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초월의 경지 (1)
리히테나워 기사단의 앞길을 막고 있던 알베리히 대주교의 분신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상황을 파악한 카밀로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브랜틀리 님과 하인리히 님이 알베리히 대주교의 본체를 쓰러뜨린 모양입니다!”
“그래,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발렌티아노 교수가 검을 거둬들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밀로가 방금 전에 도착해 브랜틀리가 알베리히 대주교에게 향했다는 것을 알려 줬지만, 분신들 때문에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브랜틀리 부단장이 들어갔다는 곳으로 어서 안내하게, 카밀로.”
“네……!”
카밀로가 앞장섰고, 발렌티아노를 비롯한 그래듀에이트들이 그 뒤를 따랐다.
“조용하군. 역시 전투는 다 끝난 건가?”
브랜틀리와 하인리히가 내려갔다는 계단을 내려다보며 발렌티아노가 중얼거렸다.
“안겔라 교수 쪽도 조만간 도착할 테니… 우리가 먼저 내려가 보지.”
발렌티아노는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피 냄새가 나는 공간에 도착했다.
“아니……!”
발렌티아노는 눈을 크게 떴다.
바닥에 처참한 시체가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옷차림을 보니… 브랜틀리가 분명했다.
“브랜틀리 부단장이 당한 건가?!”
“하, 하인리히 님……!”
이어서 카밀로도 비명을 질렀다.
구석에 쓰러져 있는 하인리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도 죽은 건가?!”
“아, 아닙니다! 하인리히 님은 살아 계십니다!”
발렌티아노는 다급히 하인리히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하인리히는 큰 부상이 없었다.
“에르나스처럼 마력을 과도하게 사용해서 정신을 잃은 것 같군.”
“아, 그러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테니, 후방으로 옮기게.”
“알겠습니다……!”
카밀로가 다급히 하인리히를 등에 업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브랜틀리 부단장은 사망하고, 하인리히는 저렇게 되어 있다니…….”
브랜틀리가 목숨을 잃은 뒤, 하인리히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알베리히를 쓰러뜨리고 기절한 걸까.
하인리히가 큰 부상 없이 살아 있고, 알베리히의 분신들이 침묵한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있자, 그러면 알베리히 대주교는 어디 있지?”
발렌티아노의 눈에 거대한 자연 동굴이 들어왔다.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역한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저쪽이 수상하군.”
발렌티아노는 앞장서서 동굴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바닥이 젖어 있다는 걸 깨닫고 발걸음을 멈췄다.
“설마, 알베리히 대주교의 피인가……?”
알베리히 대주교가 피를 흘리며 저쪽으로 향한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렌티아노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동굴을 향해 한 발 더 내디딘 순간…….
“검을 거두게, 발렌티아노 교수.”
진중한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
모든 사람이 다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다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산전수전을 겪은 그래듀에이트인데도 말이다.
방금 전까지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엄청난 존재감이 나타나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당신이…….”
절정급의 검사인 발렌티아노조차,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백발의 노인 앞에서.
“당신이… 흑천마교의 총대주교인가?”
“그렇지, 발렌티아노 교수.”
백발의 노인은 바위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방비한 자세처럼 보였지만, 발렌티아노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다들 검을 거둬 줬으면 좋겠군.”
“검을… 거둬 달라고?”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이야. 조금 앉아서 쉬고 싶거든.”
총대주교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처럼 칼을 뽑고 살기를 드러내고 있으면… 마음 편히 쉴 수가 없단 말이지.”
“…….”
다들 당혹스러워했다.
총대주교의 발언이 너무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총대주교, 당신은…….”
발렌티아노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방금 말하지 않았나?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앉아서 쉬고 있는 거라고.”
“앉아서 쉬고 있다니…….”
“잠에서 깨자마자 활발하게 움직이는 건 쉽지 않아. 자네도 나이가 꽤 많으니 알고 있을 텐데.”
“…….”
총대주교의 느긋한 목소리에 발렌티아노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총대주교는 마치 발렌티아노의 인생 선배라도 되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총대주교…….”
