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혼돈의 황궁 (2)
“아악……!”
철혈기사단의 차석 기사인 마르타는 비명을 질렀다.
브랜틀리 아그리파의 공격이 자신의 어깨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마르타 경……!”
3석 기사인 실리온드가 다급히 날아와 브랜틀리를 견제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마르타는 어깨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섰다.
“크윽…….”
마르타는 마력으로 출혈을 틀어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마르타는 빈손이었다. 브랜틀리에게 검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브랜틀리는 분명 맨손이었다.
하지만 맨손으로 엄청난 검기를 펼쳐 주위를 파괴하더니, 당황한 마르타에게 달려들어 검을 빼앗았다.
‘방금 맨손으로 펼친 검기… 아그리파 청월검술(靑月劍術)인가?’
아그리파 가문에는 세 가지 독문 검술이 있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아그리파 속검술.
능숙한 그래듀에이트를 위한 아그리파 절검술.
그리고… 가주를 위한 아그리파 청월검술이다.
‘함부로 세상에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검술이라 들었는데…….’
브랜틀리가 펼친 검기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철혈기사단 수석, 차석, 3석이 함께 있었는데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
전부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였기에 망정이지, 일반 기사들이었다면 바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크윽……!”
파앗!
브랜틀리의 맹공에 실리온드가 다급히 뒤로 몸을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브랜틀리는 아그리파 청월검술이 아니라 아그리파 절검술을 사용하고 있지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브, 브랜틀리 님!”
마르타는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브랜틀리 님은 큰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저희는 흑천마교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대꾸하지 않고 실리온드를 몰아세우는 브랜틀리를 향해, 마르타는 계속 소리쳤다.
“흑천마교라니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자세히 설명해 봐라.”
브랜틀리에게서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는 왜 나를 불러들인 거지? 정말로 내 목숨을 사용해 비더케렌 환혼술을 시도할 생각이었나?”
“무, 물론입…….”
“거짓말하지 마라.”
“……!”
그 순간.
브랜틀리가 집어 던진 검이 마르타의 머리 위를 스쳤다.
마르타가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지 않았다면, 브랜틀리의 어검술에 머리통이 터졌을 것이다.
“비더케렌 환혼술을 사용해 신하의 육체를 빼앗아 수명을 늘린다… 황제 폐하께서 그런 사악한 술법을 용인하실 리 없다.”
“……!”
“나는 젊은 시절에 황제 폐하께 잠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브랜틀리가 어검술을 펼치면서 말했다.
“황제 폐하의 검술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올곧고 강인했다. 그런 분이… 신하의 육체를 빼앗아 목숨을 유지하려 하신다고?”
“브, 브랜틀리 님, 지금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마르타는 답답함을 느끼며 소리쳤다.
“비더케렌 환혼술은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황제 폐하를 현혹한 거겠지.”
“……!”
“병석에 누워 계신 황제 폐하께 잘못된 생각을 주입했다면… 너희들은 죽어 마땅하다.”
브랜틀리의 말에 마르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지적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 사피아스 단장님이 황제 폐하께 비더케렌 환혼술 얘기를 꺼낸 건 사실이야…….’
마르타도 자세한 건 모른다.
황제의 침실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피아스가 황제를 설득했다고 알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너희는 비더케렌 환혼술을 시도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브, 브랜틀리 님…….”
“너희는 비더케렌 환혼술을 핑계로… 나와 에르나스를 제거하려던 것 아닌가?”
“……!”
마르타가 숨을 삼킨 순간, 실리온드가 브랜틀리에게 달려들었다.
실리온드는 북부 발트펠트 가문의 분가 출신이기 때문에, 발트펠트 패검술을 독자적으로 개량한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브랜틀리……!”
발트펠트 가문 특유의 금색 검기가 브랜틀리를 덮치려 했다.
브랜틀리는 바람 같은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했지만, 실리온드는 계속해서 맹공을 펼쳤다.
“자네 추측은 그럴싸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아주게! 우리는 결코 흑천마교와는 관계가 없네!”
