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혼돈의 황궁 (1)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입을 다물고 노려보는 브랜틀리 앞에서, 사피아스 단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의사들의 진단으로는… 봄을 넘기기 어려우실 거라 하더군.”
“…….”
“각오하고 있던 일이긴 하지만, 너무 이르다. 이대로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시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지게 되지.”
사피아스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사피아스의 좌측에 있던 철혈기사단 차석 마르타가 입을 열었다.
“브랜틀리 님, 원래 황궁에서는 최소 6개월 정도는 시간이 남았을 거라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
“6개월 뒤라면 리히테나워 대공을 선정하여 황녀 전하를 보필하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리히테나워 대공을 정하는 건… 너무 이릅니다.”
마르타에 이어서, 사피아스의 우측에 있던 철혈기사단 3석 실리온드가 입을 열었다.
“지금 시점에서 리히테나워 대공을 정해야 한다면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황녀 전하를 보필하는 대역(大役)을 맡겨도 될 인물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네.”
“…….”
“게다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리히테나워 대공이 된다는 건… 자네 입장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 아닌가?”
실리온드가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여간, 지금 황제 폐하가 승하하시면 너무 많은 문제가 발생하네. 그러니 이 방법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지.”
“…….”
“그래서… 제국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술(秘術)을 시도하려는 것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실리온드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검술명가의 가주이니… 비더케렌 환혼술(換魂術)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겠지.”
비더케렌 환혼술.
브랜틀리도 들어 본 적이 있다.
천 년 전, 이 제국을 건설한 철혈검제의 전설 속에 언급되는 ‘마법’이다.
“사람의 영혼을 타인의 육체에 깃들게 하는 마법… 비더케렌 환혼술은 실존하네. 물론, 생명의 섭리를 거스르는 금단의 주술이라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지.”
“…….”
“하지만 지금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시면 큰 혼란이 벌어질 테고,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겠지.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결단하신 거네.”
실리온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으니… 우리도 따를 수밖에.”
“실리온드 경의 설명대로… 이건 제국의 앞날을 염려하신 황제 폐하의 결단이다.”
사피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더케렌 환혼술을 사용한다고 해 봤자, 황제 폐하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실 수 있는 건 아니다. 완벽한 술법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몸을 얻는다고 해도 고작 몇 달에서 1년 정도 버티는 게 한계라고 한다.”
“…….”
“하지만, 그동안 황제 폐하께서 다시 국정을 주도하신다면, 황위 계승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제국 전체를 정리할 수 있다.”
지금이야 병석에 누워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지만, 황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카리스마로 제국을 통치하던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다.
국정에 복귀할 수 있다면 황녀를 위해 제국 내부를 다 정리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아그리파 공작, 그동안 내부에서 검토해 본 결과… 황제 폐하의 새로운 육체로써 가장 적합한 건 당신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인 당신은 최고의 육체를 갖고 있지. 게다가 황제 폐하의 젊은 시절과 체형도 비슷하다.”
그렇게 말하며 사피아스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데미의 알드바우트나 발렌티아노, 페르디난드 등은 너무 나이가 많아서 비더케렌 환혼술을 견디지 못한다. 욜스는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하고, 안겔라는 여성이지.”
“…….”
“현시점에서 황제 폐하를 위해 육체를 제공할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은… 당신 정도다.”
지금 제국에서 정상적으로 활동 중인 그래듀에이트 절정급 중에서 중장년의 남성은 브랜틀리뿐이다.
욜스는 큰 부상을 입어 한동안 요양을 해야 하고…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은 영묘 안에 있으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몇 명 더 있었지만, 그동안의 전투에서 하나둘씩 죽어 나갔기 때문에 이제는 브랜틀리밖에 남지 않았다.
“비더케렌 환혼술을 위해 육체를 제공하면, 당신은 죽게 된다.”
“…….”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당신의 희생을 절대로 잊지 않으실 것이다. 그 보답으로… 당신의 아들인 하인리히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삼아 황녀 전하와 결혼시키시겠지.”
황제가 직접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지명하는 것이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하인리히는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존재가 될 것이고, 아그리파 가문은 제국을 이끌어 가는 최고의 검술명가가 될 것이다.”
“…….”
그 말을 듣고… 브랜틀리는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경우 어떻게 될지 상상해 봤다.
그동안 아그리파 가문은 전란에 끼어들지 않고 내실을 다져 왔기 때문에, 그 어떤 가문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그 힘에 리히테나워 대공의 권위가 더해진다면, 차기 황제의 치세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브랜틀리 님, 이건 아그리파 가문에게도 좋은 기회일 겁니다.”
“…….”
“하인리히 님이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꺾고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를 쟁취하려면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겁니다. 하지만 브랜틀리 님이 결단하신다면… 더 이상 피가 흐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마르타의 말을 들으며, 브랜틀리는 최근 있었던 전란을 떠올렸다.