대체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 걸까.
발렌티아노는 고심 끝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알베리히 대주교는… 어디로 갔지?”
“알베리히?”
총대주교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알베리히… 아, 그 녀석 말이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총대주교가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아까, 내가 먹었지.”
“……!”
총대주교가 내던진 것.
그것은… 인간의 흉골이었다.
“잠에서 깨면 배가 고파서 말이야. 모조리 집어삼켰지.”
“초, 총대주교……!”
“오해하지 말게. 딱히 인육을 씹어 먹었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총대주교는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그 존재를 모조리 흡수했을 뿐이지. 워낙 너덜너덜해진 상태라… 별로 맛은 없었지만 말일세.”
“큭……!”
총대주교의 말투는 아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치 인생 선배가 후배를 상대로 잡담을 하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발렌티아노는 지금 이 순간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노인이야말로, 지금까지 만나 온 그 어떤 악인보다 악독한 존재라는 것을.
“총대주교……!”
“발렌티아노 교수,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총대주교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칼을 들고 살기를 드러내고 있으면… 편히 쉴 수 없다고 말일세.”
“……!”
그 순간.
총대주교가 뻗은 손이 발렌티아노의 검을 붙잡았다.
발렌티아노가 미처 반응할 수 없었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으윽……!”
발렌티아노는 즉각 검기를 전개했다.
아무리 흑천마교의 총대주교라고 해도,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가 펼치는 검기를 맨손으로 붙잡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
하지만, 소용없었다.
발렌티아노의 마력이 칼날을 전부 코팅하기도 전에… 칼날이 부러져 버렸다.
총대주교가 손가락의 힘만으로 검을 부러뜨린 것이다.
“어떻게 이런……!”
“발렌티아노 교수, 정말로 귀찮게 하는군. 아직 잠이 덜 깨서 쉬고 싶다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총대주교가 발렌티아노를 향해 몸을 내밀었다.
“하는 수 없지. 잠에서 제대로 깨기 위해… 가볍게 몸을 움직이도록 하지.”
“……!”
그 말을 들은 순간, 발렌티아노는 다시 한번 마력을 전개했다.
방금 말한 대로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라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여기서 전력을 다한 공격을 펼쳐, 총대주교를 베어야 한다.
“총대주교……!”
기합을 지르면서, 최고의 일격을 펼쳤다.
발렌티아노는 동부 검술의 최고 권위자.
수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해 온 궁극의 참격(斬擊)이, 완벽한 궤도로 총대주교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아니… 파고들어야 했다.
“……?!”
어느새 총대주교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 대신… 발렌티아노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크윽……!”
마력으로도 완벽히 지혈할 수 없는, 깊은 상처.
아무리 봐도… 치명상이었다.
‘어떻게……!’
하지만 발렌티아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상식을 초월하는 속도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어떻게, 이런 속도를……!’
지금까지 발렌티아노가 만나온 검사 중에서 가장 민첩했던 건 브랜틀리였다.
하지만 총대주교의 속도는 브랜틀리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랐다.
지금까지 발렌티아노는 총대주교의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총대주교는 어느새 발렌티아노의 칼날을 붙잡았고, 어느새 발렌티아노의 목을 잡아 뜯었다.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임에도 불구하고, 발렌티아노는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절정급을 넘어서면 이런 속도를 갖게 되는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속도였다.
아무리 마력을 잘 다룬다고 해도 이런 속도를 구현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대체 어떻게……!’
숨이 끊어지기 전에, 총대주교의 비밀을 알아내고 싶었다.
발렌티아노는 남아 있는 힘을 쥐어짜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마력은 칼날이 아니라 두 눈에 집중시켰다.
동체 시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총대주교의 움직임을 살펴보려 한 것이다.
“슬슬 몸이 풀리기 시작하는군.”
“……!”
촤악!
이번에는 가슴에서 피가 솟구쳤다.
발렌티아노는 눈을 부릅뜨고 총대주교의 움직임을 살폈지만, 역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알아낸 것이 있다면… 총대주교가 정말로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발렌티아노 교수님……!”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도착한 안겔라 교수의 목소리였다.
