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검사의 혈투 (1)
총본산에서 가장 깊은 곳.
수많은 실험 기구가 가득한 곳에서 알베리히는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정한 정점에 도달하기 위한 경지가… 따로 있다고?”
방금 전, 알베리히는 분신을 사용해 에르나스와 만났다.
흑천급의 존재를 알려 주며 흑천마교에 들어오라고 제안했지만, 에르나스는 차가운 태도로 제안을 거부했다.
흑천급은 정답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내린 거라고?”
에르나스는 말하길, 흑천마교 내부의 지식만 알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내린 거라고 한다.
대체 에르나스는 뭘 알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란즈슈타인 가문에 무슨 특별한 지식이라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다시 에르나스에게 분신을 보내서 캐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알베리히는 입술을 깨문 채 수정구(水晶球)를 들여다봤다.
커다란 수정 구슬에는 총본산에 돌입하는 리히테나워 기사단의 모습이 표시되고 있었다.
폴카 대주교가 쓰러지면서, 놈들이 마침내 총본산으로 돌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폴카 대주교… 이 정도 시간밖에 벌지 못하다니.”
폴카 대주교의 능력으로는 흑천마인대법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그래서 알베리히가 제조한 약을 투여하여 억지로 마인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줬다.
하지만… 역시 어설펐던 모양이다.
“역시 흑천급에 도달하지 않으면 놈들을 막을 수 없어.”
알베리히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깊은 어둠 속을 응시했다.
“총대주교님…….”
저 어둠 너머에 총대주교가 잠들어 있다.
물론, 그냥 잠들어 있는 게 아니라 흑천급에 도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총대주교의 육체는 고밀도의 소마 용액에 잠겨 있다.
소마의 막대한 마력 속에서 총대주교는 흑천마인대법으로 자신의 육체를 변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제 거의 다 완료된 것 같은데… 총대주교는 아직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빨리 깨어나셔야 하는데…….”
놈들이 여기까지 도달하면, 총대주교를 강제로 깨워야 한다.
불완전한 상태로 각성하면 흑천급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런 상태에서 놈들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알베리히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해.”
알베리히는 주먹을 꽉 쥐었다.
총대주교가 흑천급의 경지에 도달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브랜틀리도, 발렌티아노도, 안겔라도 총대주교 앞에서는 무력하게 패배할 것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조차도 말이다.
“그래, 에르나스도… 패배하게 된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알베리히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 에르나스의 말에 동요한 자신이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
설령 에르나스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어차피 그놈들도 절정급에 불과해. 흑천급에 도달한 총대주교님에게 대항할 수 있을 리 없지.”
흑천급 말고 다른 경지가 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뭐가 어쨌단 말인가.
어차피 에르나스도 브랜틀리도 발렌티아노도 안겔라도 절정급에 불과한데.
그들이 절정급을 초월해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상태라면 모를까, 흑천급에 도달한 대주교 앞에서는 무력할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벌어야 한다.”
어쩌면 총본산 내부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가 총대주교의 각성을 촉진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알베리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재 총본산에 남아 있는 전력은 알베리히밖에 없다.
하지만, 알베리히는 혼자서도 놈들을 막아 낼 자신이 있었다.
“그래, 내 능력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알베리히는 총본산에 배치된 ‘분신들’을 일제히 움직였다.
* * *
“세리느 님,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정말로 한 명도 없는 건가요?”
“네, 아무리 뒤져 봐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습니다.”
슈미츠의 보고를 듣고, 세리느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세리느는 슈미츠 등과 함께 총본산 내부를 탐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생활의 흔적은 있는데, 아무도 없단 말이죠…….”
총본산 내부에는 꽤 많은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심지어 갓난아기를 돌보던 흔적까지 있었다.
그런데 다들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다.
“전투 사제들뿐만 아니라 비전투원들까지 없다니… 솔직히 섬뜩합니다.”
슈미츠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부에서 생활하던 비전투원들까지 모조리 끌어내서 괴인으로 만든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세리느는 말꼬리를 흐렸다.
총본산 내부에는 어린아이를 키우던 흔적도 있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변이약을 투여해 봤자 별 의미 없을 것이다.
그동안 괴인들과 싸우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괴인은 없었다.
