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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154화 (153/212)

154화 철혈의 잔재 (3)

황궁에서 벌어진 혼란은 신속하게 수습되었다.

사실 황제가 있는 황궁 한복판에서 철혈기사단과 전투를 벌였다는 건 대역죄로 처벌받을 만한 폭거였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카톨레아스 대주교가 사피아스 단장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다.

발렌티아노 교수가 국무회의에 참석해 있던 관료들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했고, 궁내부의 칼데아스 사무관도 적극적으로 우리를 변호했다.

게다가 황제가 나를 리히테나워 기사단장으로 임명하고 리히테나워 대공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결국 아무런 처벌 없이 넘어가게 되었다.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세리느가 내 얼굴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를 막론하고 우리를 대역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대신이 무척 많았어요. 자칫하면 우리 모두 반역자가 될 뻔했다니까요.”

“국무회의 분위기가 험악했던 모양이군.”

“네, 동부 명문가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발렌티아노 교수님이 설득해 주신 덕분에 가까스로 수습되었지만요.”

그렇게 말하는 세리느 옆에서, 클로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리느 님, 대신들도 우리를 정말로 반역자로 몰아세울 생각은 없었을 거예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러다가 정말로 우리가 반역을 결심하면 대신들도 난처해지니까요.”

“크, 클로에,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클로에 말대로, 대신들도 우리가 반역자가 되는 건 원치 않을 것이다.

현시점에서 우리를 막을 수 있는 세력이 제국 내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혈기사단의 수뇌부가 괴멸된 이상, 아카데미를 막을 수 있는 건 아그리파 가문뿐인데…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아그리파 가문도 아카데미와 같은 입장이다.

“어쨌든, 에르나스 님.”

클로에가 나를 향해 물었다.

“이번에 리히테나워 기사단이 발족하고, 그 단장인 에르나스 님에게는 리히테나워 대공에 준하는 권한이 부여된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아, 저도 그걸 듣고 싶었어요.”

세리느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쳐다봤다.

“딱히 지금과 큰 차이가 나는 건 아니야.”

나는 천천히 설명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리히테나워 검술 아카데미’의 학외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싸움을 벌여 왔지. 원래 아카데미는 서부에서 몬스터나 마교도 토벌 등 치안 유지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연장선상으로 말이야.”

“네, 그랬죠.”

“하지만 아무래도 아카데미의 본분을 넘어선 활동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 그렇기 때문에 매번 명분을 확보해야 했어.”

그동안 우리가 전장에서 싸우고 있을 때도,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알드바우트 총장이 여러 곳에 연락을 취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에 대처하고 있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아카데미의 정체성은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히테나워 기사단’은 순수하게 군사활동을 위한 조직이야. 흑천마교처럼 제국을 위협하는 자들을 쓰러뜨리라고 황제 폐하가 직접 지시하신 조직이니, 이런 부분을 신경 쓸 필요가 없지.”

“그러면… 보다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차이일 뿐인가요?”

“그래, 그러니 우리가 하는 일 자체는 큰 차이가 없어. 다만… 우리 주변이 달라지겠지.”

“주변이요?”

“예를 들어 우리 활동에 비협조적인 가문이 있을 경우, 황제 폐하에게 거역하는 거냐고 압박할 수 있어.”

“아……!”

“여러 가문뿐만 아니라, 각종 관계 부처도 협조해 줄 거야. 제국 전체가 우리의 아군 역할을 해 주는 거지.”

이제 우리는 황제를 등에 업었다.

제국 전체를 아군으로 삼아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제국의 힘을 하나로 모아 흑천마교 토벌을 위해 움직이면 되는 거군요.”

“에르나스 님, 하지만… 그들이 가만 보고만 있을까요?”

클로에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번 조치는 사실상 에르나스 님을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내정한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텐데요?”

“그 부분은 나도 생각해 뒀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그리파 쪽에는 내가 직접 얘기해 볼 생각이야.”

아그리파 가문.