“도망쳐라, 안겔라 교수…….”
생명의 불꽃이 꺼지기 전, 발렌티아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목소리를 냈다.
“총대주교는,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발렌티아노는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 * *
“발렌티아노 교수님……!”
발렌티아노에게 달려가던 안겔라는 다급히 발걸음을 멈췄다.
발렌티아노가 숨을 거뒀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아직 살아 있는 상태라면 어떻게든 도와야 했겠지만, 이미 죽었다면 어쩔 수 없다.
“발렌티아노 교수님의 지시를 따른다! 전원 후퇴!”
“네……!”
거리가 멀긴 했지만, 안겔라도 총대주교가 공격을 하는 모습을 봤다.
발렌티아노에게 어떻게 치명상을 입혔는지… 안겔라의 눈으로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대체 얼마나 빠른 거지?’
안겔라는 아카데미 교수들 중에서 가장 빠른 스피드를 지녔다.
하지만 총대주교하고는 스피드 승부가 아예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총대주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라는 표현조차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빨랐다.
“안겔라 교수.”
“……!”
바로 그때, 총대주교가 안겔라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 차가운 눈동자에, 안겔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빠르다고 하더군.”
총대주교가 안겔라를 향해 느긋하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안겔라는 즉각 몸을 피하고 싶었지만, 아직 다른 기사단원들이 계단을 통해 도망치는 중이다.
그리고 어차피 도망쳐 봤자 총대주교한테는 따라잡힐 것이다.
“내가 몸이 아직 덜 풀렸는데… 잠시만 상대해 주겠나?”
“큭……!”
안겔라는 마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스스로 만든 베르틴스키 흑쇄검술을 펼쳐, 총대주교를 향해 흑색의 검기를 퍼부었다.
치명적인 흑색의 검기가 뻗어 나가 총대주교의 머리를 노렸다.
“흐음.”
총대주교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대신… 정체불명의 공격을 전개했다.
“……!”
그것은 거대한 마력의 폭풍이었다.
가끔 에르나스가 보여 줬던 광범위 파괴 공격과 비슷했지만, 그 위력은 한 단계 위였다.
막대한 마력이 주위를 모조리 집어삼켰고… 지하 공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다들 호신기를 전개해……!”
콰콰콰쾅!
마치 지각 변동이 일어난 것처럼 산이 무너져 내렸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중급 이상의 그래듀에이트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전원이 생매장당했을 것이다.
물론, 목숨을 건진 사람도 무사하지는 않았다.
다들 총대주교의 공격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자가 그리 많지 않았던 건… 안겔라가 모든 힘을 쥐어짜서 총대주교의 공격을 막았기 때문이다.
“훌륭하군, 안겔라 교수.”
“크윽…….”
안겔라는 피를 토했다.
베르틴스키 흑쇄검술의 검기를 방어막처럼 전개하여 총대주교의 공격을 최대한 막았지만,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네 검술은 카톨레아스 대주교의 흑천천수검술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
“뭐라고……?”
“어떤가, 흑천마교에 귀의할 생각은 없는가?”
“하하…….”
총대주교의 제안에, 안겔라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카데미에서 ‘마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안겔라지만, 마교 따위에 가담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헛소리 하지 마라, 사이비 교주…….”
“안타깝군.”
총대주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천천히 손을 치켜들었다.
“그렇다면, 이걸로 작별이다.”
“큭…….”
또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의 공격이 온다.
하지만 지금의 안겔라로서는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불가능했다.
안겔라는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안겔라를 향해 불가시(不可視)의 공격이…….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릅니다, 교수님.”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막대한 기운이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총대주교의 공격을 방어했다는 것을 깨닫고, 안겔라는 다급히 눈을 떴다.
“아…….”
그리고 안겔라는 깨달았다.
지금 안겔라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총대주교에게 맞서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아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그냥 유망주에 불과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 든든한 뒷모습을 보여 주는 최고의 검사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교수님.”
“에르나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가 최악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전장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