“그러면 에르나스는 왜 흑천마교를 언급한 거지?”
“그건 우리가 알 수가 없지! 오히려 에르나스를 더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마르타는 실리온드에게 동조해 고개를 끄덕였다.
실리온드의 말대로 이번 일은 흑천마교하고는 관계없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비더케렌 환혼술을 어떻게 알았지?”
“뭐?”
“황제 폐하께서 너희에게 먼저 비더케렌 환혼술 얘기를 꺼내셨나? 너희가 말하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던데.”
“…….”
“너희는 어디선가 비더케렌 환혼술의 자세한 정보를 입수했을 거다. 그리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황제 폐하를 현혹했겠지. 그 정보의 출처가 어디지?”
마르타와 실리온드는 입을 다물었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건 사피아스뿐이다.
하지만 지금 사피아스는 이 자리에 없다.
황궁에서 무슨 사건이 터졌을 때, 철혈기사단 단장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황제 곁을 지키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피아스는 마르타와 실리온드에게 브랜틀리를 맡기고 황제에게 달려간 상태였다.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더더욱 수상해지는군.”
“브랜틀리, 자네… 윽!”
브랜틀리가 질풍처럼 움직이며 실리온드의 팔을 찔렀다.
“알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다. 너희들은 황제 폐하를 이용해 음모를 꾸민… 대역죄인이다.”
“브랜틀리……!”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아그리파 가문의 수장으로서, 내가 너희를 단죄할 것이다.”
마력을 끌어올리는 브랜틀리를 보면서, 마르타와 실리온드는 동시에 뒷걸음질 쳤다.
같은 절정급이라고는 하지만… 브랜틀리는 명백히 한 수 위의 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 * *
“철혈기사단의 목적은 황제 폐하가 돌아가신 뒤 제국의 주도권을 잡는 거야.”
“뭐라고?”
앞을 가로막는 기사들을 쓰러뜨리며 설명하자, 옆에서 하인리히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우리는 기사들에게 빼앗은 검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었다.
“철혈기사단이 권력을 탐하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래, 그러기 위해서 우리와 브랜틀리 님을 제거하려 하는 거지.”
소설에서는 더 많은 인물이 황궁에 들어온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복잡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부분은 같을 것이다.
“놈들이 원하는 건 이 제국에서 철혈기사단 외의 세력을 무력화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차기 황제가 즉위했을 때 철혈기사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지거든.”
“……!”
본래 철혈기사단은 황궁 경호만을 담당한다.
지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하지 않으며, 정치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차기 황제에게 도움을 줄 만한 세력이 없어져 버리면… 철혈기사단의 권한이 커질 수밖에 없다.
“철혈기사단이… 리히테나워 대공의 역할을 한다는 건가!”
“바로 그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리히테나워 대공 후보인 나와 하인리히를 제거해야 한다.
그 뒤에 있는 아카데미와 아그리파 가문도 힘을 빼 놔야 한다.
‘소설에서는 브랜틀리가 아니라 칼레온이 먼저 걸려들었지.’
이그니아스 가문이 건재했던 시점에서 벌어졌던 사건이라, 소설에서는 칼레온 이그니아스도 황궁에 들어왔다.
칼레온은 루퍼스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만들어 준다는 얘기에 속아 넘어가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철혈기사단의 비더케렌 환혼술은 가짜였고… 세뇌당한 칼레온은 철혈기사단의 꼭두각시가 된다.
‘결국 주인공 아칸델의 활약으로 제정신을 차리지만 말이야.’
철혈기사단은 리히테나워 대공 자리를 미끼로 삼아 검술명가와 아카데미를 현혹했다.
그리고 세뇌와 가짜 정보를 활용해 서로 싸우다가 공멸(共滅)하게 만들려 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쪽이 살아남으면… 황궁에서 무력을 사용해 황제를 위협한 반역자로서 처단하면 되는 거고 말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인리히가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철혈기사단은 그동안 아무 문제 없이 황궁을 잘 지켜 왔다! 왜 이제 와서 그런 야망을……!”
