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혼돈의 황궁 (3)
카톨레아스 대주교.
소설 속의 황궁 에피소드에서 흑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외부로 출장 나온 철혈기사단의 사피아스 단장을 암살한 뒤, 사피아스의 ‘껍질’을 뒤집어썼다.
흑천마교의 비술을 사용한 카톨레아스는 완벽하게 사피아스로 위장해 황궁으로 숨어들었다.
물론, 겉모습이나 말투를 위장했다고 해도 검술까지 완벽히 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피아스는 황궁을 지키는 철혈기사단의 단장이기 때문에, 직접 전장에 나서서 검을 휘두를 일이 거의 없었다.
카톨레아스는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은 채 황궁 안에서 암약하며 내부 정보를 흑천마교에 유출했다.
그리고 제국의 정세를 시시각각 관찰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카톨레아스 대주교, 너희는 아카데미와 검술명가들이 충돌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봤어.”
나는 사피아스 단장, 아니 카톨레아스 대주교를 향해 말했다.
“명문가의 그래듀에이트들이 차례차례 죽어 나가는 건 너희들한테 반가운 일이었지. 그들이 사라지면 흑천마교가 활동하기 쉬워지니까.”
그동안 각 지역에서 흑천마교를 견제해 온 건 6대 검술명가를 중심으로 한 명문가들이다.
지금까지 아카데미와의 싸움으로 인해 여러 가문이 몰락하면서, 흑천마교가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아카데미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고, 아그리파 가문도 건재하니까.”
“…….”
“만일 아카데미나 아그리파 가문에서 리히테나워 대공을 배출하고 제국을 안정화하면, 흑천마교 입장에서는 좋을 게 없지. 너희들은 어떻게든 방해를 해야 했어.”
흑천마교는 나라가 혼란하면 혼란할수록 좋다.
누군가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어 혼란을 수습하는 건 원치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방해 공작에 나섰다.
“너희들은 더 큰 혼란을 원했어. 명분도 없고 실리도 없는 난전(亂戰)이 벌어지기를 기대했지. 그래서… 우리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인 거야.”
“…….”
“아카데미와 검술명가가 본의 아니게 황궁에서 싸움을 벌이게 되고, 승리한 쪽도 역적으로 몰리게 되는… 혼란스러운 싸움을 연출하려 한 거지.”
소설에서는 칼레온 이그니아스가 계략에 걸려들고, 아카데미 측도 거짓 정보에 휘둘려 우왕좌왕하면서 큰 혼란이 벌어졌다.
에르나스가 진상을 눈치채고 개입하지 않았다면, 흑천마교의 의도대로 모조리 공멸(共滅)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실에서는 철혈기사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지. 하지만 철혈기사단에게는 국정을 안정시킬 능력이 없고, 무엇보다 단장인 사피아스의 정체가 흑천마교의 대주교였으니… 결국 제국은 완전히 붕괴하게 되는 거야.”
이것이 카톨레아스 대주교와 흑천마교의 계획이다.
그들의 목적은 딱히 제국을 장악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철두철미한 계획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저 거대한 혼란을 일으키는 것만이 목적이었기에, 이렇게 일을 진행한 것이다.
“정말로… 놀랍군.”
카톨레아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혼란 속에서 용케도 진상을 간파했구나.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글쎄, 어떨까.”
“아버지인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의 지혜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는데…….”
혼잣말을 하면서 카톨레아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구나. 아직 스무 살 전후밖에 안 되는 애송이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다니… 너는 대체 뭐 하는 놈이지?”
카톨레아스는 한숨을 내쉬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뭐… 좋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수밖에.”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내가 준비한 책략이 이것뿐이라 생각하나?”
그렇게 말하며 카톨레아스가 미소 지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다음 작전이 개시되고 있을 것이다.”
“다음 작전?”
“그래, 너희들의 허를 찌를 수 있는…….”
“황녀 전하를 납치하는 것 말이군.”
“…….”
카톨레아스가 침묵했다.
“황궁 안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황녀 전하를 피신시키려 했겠지. 철혈기사단의 결정이니 황녀 전하는 아무런 의심도 안 하고 황궁 바깥으로 나갈 테고 말이야.”
