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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155화 (154/212)

155화 철혈의 잔재 (4)

황족들이 머무르는 황궁 제2구역.

그곳에 발을 들인 나와 하인리히를 맞이한 건, 다름 아닌 안겔라 교수였다.

“어서 와라, 에르나스, 하인리히.”

“수고하십니다, 교수님.”

철혈기사단과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나는 황녀를 지켜 달라고 안겔라에게 부탁했다.

카톨레아스 대주교가 황녀를 노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아카데미에서 가장 발이 빠른 안겔라를 보낸 것이다.

그 이후로도 안겔라는 계속 제2구역에 머물면서 철혈기사단 대신 황녀를 경호하고 있었다.

“황녀 전하는 어떠십니까?”

“처음에는 많이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지금은 안정된 상태야.”

안겔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1시간 전에는 훈련장에서 검술 연습도 했어. 내가 잠깐 봐주기도 했지.”

“그랬군요. 황녀 전하 실력은 어떠신 것 같습니까?”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됐어. 뭐라 말하긴 어렵지.”

“…….”

안겔라의 말을 듣고, 하인리히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쪽 세계 기준으로 열두 살이면 슬슬 어느 정도 재능을 지녔는지 판별 가능한 시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겔라가 저렇게 말한다는 건… 황녀의 재능이 별 볼 일 없다는 얘기다.

‘아무리 안겔라라고 해도, 대놓고 말하긴 어려운 거지.’

우리는 안겔라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시녀가 많았는데, 다들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그녀들 모두가 황녀를 지키기 위한 ‘호위 시녀’인 것이다.

“황녀 전하 주위에는 남자가 접근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 만일의 사태를 막기 위해서지.”

“시대착오적이군요.”

“하지만 너희들은 특별해. 리히테나워 대공 후보니까 말이야.”

리히테나워 대공 후보라는 건, 곧 황녀의 약혼자 후보라는 얘기다.

그러니 다른 남자들하고는 달리 특별 취급을 받는 것이다.

“황녀 전하, 안겔라입니다. 에르나스와 하인리히를 데려왔습니다.”

“들어오도록 하세요.”

안으로 들어가자, 황궁의 다른 곳과는 달리 아기자기하게 꾸민 공간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우아한 의자 위에… 아름다운 소녀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

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레이나데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레이나데.

차기 황위 계승자인 황제의 외동딸.

그녀를 눈앞에 두고, 나와 하인리히는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입니다.”

“하인리히 아그리파입니다.”

“후후, 딱딱한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어요.”

레이나데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그동안 계속 만나 뵙고 싶었답니다.”

“…….”

“아직 아카데미 재학 중인 학생인데도 훌륭한 검술로 세상을 놀라게 만든 두 분… 정말로 존경스러워요. 아, 이제 그만 일어나서 이쪽으로 오세요.”

우리는 몸을 일으켜, 레이나데가 권하는 대로 의자 위에 앉았다.

곧바로 시녀들이 차를 준비했고, 주위에 향긋한 꽃향기가 퍼졌다.

“저기… 안겔라 교수님?”

“네, 황녀 전하.”

레이나데가 안겔라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녀들과 함께 자리를 비워 주셨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레이나데의 부탁에 안겔라뿐만 아니라 시녀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녀 전하, 그건…….”

“부탁드릴게요. 두 분하고만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요.”

두 손을 모으며 부탁하는 열두 살 소녀의 모습에, 안겔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안겔라 교수님…….”

“여러분, 황녀 전하의 명령입니다. 퇴실하도록 하죠.”

시녀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안겔라까지 저렇게 말하니 어쩔 수 없었다.

철혈기사단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 이상, 현재 황녀의 호위 책임자는 안겔라니까.

“후우, 이제야 겨우 조용히 얘기할 수 있게 되었네요.”

레이나데가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미소 지었다.

“어른들이 지켜보고 있으면 제대로 얘기를 나눌 수 없잖아요. 안 그래요, 하인리히 님?”