현시점에서 유일하게 아카데미에 대항할 수 있는 검술명가와 제대로 대화를 해야 한다.

* * *

황궁 제4구역에 머무르고 있던 브랜틀리 아그리파를 찾아가자, 마침 하인리히도 같이 있었다.

“에르나스……!”

“하인리히, 앉아라.”

하인리히가 나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브랜틀리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에르나스, 할 얘기가 있어서 온 모양이군.”

“네, 브랜틀리 님.”

“일단 앉아라. 간단히 끝날 얘기는 아닌 것 같으니.”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자, 브랜틀리가 측근에게 지시해 차를 준비시켰다.

찻잔을 준비해 온 측근이 퇴실하자, 방 안에는 우리 셋만 남게 되었다.

“리히테나워 기사단의 책임자로 임명된 모양이군.”

“네, 맞습니다.”

“과거에도 황제 폐하의 지시로 임시 기사단이 구성된 적이 몇 번 있었다.”

브랜틀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직 학생 신분인 그래듀에이트를 기사단장으로 임명한 사례는 유사 이래 처음이겠지.”

“…….”

“용케 황제 폐하를 설득했군, 에르나스.”

브랜틀리의 냉정한 눈동자가 내 얼굴을 응시했다.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꼈지만, 너는 검술 못지않게 정치력도 뛰어난 것 같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무렵, 나는 검술의 힘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이 세계에서 살아가다 보니, 머리를 써서 나에게 유리한 포지션을 획득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내 행보는 소설 속 에르나스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책략을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포지션을 확보하는 모습은 소설 속의 에르나스와 큰 차이가 없었다.

“6검 회의에서 클라우비체를 도발했을 때부터 너는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러 가문을 무너뜨린 뒤, 스스로 제국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겠지.”

“과대평가이십니다, 브랜틀리 님.”

“과대평가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며 브랜틀리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오히려 아직도 나는 네 전모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네 최종 목표는 무엇이지?”

브랜틀리가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나는 네가 최종적으로는 이 세계의 정점에 오르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브랜틀리 옆에 앉아 있던 하인리히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황제의 자리를……!”

“대답해 봐라, 에르나스.”

경악하는 아들을 내버려 둔 채, 브랜틀리는 계속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거짓으로 대답해도 좋다. 나는 네 대답을 듣고 싶다.”

“…….”

“네 최종 목표는 무엇이냐.”

네가 거짓말로 대답해도, 내 눈으로 네 본심을 꿰뚫어 보고야 말겠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브랜틀리 님,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이 세계의 정점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

“에르나스, 네놈……!”

브랜틀리는 가만히 나를 노려봤고, 하인리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이건 결코 권력의 정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의 정점이 아니라고?”

“제가 관심이 있는 건, 어디까지나 검의 정점입니다. 권력의 정점 같은 건… 관심 밖입니다.”

“…….”

“황제의 자리? 전혀 관심 없습니다.”

이건 내 진심이다.

나라를 통치하는 것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가, 에르나스.”

“네, 진심입니다.”

“…….”

“만약 제가 제위를 넘보는 모습을 보일 경우, 브랜틀리 님이든 하인리히든 바로 제 목을 치십시오.”

나는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목이 달아나도 원망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알겠다.”

브랜틀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기억해 두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뒤, 브랜틀리는 아들인 하인리히에게도 시선을 향했다.

“하인리히, 너도 기억해 두도록 해라.”

“아버지…….”

“에르나스가 수상한 모습을 보이면, 반드시 목을 쳐야 한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이 부분은 두 사람 다 납득한 듯했다.

그러면 슬슬 내 본론에 들어갈 차례다.

“오해가 풀린 듯하니… 브랜틀리 님, 슬슬 제 용건을 말해도 될까요?”

“좋다, 에르나스.”

브랜틀리가 내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용건을 말해 봐라.”

“오늘은 브랜틀리 님에게 부탁을 드리러 찾아온 겁니다.”

“부탁이라.”