“소마의 재료로 희생시킨 걸지도 모르겠네요.”
“마교의 영약 말입니까?”
“네, 소마는 인간을 재료로 사용하니까요.”
“역겨운 얘기군요.”
슈미츠가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러면 뭡니까? 궁지에 몰린 알베리히 대주교가 남아 있던 마교도들까지 모조리 긁어모아 영약의 재료로 썼다는 겁니까?”
“글쎄요. 이제 와서 영약을 더 만들어 봤자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긴 한데…….”
흑천마교의 대주교쯤 되면 이미 자신의 한계치까지 성장한 상태일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영약을 복용해 봤자 별 의미 없다.
“어쨌든, 이쪽 루트에는 별거 없는 것 같으니 되돌아가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총본산의 내부 구조는 매우 복잡했다.
빨리 알베리히 대주교와 총대주교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리히테나워 기사단은 전력을 분산하여 내부를 샅샅이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발렌티아노 교수님 쪽에서는 뭔가 수확이 있었을까요?”
“글쎄요. 그쪽도 우리와 비슷할…….”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 했을 대.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끼고 세리느는 발걸음을 멈췄다.
“세리느 님, 왜 그러시…….”
“슈미츠, 누군가가 있어요.”
“아……!”
슈미츠도 뒤늦게 눈치채고 검을 뽑았다.
시커먼 어둠 너머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하얀 피부를 지닌 장발의 남자였다.
“저 남자는…….”
“알베리히 대주교인 것 같습니다!”
알베리히 대주교.
지금 유일하게 남은 대주교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본체가 아니라 분신인 것 같네요.”
세리느는 알베리히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사전에 에르나스가 알려 준 정보에 의하면, 알베리히는 수많은 분신을 동시에 조종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네, 제가 보기에도… 확실히 대주교치고는 존재감이 약합니다.”
슈미츠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작 저희들을 상대하려고 대주교 본인이 직접 나서지는 않겠죠.”
“그것도 그러네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세리느와 슈미츠는 알베리히를 경계했다.
그리고… 마력의 파도가 날아왔다.
“어라.”
알베리히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세리느와 슈미츠가 호신기를 전방에 집중시켜 알베리히가 날린 마력을 받아쳤기 때문이다.
“용케 대처법을 알고 있었군요. 당신들 정도면 이걸로 기절해야 정상인데.”
“우리를 우습게 여기지 마라, 알베리히 대주교!”
슈미츠가 목소리를 높이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슈미츠, 섣불리 움직이면 안 돼요.”
“괜찮습니다, 세리느 님.”
세리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슈미츠가 칼날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본체가 아니라 분신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렇게 위협적인 것 같지 않습니다.”
“에르나스의 말을 잊었나요? 분신이라고 해도 최대한 주의하라고…….”
“어차피 이놈, 흑천마교의 두뇌 담당 아닙니까?”
슈미츠가 코웃음을 치면서 자세를 잡았다.
“폴카 대주교 같은 전투 담당이라면 모를까, 실험실에 숨어서 이상한 약이나 만드는 놈인데… 우리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후후,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군요, 슈미츠 하르트만.”
알베리히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 분신은 그래듀에이트 상급 정도의 마력밖에 없습니다. 당신들도 그래듀에이트 상급이니… 당신들의 실력이 저보다 뛰어나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흥,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긴……!”
슈미츠가 움직였다.
협공하려던 세리느가 타이밍을 놓쳤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최근 슈미츠도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속도만큼은 하인리히에 필적할 수준까지 성장한 상태였다.
게다가…….
“하압!”
파직!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의 푸른 검기가 번쩍이면서, 초고속의 참격(斬擊)이 펼쳐졌다
동부에서 이그니아스 가문과 싸울 때는 그냥 흉내만 내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최근 에르나스에게 개인 지도를 받은 덕분에, 슈미츠는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의 푸른 검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제대로 먹혀들기만 하면 격상(格上)의 상대도 쓰러뜨릴 수 있는 푸른 검기가 알베리히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었다.
“느리군요.”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슈미츠의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 * *
‘지금쯤 알베리히와의 전투가 시작되었겠지.’
내 예상이 맞다면, 총본산 내부에는 알베리히만 있는 상태일 것이다.