“네… 그렇지요.”

하인리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그 옆에서 말없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가향차에서 느껴지는 꽃향기가 강렬했다.

“에르나스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

한 모금 마신 뒤, 나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레이나데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황녀 전하.”

“네?”

“무의미한 인사치레는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

“슬슬 진지한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만, 어떠십니까.”

그 순간.

레이나데의 표정이 변했다.

열두 살 소녀다운 천진난만한 표정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표정으로.

“역시 소문대로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에르나스 님.”

“……?!”

갑작스러운 변화에 하인리히가 당황하며 나와 레이나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에르나스, 대체 무슨…….”

“이게 황녀 전하의 본모습이야, 하인리히.”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하인리히에게 설명을 해 줬다.

“남들 앞에서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행세하는 건 본성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었던 거지.”

“누구처럼 사람 가죽으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있던 것도 아니고, 문제 될 게 있을까요?”

레이나데가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체 어떻게 제 본성을 꿰뚫어 본 건지 궁금하네요. 사피아스 단장의 정체를 간파한 것도 에르나스 님이라고 하고, 혹시 그런 힘을 가진 아티팩트라도 갖고 있는 건가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황녀 전하.”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하인리히가 눈을 깜박였다.

“이, 이게 황녀 전하의 본래 성격이란 말입니까?”

“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인리히 님.”

“아, 아닙니다…….”

하인리히는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동안 온갖 이중적 인물들을 만나 왔지만, 열두 살 소녀가 이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하인리히 님은 에르나스 님과는 달리 순수하신 분이군요. 오히려 더 호감이 가네요.”

“네?!”

호감이 간다는 소리를 듣고, 하인리히가 얼굴을 붉혔다.

“저는 비호감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너무하시는군요.”

“일종의 동족 혐오라고 할까요.”

“저한테 동질감을 느끼고 계신 겁니까?”

“적어도 말은 잘 통할 것 같네요.”

그럴 것이다.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 아칸델이 레이나데를 보면서 ‘마치 에르나스를 여자로 만든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었으니까.

“한 가지 확인하겠습니다, 황녀 전하.”

“네, 말해 보세요.”

“리히테나워 대공 부활의 아이디어는 황녀 전하가 생각하신 겁니까?”

“…….”

레이나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하네요. 대체 어떻게 꿰뚫어 본 거죠?”

“에, 에르나스, 대체 무슨 소리지? 리히테나워 대공 부활은 황실과 궁내부에서…….”

“그 배후에 있었던 게 황녀 전하라는 얘기지.”

물론, 황실에서도 궁내부에서도 황녀의 뜻대로 일이 진행된 거라고는 눈치 못 챘을 것이다.

“너도 이미 눈치챘겠지만, 황녀 전하는 검술의 재능이 부족해.”

“……!”

아까 안겔라 교수가 얼버무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레이나데는 나이를 감안해도 검술의 재능이 부족한 편이다.

검술을 숭상하는 이 제국의 황제가 되기에는 자격 미달이다.

“그래서 황녀 전하는 과거에 있었던 리히테나워 대공 제도를 부활시키려 한 거지. 아카데미에서 뛰어난 실력을 증명한 젊은 그래듀에이트를 곁에 둘 수 있다면, 자신의 단점을 상쇄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 그걸 황녀 전하가 생각하신 거라고?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되셨는데…….”

“하인리히.”

당황하는 하인리히를 향해,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 정도 나이 때부터 여러 책략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야.”

“……!”

그렇다.

에르나스도 이미 저 나이 때부터 본성을 숨긴 채 많은 사람을 농락했다.

레이나데가 열두 살의 나이로 리히테나워 대공 부활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는 것이다.

소설에서 레이나데는 에르나스의 여자판이라 평가받는 인물이었으니까.

“그 정도까지 이해하고 계시니,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군요.”