“…….”
“그렇게 하면 너희 흑천마교에서 마음대로 납치할 수 있는 거지. 안 그런가?”
나는 피식 웃었다.
“이미 조치를 다 취한 상태야. 지금 이 황궁에서 가장 중요한 경호 대상은 황녀 전하니까.”
“네놈…….”
병석에 누워서 죽어 가고 있는 황제는 함부로 옮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놈들은 황녀를 노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아카데미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지닌 안겔라 교수가 움직이고 있지. 너희들은 너무 늦게 움직였어.”
“크윽…….”
안겔라의 이름을 듣고 카톨레아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안겔라는 마교도들을 가장 많이 도륙한 교수 중 한 명이니, 카톨레아스도 그 실력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카톨레아스.”
나는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이제 책략은 바닥났나?”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 직후, 사방에서 폭음이 들렸다.
놈들이 황궁 곳곳에 미리 장치를 해 놓은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네놈을 죽이고 황궁을 불바다로 만들어 주마!”
“그래,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밖에 남지 않았겠지.”
지금 황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은 발렌티아노 교수가 대처해 줄 것이다.
황녀는 안겔라 교수가 알아서 지켜 줄 테고, 철혈기사단의 또 다른 절정급인 마르타와 실리온드는 브랜틀리가 상대하는 중이다.
그러니… 나는 카톨레아스 대주교를 잡는 것에 집중하면 된다.
“덤벼라, 카톨레아스 대주교.”
나는 마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얼굴에 뒤집어쓴 사피아스 단장의 가죽을 벗겨, 황궁 전체에 네 진짜 얼굴을 보여 줄 것이다.”
“건방진 놈……!”
카톨레아스의 검에서 검붉은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흑천마교의 전투 사제들이 사용하는 붉은 검기보다 훨씬 흉흉한… 사악한 검기였다.
“그렇다면 나는 네 몸을 갈기갈기 찢어 황궁 전체에 뿌려 주마! 건방지기 그지없었던 애송이의 말로를 모든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
불타오르는 황궁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젠장……!”
하인리히는 무너진 건물 속에서 뛰쳐나왔다.
멀리서 에르나스가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
목소리를 높이며 경신술을 사용했다.
지금 두 명의 검사에게 협공당하고 있는 브랜틀리를 지원해야 했다.
“……!”
쿠쿵!
브랜틀리가 펼친 공격에 건물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함께 브랜틀리를 상대하고 있던 검사들이 공격을 피해 다급히 후퇴했다.
‘마르타 차석 기사와 실리온드 3석 기사인가!’
붉은 머리카락의 여성 기사는 마르타, 하얀 수염을 기른 남성 기사는 실리온드일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브랜틀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아버지!”
“하인리히?”
하인리히가 접근하자, 브랜틀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여기는 뭐 하러 왔느냐.”
“가세하겠습니다, 아버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브랜틀리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서 충분하다.”
“하지만……!”
마르타도 실리온드도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이다.
브랜틀리 혼자서 동시에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인리히, 나를 얕보지 마라. 저런 녀석들 정도는…….”
“아버지야말로, 저를 얕보지 말아 주십시오!”
“뭐라고?”
브랜틀리가 하인리히를 쳐다봤다.
평소처럼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살짝 놀란 눈빛이었다.
“저도 이미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했습니다!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수 있습니다!”
“…….”
“아버지가 저놈들에게 패배할 거라 걱정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저하고 함께 싸우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인리히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하자, 브랜틀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하인리히의 얼굴을 응시했다.
“성격이 많이 변했군.”
“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아그리파 가문을 떠날 때만 해도, 너는 모든 일에 무덤덤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열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일 줄 아는 남자가 되었군.”
“아, 아버지…….”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너를 성장시켰나 보군. 아니… 에르나스와의 경쟁 덕분인가?”
“……!”
하인리히는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브랜틀리의 지적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과거의 하인리히가 모든 일에 냉담했던 건, 압도적인 실력으로 모든 것을 뜻대로 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르나스와 싸워 패배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 승리를 갈구하며 발버둥 치는 괴로움을 알게 된 결과… 지금처럼 아버지에게 달려와 목소리를 높일 줄 아는 남자가 된 것이다.