총본산에 남아 있던 마교도들은 모조리 소마의 재료로 희생되었을 테니까.
물론, 알베리히를 위한 것이 아니라 총대주교의 각성을 촉진하기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소설 속에서 알베리히는 10개 정도의 분신을 준비했었어. 이번에는 어느 정도일까.’
분신만으로 브랜틀리나 발렌티아노, 안겔라 등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알베리히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시간을 버는 것이다.
‘알베리히의 분신들은 그래듀에이트 상급 정도의 마력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 전투력은 그 이상이야.’
알베리히의 분신들은 강하다.
왜냐하면 알베리히야말로 총본산에서 가장 검술이 뛰어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알베리히는 후방에서 머리 쓰는 역할을 많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베리히의 전투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야. 오히려… 대주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지.’
흑천마교의 천재.
그것이 알베리히 대주교였다.
검사로서도 연구자로서도 최고 수준의 능력을 지닌 존재다.
그런 인물이기에 총대주교도 알베리히에게 뒷일을 맡긴 것이다.
‘알베리히의 천재적인 검술을… 분신들도 똑같은 수준으로 사용할 수 있어.’
하인리히나 세리느 등도 그래듀에이트 상급이지만, 일대일 대결로는 알베리히의 분신을 꺾을 수 없다.
순수한 검술에서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이다.
다만, 분신들의 전투력은 아무래도 본체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듀에이트로서의 등급이 낮기 때문에 검기나 호신기 등이 약하다.
그러니 여러 명이서 협공하면 알베리히의 분신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녀석들이 섣불리 덤벼들 경우인데…….’
그동안 아군은 연전연승했다.
자만심에 빠져서 알베리히의 분신에게 섣불리 덤벼드는 녀석이 있을 수도 있다.
알베리히의 분신들을 얕보지 말라는 얘기는 해 놨지만, 공명심에 사로잡혀 함부로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하인리히나 슈미츠 같은 녀석들이 문제란 말이지. 근처에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지금 나는 총본산 내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러니 그 녀석들이 무사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분신들을 돌파한 뒤에도 문제야.’
알베리히 본체는 무지막지하게 강하다.
검술도 검술이지만, 흑천급의 도달하기 위한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육체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상태다.
지금 이곳에 있는 그래듀에이트 절정급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랜틀리, 발렌티아노, 안겔라 셋이서 협공을 한다고 해도 알베리히를 쓰러뜨리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브랜틀리는 폴카 대주교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상태다.
더욱 불리한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서둘러야 해.’
지금 나는 마차 안에서 가부좌를 튼 채 마력을 운용하는 중이었다.
철혈검마심법과 흑천마인대법을 동시에 운용하여 나 자신을 다음 경지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문제는… 나 자신도 이것이 언제 끝날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점이다.
‘총대주교의 각성이 빠를까, 아니면 내 각성이 빠를까.’
어느 쪽이 더 빠르냐에 따라, 희생자의 숫자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그러면, 시작해 볼까.’
슬슬 준비는 끝났다.
지금 내 혈맥에는 막대한 양의 마력이 전개된 상태다.
이제 이걸 활용해서… 가슴의 마나 하트를 해체해야 한다.
“…….”
솔직히 두렵기는 했다.
그동안 내가 의지해 왔던 마나 하트를 스스로 파괴해야 하니까.
자칫하면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으로 전락해 버린다.
하지만 절정급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윽……!”
혈맥의 마력을 역류시켰다.
마나 하트에서 흘러나와 전신을 순행하던 마력을, 반대 방향으로 흐르게 했다.
막대한 마력이 역류되면서 마나 하트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무수히 많은 검이 가슴 속을 찌르는 것 같은 감각!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마력을 제어했다.
스스로 심장을 터뜨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내 마력으로 마나 하트를 난도질했다.
그리고…….
“아…….”
우웅.
가슴 속에서 작은 비명이 울려 퍼지면서.
내 마나 하트가 파괴되었다.
“커헉!”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나왔다.
다른 구멍에서도 출혈이 발생하여, 전신이 피범벅이 되었다.
심장을 잃은 것 같은 기분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극도의 고통과 허탈감에 기절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것을 버텨야지만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크으으윽……!”
쿠웅.
그리고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간 직후.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일이 내 안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각성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