내 말을 들은 브랜틀리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흑천마교 토벌에 협력하라는 건가.”

“네, 맞습니다.”

“황제 폐하가 너한테 지시한 사항이니, 어쩔 수 없지.”

아까 세리느와 클로에한테 말한 대로,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 상태라 아그리파 가문도 협력할 수밖에 없다.

“알겠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공유해 주지. 병력도 보내 주마.”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걸 부탁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뭐라고?”

“브랜틀리 님.”

나는 브랜틀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리히테나워 기사단의 부단장을 맡아 주십시오.”

“……!”

부단장.

그 얘기를 듣고 브랜틀리가 눈을 크게 떴다.

“사실 브랜틀리 님이 저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어야 맞겠지만, 더 높은 지위가 없어서 말입니다.”

황제는 나한테 기사단장을 맡겼다.

그리고 리히테나워 ‘대공’에 준하는 권한도 줬기 때문에, ‘공작’인 브랜틀리는 내 밑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어떠십니까, 브랜틀리 님.”

“무슨 생각이냐, 에르나스.”

브랜틀리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그리파 가문의 가주인 나를… 리히테나워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삼겠다고?”

“리히테나워 기사단은 아카데미와는 독립된 조직입니다. 아카데미 바깥 사람인 브랜틀리 님이 부단장을 맡으셔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

“브랜틀리 님, 저는 이번 작전에 브랜틀리 님의 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말했듯이, 지금은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의 숫자가 부족하다.

절정급 중에서도 상위권에 해당되는 브랜틀리가 함께해 준다면 흑천마교의 대주교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아버지,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하인리히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흑천마교 토벌은 우리 아그리파 가문의 숙원입니다. 큰 권한을 주겠다고 하면, 받아들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인리히…….”

“그리고 말입니다.”

하인리히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부단장을 맡으시면, 에르나스가 흑천마교 놈들한테 당했을 때 지휘권을 이어받게 됩니다.”

“…….”

“아그리파 가문이 리히테나워 기사단을 지휘하게 되는 것이죠.”

그 말을 듣고, 나는 피식 웃었다.

“네 말이 맞아, 하인리히.”

하인리히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여전히 그에게 투지(鬪志)가 남아 있다는 걸 확인했다.

황제가 나한테 리히테나워 대공에 준하는 권한을 준 것 때문에 실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브랜틀리 님, 어떻습니까.”

“알겠다, 에르나스.”

브랜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측근들을 데리고 리히테나워 기사단에 참가하겠다. 아그리파 가문의 힘을 똑똑히 보여 주도록 하지.”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걸로… 나는 브랜틀리 아그리파라는 최고의 전력을 내 편으로 만들었다.

앞으로의 싸움에서 브랜틀리는 아카데미 교수들 이상의 도움을 줄 것이다.

흑천마교 토벌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그때 가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하인리히.”

“뭐지?”

“브랜틀리 님하고 할 얘기는 다 끝났으니, 이제 너하고 할 얘기만 남았군.”

“나하고 할 얘기가 있다고?”

하인리히가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대체 뭐지?”

“칼데아스 사무관도 얘기를 꺼냈고, 슬슬 때가 됐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리히테나워 대공 관련인가?”

“그래, 맞아.”

“…….”

하인리히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아직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걸 포기하지 않은 눈빛이었다.

“하인리히, 그런 눈빛은 안 돼.”

“뭐?”

“겁먹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겁을 먹다니? 누가?”

말을 못 알아듣는 하인리히를 보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황녀 전하 말이야.”

“황녀 전하……?”

“그래,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되셨는데 너처럼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남자가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면 기겁하실 테니까.”

황제가 죽으면 차기 황제로 즉위할… 황제의 외동딸.

슬슬 그녀와 만날 때가 된 것이다.

“듣자 하니 황녀 전하도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더라고.”

“우리를……?”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황녀 전하의 약혼자가 될 테니까 말이야. 황녀 전하로서는 우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지.”

“……!”

내가 던진 농담에 하인리히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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