“나쁘지 않구나, 하인리히.”
“아버지…….”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브랜틀리에게서 물러섰던 마르타와 실리온드가 자세를 정비하고 다시 다가왔다.
“하인리히 아그리파까지…….”
“브랜틀리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 사람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버지, 저놈들은…….”
“지금 저놈들에게 발이 묶인 상황이다.”
브랜틀리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해치우고 사피아스 단장을 잡고 싶었지만, 쉽지 않더군.”
“그러면 빨리 해치우는 편이 좋겠군요.”
하인리히는 아까 다른 기사에게서 빼앗은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의 푸른색 검기를 전개했다.
“그건 뭐냐.”
“아카데미에서 욜스 교수님에게 배운 겁니다.”
“그렇군. 에르나스도 비슷한 검기를 쓰던 것 같았다.”
브랜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그리파 절검술에 조합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이미 연습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마르타와 실리온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긴장감 없는 태도로…….”
“하지만 우리한테는 좋은 기회일세!”
마르타와 실리온드가 좌우에서 달려들었다.
“하인리히, 너한테 우측을 맡겨 보겠다. 할 수 있겠나?”
“맡겨 주십시오!”
하인리히는 좌측으로 움직이는 브랜틀리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상대는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이지만, 별로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 전에 칼레온 이그니아스라는 강대한 존재와 싸워 봤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이놈들을 꺾고… 더 성장하겠다!’
에르나스처럼,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를 꺾는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하인리히는 전력을 다해 검기를 펼쳤다.
* * *
카톨레아스의 검에서 검붉은 검기가 뻗어 나갔다.
이건 평범한 검기가 아니었다.
흑천마교가 자랑하는 금단의 검술… 흑천천수검술의 검기였다.
“나의 천수검기(千手劍氣)로 갈기갈기 찢어 주마…….”
카톨레아스는 대주교들 중에서 1, 2위를 다투는 마력량을 자랑한다.
흑천마교의 비술(秘術)로 마나 하트를 확장하여 저장량을 늘렸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지만, 결국 카톨레아스는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의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막대한 마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마력으로 펼치는 금단의 힘이… 지금 카톨레아스의 검에서 뻗어 나온 천수검기였다.
“너 같은 애송이가 내 천수검기를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
일반적인 검기는 칼날과 같은 형태를 취한다.
마력을 최대한 불어넣어 거대화한다고 해도, 결국 거대한 칼날이 될 뿐이다.
하지만 천수검기는 칼날의 형태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나무뿌리와 비슷하고, 어떻게 보면 머리카락과 비슷하다.
칼날에서 뻗어 나온 무수히 많은 ‘촉수’가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적진을 유린하는 것이 바로 천수검기였다.
넓은 범위를 한꺼번에 쓸어버릴 수도 있고, 하나의 목표를 모든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도 있었다.
“피하지도 막지도 못할 것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촤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천 가닥의 검기가 에르나스를 덮쳤다.
도망갈 틈 하나를 주지 않고 공간 전체를 유린하는 공격이었다.
“나는 피하지도 막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
에르나스의 검에서 막대한 양의 마력이 전개되었다.
“그저 얼릴 뿐이지.”
“……!”
파파파파팟!
정체불명의 냉기가 사방으로 전개되었다.
그 냉기는 카톨레아스가 펼친 천수검기를 집어삼켰고… 공중에서 얼려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얼어붙은 검기가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보면서, 카톨레아스는 경악했다.
방금 에르나스가 펼친 빙검술은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일 것이다.
하지만 천수검기를 얼어붙게 만들 정도의 냉기를 저렇게 넓은 범위에 전개한다는 건… 카톨레아스 이상의 마력을 갖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직 스무 살 전후밖에 안 되는 네놈이, 흑천마교의 사람도 아닌 네놈이, 어떻게 그 정도 마력량을……!”
경악하는 카톨레아스를 향해 얼음 칼날의 폭풍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