“글쎄, 뭔가 이유가 있겠지.”
물론… 나는 이유를 알고 있다.
하인리히의 말대로, 철혈기사단은 이런 음모를 꾸밀 집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번 음모 자체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야.’
철혈기사단의 계획은 상당히 지리멸렬하다.
아카데미와 검술명가를 동시에 무너뜨리려고 하는 주제에, 세부적인 부분이 너무 허술했다.
게다가 아카데미와 검술명가를 무너뜨린 다음에 어떻게 권력을 잡을지조차 제대로 생각해 두지 않은 상태였다.
‘소설에서는 에르나스가 이 부분을 꿰뚫어 보고, 누구보다 먼저 진상을 파악했지.’
비더케렌 환혼술로 황제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도.
아카데미와 검술명가를 무너뜨려 철혈기사단이 권력을 잡는 것도.
그 어느 것도 이번 음모의 핵심이 아니다.
‘철혈기사단을 이용해 황궁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존재… 그 정체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기운을 감지했다.
“하인리히, 호신기를 전개해!”
“뭐?!”
쿠쿠쿵!
막강한 검기가 천장을 무너뜨렸다.
나도 검기를 극대화해 받아쳤지만, 완전히 막아 내지는 못했다.
“크윽!”
“허억……!”
하인리히를 비롯한 아군들 사이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중상을 입은 사람이 없기를 바라며 나는 무너진 천장 위로 날아올랐다.
“…….”
먹구름이 잔뜩 껴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갑옷을 입은 남자가 지붕 위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강렬한 마력 덕분에 누구인지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철혈기사단의 수석 기사… 사피아스 단장인가.”
“그렇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사피아스는 마르타와 실리온드에게 브랜틀리를 맡기고 온 모양이었다.
“황궁 한복판에서 철혈기사단을 상대로 칼부림을 하다니… 믿기지 않는군.”
사피아스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
“황궁에서 이런 폭거를 저지른다는 건… 황제 폐하를 시해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를 생각인가?”
황궁을 지키는 철혈기사단의 단장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사피아스가 검을 치켜들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런 건 결코…….”
“슬슬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사피아스를 향해 빈정대는 목소리를 던졌다.
“이미 너희 계획은 다 틀어졌어. 성실한 철혈기사 흉내는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뭐라고?”
“이런 사태가 터졌을 때 철혈기사단 단장은 황제 폐하를 지키기 위해 1구역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 아니었나?”
“…….”
철혈기사단의 설정상, 사피아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황제 곁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사피아스는 지금 여기에 와서 나를 상대하고 있다.
이거야말로 사피아스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는 증거였다.
“아카데미와 검술명가를 무너뜨리고 철혈기사단이 권력을 잡는다는 건, 이번 음모에 기사들을 가담시키기 위한 사탕발림에 불과해.”
철혈기사단은 황궁을 지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조직이다.
아카데미와 검술명가들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아 봤자, 세상을 더 큰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너는 그동안 황궁에서 암약하면서 많은 사람을 꼬드겨 왔지. 차석인 마르타, 3석인 실리온드… 그리고 황제 폐하까지.”
“…….”
“단순히 말솜씨만으로는 그렇게 사람들을 현혹할 수 없어. 특별한 비술(秘術)을 사용했겠지.”
미하일 발트펠트를 현혹했던 슈라이에르 가문의 루클레치아처럼… 사람을 현혹하는 고대의 마법을 쓸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그런 마법을 가장 잘 쓰는 조직이 있다.
“너는 사피아스 단장이 아니야. 사피아스 단장의 껍질을 뒤집어쓴… 사악한 존재지.”
“…….”
침묵하는 남자를 노려보면서,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천마교의 카톨레아스 대주교, 그게 네 정체다.”
철혈기사단이 지키고 있어 황궁에 얼씬도 못 한다면… 아예 철혈기사단이 되어 황궁에 잠입하면 된다.
그 발상을 실현에 옮겼던 흑천마교의 대주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사악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