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초월의 경지 (5)
“짐 같은 건 챙길 필요 없다!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해라!”
“어물쩍대지 마라! 필사적으로 도망쳐!”
“목숨을 최우선으로 하라!”
다급히 도망치는 리히테나워 기사단의 배후에서 연달아 폭음이 들렸다.
화산이 본격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커먼 가스가 하늘을 뒤덮었고, 막대한 양의 화산재도 뿜어져 나왔다.
터져 나온 마그마가 화산탄이 되어 사방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땅이 갈라져 용암이 분출했다.
계속 지진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화산탄에 맞거나 용암에 떨어져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리느 님! 이쪽 방면의 부상자는 전부 옮겼어요! 이제 우리도 빨리 후퇴해야 해요!”
“비올라, 조금만 더…….”
하지만, 꾸물거리면서 화산 지대에서 좀처럼 도망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에르나스를 기다리고 있는 세리느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세리느! 이 멍청아!”
그때 베리스리제가 세리느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여기서 네가 어물쩍거려 봤자 아무 의미 없어!”
“하지만……!”
“정 걱정되면 지금 당장 화산으로 달려가든가! 그래 봤자 에르나스를 더 곤란하게만 만들 테지만!”
베리스리제가 세리느를 잡아당기면서 소리쳤다.
“에르나스의 힘으로도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 그게 아니라면 에르나스 혼자서 알아서 하겠지! 그러니 우리는 그냥 여기서 빨리 이탈하는 게 최선이야!”
“베리스리제…….”
“나중에 에르나스가 돌아왔을 때 몸에 화상 입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냥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자고!”
세리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베리스리제의 말이 옳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르나스…….”
세리느의 그런 마음도 알아주지 않고, 화산이 다시 한번 용암을 뿜어 댔다.
* * *
“누가 도와주러 오지는 않겠지……?”
나는 바위에 몸을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방금 전까지 총대주교를 압도하며 어마어마한 힘을 보여 줬지만, 지금 나는 빌빌대면서 허덕이고 있는 중이었다.
검제급의 경지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총대주교를 쓰러뜨리고 긴장이 풀린 순간, 어마어마한 반동이 내 전신을 덮쳤다.
지금 나는 총본산 앞에 펼쳐져 있던 환술을 파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철혈검마심법과 흑천마인대법을 조화시키는 건 부담이 컸나…….”
소설에서 아칸델도 비슷한 깨달음을 얻어 검제급에 도달했다.
하지만 나처럼 철혈검마심법과 흑천마인대법을 조합했던 건 아니다.
나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철혈검마심법과 흑천마인대법을 조합해서 검제급에 진입한 건데… 예상 이상으로 부작용이 심했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전신의 마력을 순환시켰다.
마나 하트가 없으면 마력을 제어하기가 어려워진다.
대주교들이 결국 괴물처럼 변했던 건 이것 때문이다.
나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마력이 체내에서 폭주하면서 괴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
이윽고 머릿속이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무거웠다.
이론적으로는 정신세계의 힘을 적용해 물질세계의 육신을 순간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어야 하지만… 불가능했다.
‘강적을 쓰러뜨리겠다는 의지가 솟구치고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말이지.’
내가 총대주교 상대로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총대주교가 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강적을 반드시 쓰러뜨리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검제급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 정도로 의지를 불태운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현재 나는 초월적인 경지에 도달했지만, 24시간 초월적인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인간인 거지.’
앞으로도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밥을 먹고 잠을 자는 평범한 인간일 것이다.
흑천마교가 추구했던 흑천급처럼 육체를 변화시켰다면, 그런 인간다움조차 잃어버렸을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쉬고 있는 동안에도 화산 폭발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위치는 안전하지만, 언제 바닥이 꺼지고 용암이 분출할지 모른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여기를 떠나는 편이 좋지만…….
“…….”
나는 균열을 통해 총본산 내부로 다시 들어갔다.
솔직히 매우 위험한 행위였지만, 나한테는 다시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 이제 곧 있을 싸움을 준비해야 하니까.’
아까 총대주교가 죽기 전에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총대주교는 나한테 철혈검제의 세계를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흑천마교가 추구하던 투쟁의 세계가 무산된 이상, 미래에 기다리고 있는 건 철혈검제의 세계일 거라고 말이다.
‘철혈검제의 세계…….’
천 년 전, 철혈검제는 마인과 엘더 드래곤 등을 전멸시키고 대륙을 평정했다.
그리고 검술을 숭상하는 이 제국을 만들었다.
하지만 철혈검제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건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철혈검제는 육체의 한계에 도달했었지.’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지만… 철혈검제는 검제급에 도달한 검사였다.
진정으로 초월적인 존재였지만, 그런 초월자도 노화를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진정한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에… 철혈검제는 타협안으로써 지금과 같은 체제의 제국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철혈검제는 동쪽 바다의 영묘에 잠들었다.
언젠가 자신의 이상이 실현될 날을 꿈꾸면서.
‘문제는… 그날이 가까워졌다는 거야.’
총대주교가 경고했듯이, 머지않아 철혈검제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총대주교가 예상한 것보다 더 빨리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소설 내용을 생각했을 때, 조만간 결전이 시작된다.
