 혹시 흑천마교의 잔당을 말하는 건가?”
“아닙니다. 흑천마교는 어디까지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세계를 만들려 했을 뿐이니까요.”
흑천마교는 어디까지나 사회체제를 무너뜨려 무정부 상태를 만들려 했을 뿐이다.
“그, 그러면 흑천마교보다 더 악독한 놈들이 있다는 건가?”
“네, 관점에 따라서는 그들이야말로 흑천마교보다 심한 악인(惡人)들이죠.”
“그런 놈들이 이 제국에 숨어 있었다고? 믿기지 않는군.”
페르디난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르나스.”
그때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욜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게 누구지?”
욜스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내 말의 진위를 꿰뚫어 보려는 눈빛이었다.
그런 욜스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땅을 진정한 ‘검의 세계’로 만들기 위해 천 년 전부터 부활을 준비해 왔던 시조 황제… 철혈검제야말로 우리들이 타도해야 할 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