레이나데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나스 님, 하인리히 님, 제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

“황제 폐하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후에도 이 제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것…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레이나데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저는 무력합니다. 검술 실력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열두 살 어린이의 몸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리히테나워 대공 부활처럼 슬쩍 얘기를 흘려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검사들을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황녀 전하…….”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어, 저를 도와주십시오. 최대한의 보상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레이나데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황권이 견고해진 이후라면, 저와의 약혼을 파기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형식적인 결혼식을 올린 뒤 따로 애인을 만드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저는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화, 황녀 전하, 무슨 그런 말씀을…….”

“그만큼, 저한테는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나데가 우리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황녀답지 않은 저자세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황녀 전하, 고개를 들어 주십시오!”

하인리히가 다급히 소리쳤다.

“황녀 전하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저희는 이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인리히 님.”

하인리히의 진심 어린 발언에 고개를 끄덕인 뒤, 레이나데는 나한테 시선을 향했다.

“에르나스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녀 전하의 생각은 잘 알았습니다.”

하인리히한테는 충격적인 얘기였겠지만, 나는 여전히 냉정했다.

이미 소설을 통해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일종의 확인 작업이었다.

“저도 이 제국이 평화롭고 안정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황녀 전하가 그런 생각이시라면, 서로 힘을 합쳐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에르나스 님.”

레이나데에게는 정말로 다른 마음이 없다.

순수하게 제국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사리사욕 같은 건 조금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황제의 직무를 수행하기에는 최고의 자질을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게 생겼다는 점. 그리고 검술의 재능이 없다는 점… 이 두 가지 문제가 치명적이라, 우리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에서는 아칸델과 인간적인 교류를 하면서 점차 호감을 갖게 되고 진정으로 신뢰하게 되지만… 지금의 나하고는 상관없는 얘기지.’

소설에서 레이나데는 서브 히로인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나는 레이나데와 그런 관계를 진행할 생각이 없었다.

소설처럼 하렘물 전개를 진행할 것도 아니고, 그런 감정이 생기면 곤란할 뿐이니까.

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고 말이다.

“에르나스 님, 하인리히 님, 앞으로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황녀 전하. 저희야말로 황녀 전하를 도와드려야…….”

“그러면 지금 당장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인리히의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 나는 레이나데에게 말했다.

“사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도, 황녀 전하에게 이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속셈이 있었군요. 좋습니다, 말해 보시죠.”

“유스바스트 님을 알고 계시죠?”

“물론이죠. 제 당숙에 해당되십니다.”

유스바스트는 현(現) 황제의 사촌이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한 중년의 남자로, 제국 남부 끄트머리에 있는 영지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다.

“그분에게 편지를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편지라고요?”

“네, 그분에게 리히테나워 대공 자리를 맡기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 주십시오.”

“……!”

그동안 무슨 말을 해도 동요하지 않던 레이나데가 눈을 크게 떴다.

“에르나스 님, 그게 무슨…….”

“에르나스! 갑자기 뭔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냐!”

하인리히도 나를 다그쳤다.

아그리파 가문은 예전부터 유스바스트와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하인리히도 유스바스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스바스트 님은 남부 변방에서 조용히 지내고 계시는 분이다! 그분을 왜……!”

“그분이 차기 황제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이지.”

“……!”

황제가 죽고 레이나데가 즉위하면 큰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 레이나데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제 자리에 오르면 된다.

그런 꿈을 꾸고 있는 게 유스바스트라는 인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흑천마교와 연결되어 있어.”

“뭐, 뭐라고?!”

남부 끄트머리에서 숨을 죽인 채 기회를 엿보고 있는 유스바스트를 끌어내면, 흑천마교도 끌어낼 수 있다.

거기서부터… 흑천마교 총본산 공략을 시작하는 것이다.

“에르나스…….”

레이나데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역시 열두 살 소녀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황녀 전하.”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녀 전하가 즉위하실 무렵이면, 황권을 위협할 만한 놈들은 전부 다 청소되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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