‘소설대로라면… 그 싸움이 마지막 결전이 되겠지.’
그렇다.
마지막 결전은 철혈검제의 세계를 막기 위한 싸움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아칸델은 흑천마교와의 싸움을 마무리 지으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사태가 터지게 되고, 급기야 제국 전체가 요동치는 전쟁이 시작된다.
‘문제는… 내가 결전 파트를 끝까지 못 썼다는 거야.’
나는 소설을 쓰던 도중에 이 세계로 납치되었다.
그래서 결전 파트는 도입부까지밖에 못 썼다.
진정한 적들과의 싸움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했다.
그 전초전으로서 아카데미에서의 싸움을 다뤘을 뿐이다.
계속해서 암약하던 에르나스를 마침내 세리느가 해치우는 장면까지 쓴 뒤… 나는 이 세계로 끌려들어 왔다.
‘그러니까 나는 마지막 결전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어.’
그동안 나는 소설의 내용을 참고하여 승승장구해 왔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있으니, 선수를 치는 것도 대책을 세우는 것도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방식도 어려워진다.
머지않아 내가 전혀 모르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준비를 해 둬야 하는 거지.’
소설 설정을 생각했을 때, 마지막 결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주인공 아칸델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검제급에 도달한 내가 나서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검제급에 도달한 것만으로는 부족할 가능성이 높다.
최대한 준비를 해 놓지 않으면, 놈들에게 당하고 말 것이다.
‘그래… 놈들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힘을 지닌 세력이니까.’
흑천마교조차 그들과 비교하면 힘이 약하다.
흑천급에 도달한 총대주교까지 포함해도, 흑천마교 측이 불리하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세력과 싸워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놈들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는 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총본산 심층부로 들어갔다.
막혀 있는 통로를 강제로 뚫으면서 전진하자, 비로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인 것 같군.’
악취가 느껴지는 지하 호수.
이 일대의 영맥이 모이는 곳에, 알베리히 대주교는 소마로 가득한 호수를 만들었다.
총대주교는 이 호수 안에서 흑천급으로 각성했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마력을 방출했다.
호수에 가득한 소마를 한꺼번에 증발시켜 버리고… 호수 바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티팩트가 하나 있었다.
‘알베리히 대주교가 설치해 놓은… 흑천마교의 보물.’
어둠 속에서 빛나는 흑색의 칼날.
막대한 마력을 처리할 수 있는 저 검이야말로, 흑천마교를 상징하는 마검(魔劍)이다.
본래 총대주교가 허리에 차고 다니는 검이지만, 알베리히는 총대주교 각성을 위한 보조 장치로 활용했다.
‘총대주교가 저걸 들고 싸웠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몰라.’
총대주교는 마검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
흑천급에 도달한 자신에게 무기 따위는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천 년 전의 마인들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흑천급에게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검제급인 나한테는 다르지.’
나는 흑색의 검에 손을 뻗었다.
곧바로 보안 마법이 작동하여 검은색 스파크가 튀었다.
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고 손을 뻗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이것이 바로… 흑천검(黑天劍)이다.’
알베리히의 기계 장치에서 흑천검을 분리한 순간.
바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티팩트 ‘흑천검’에 대한 이해도가 90%입니다.]
[아티팩트 ‘흑천검’의 잠재 능력이 개방됩니다.]
[아티팩트 ‘흑천검’의…….]
나는 메시지를 다 읽지 못했다.
갑자기 주위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소마를 날려 버린 탓인가?’
내 마력이 영맥까지 도달하면서, 화산 활동을 더 촉진해 버린 모양이다.
아무래도… 여기서 용암이 터질 것 같았다.
‘생명의 위기로군.’
명백한 위기 상황이다.
여기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는 용암에 휩쓸려 죽게 될 것이다.
그걸 알고 있으니… 의지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
나는 흑천검을 든 채 정신을 집중했다.
물질세계가 아닌 정신세계에 진입하여, 나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그것을 물질세계에 반영하는 것으로… 의념(意念)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백화검형(白華劍形).”
흑색의 검에서 백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 * *
쿠쿠쿵!
화산이 거세게 폭발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지진이 발생했고, 엄청난 화산재가 뿜어져 나왔다.
“에르나스……!”
아예 무너져 내리며 사방으로 용암을 흘려 보내는 화산의 모습에 세리느는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에르나스가 대단한 존재라고 해도, 저런 폭발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
그 순간, 화산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목격했다.
화산이 무너지면서 이상한 것이 솟구쳤다.
새빨간 용암이 아니라… 새하얀 얼음이 솟구친 것이다.
“……?”
다들 아무 말도 못 했다.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산에서 용암이 아니라 얼음이 나오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
그때 클로에가 목소리를 높였다.
“세리느 님, 저기에……!”
“……!”
솟구친 얼음이 깨지면서, 무언가가 그 속에서 튀어나왔다.
경신술을 사용하여 화산에서 탈출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모든 이가 탄성을 질렀다.
“에르나스……!”
어이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탈출 방법이었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세리느는 눈물을 흘리면서 에르나스의 생환을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