발트펠트 가문, 슈라이에르 가문, 이그니아스 가문… 여러 검술명가의 야망 때문에 엄청난 양의 피가 흘렀다.
브랜틀리는 아그리파 가문까지 그런 일을 벌이는 걸 원치 않았다.
“아카데미는 어디까지나 황실의 명을 받들어야 하는 교육기관일 뿐이지. 황제 폐하께서 아그리파 가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아카데미는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을 걸세.”
“…….”
“자네가 결단을 내리면 아카데미와 아그리파 가문의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테고… 제국에는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지.”
실리온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브랜틀리를 설득했다.
“브랜틀리… 자네는 다른 검술명가의 가주들하고는 다른 인물이네. 제국의 진정한 충신으로서, 현명한 결단을 내려 주게.”
“…….”
그 말을 듣고… 브랜틀리는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사피아스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사피아스 경, 한 가지 확인을 하지.”
“무엇 말인가?”
“내가 거절할 경우, 어떻게 되지?”
사피아스, 마르타, 실리온드는 허리에 검을 차고 있다.
마력 효율이 뛰어난 금속인 진은(眞銀)을 사용한 검으로 보였다.
“무력을 사용해 강제로 나를 굴복시킬 건가?”
“아그리파 공작… 그럴 수는 없지.”
사피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강제로 당신의 목숨을 빼앗는 건 너무 도리에 어긋난 일이다.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무장한 상태로 세 명이나 동시에 찾아와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거지?”
“그건…….”
“물론, 나 말고도 후보는 있겠지.”
브랜틀리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도 후보가 될 수 있을 거다. 그 녀석도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이니까.”
“그건… 그렇지.”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다니?”
“당신들이 정말로 나한테 강요할 생각이 없다면… 에르나스에게 희생을 부탁하면 되는 거다.”
브랜틀리가 희생을 거부한다면, 이제 남은 사람은 에르나스밖에 없다.
“그런데 에르나스가 비더케렌 환혼술을 받아들인다면…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는 자연스레 하인리히에게 돌아가게 된다.”
“……!”
당연한 얘기다.
에르나스가 가장 유력한 후보인데, 그 에르나스가 죽으면 다음 후보인 하인리히에게 차례가 돌아간다.
“그렇다면 내 입장에서는 에르나스한테 떠넘기는 게 가장 유리하지. 내가 희생하지 않아도 하인리히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아그리파 공작, 이건…….”
“내 말이 틀렸나?”
사피아스가 다시 입을 열려 했지만, 브랜틀리는 지체 없이 계속 말했다.
“당신들이 하는 얘기는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많다.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거짓말이라니, 결코 그런 게…….”
“둘 중 하나겠지. 내가 희생을 거부할 경우, 정말로 무력을 사용해 나를 굴복시키려고 했을 수도 있고…….”
브랜틀리는 기사들을 노려봤다.
그들과는 달리, 검을 지니지 않은 맨손이지만…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비더케렌 환혼술을 사용해 황제 폐하의 생명을 연장하겠다는 얘기 자체가 새빨간 거짓말이었을 수도 있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마르타와 실리온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사피아스의 표정은 여전히 냉정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아그리파 공작.”
“그런가?”
“상상력이 너무 지나쳐. 우리가 황제 폐하의 이름을 빌려서 무슨 음모라도 꾸미고 있다는 건가?”
사피아스의 물음에… 브랜틀리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알려 주지, 사피아스 경.”
“뭐?”
“내가 아그리파 가문의 본거지에서 출발하기 전… 통신 마법으로 편지가 하나 전송되었다.”
“편지?”
“동부에서 온 편지였지. 그 내용이 뭐였냐 하면…….”
브랜틀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비더케렌 환혼술을 들먹이는 놈들은 전부 흑천마교 관련자니까 주의하라는 거였지. 황궁에서도 이미 한참 옛날에 소실된 마법이라고 말이야.”
그 순간.
눈앞에 있던 철혈기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네놈들, 대체 언제부터 흑천마교에 귀의한 거지? 황궁에서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던 거냐?”
철혈기사단이 지키고 있기에, 흑천마교는 황궁이 있는 중부 지역에는 얼씬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흑천마교가… 철혈기사단의 수뇌부로서 황궁에 이미 침투해 있었다면?
“에르나스가 보내 준 편지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속아 넘어갔을 뻔했군.”
어째서 에르나스가 그런 편지를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에르나스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브랜틀리 님, 오해입니다!”
“난동을 부린다면 정말로 무력을 쓸 수밖에 없네, 브랜틀리!”
마르타와 실리온드가 칼자루를 잡은 채 경고했다.
하지만, 브랜틀리는 코웃음을 치며 손을 움직였다.
“아그리파 가문을 얕보지 마라, 불충한 기사들이여.”
아그리파 가문의 진정한 독문 검술… 아그리파 청월검술(靑月劍術)이 작렬했다.
* * *
콰앙!
어디선가 폭음이 들려왔다.
제4구역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리들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 발생한 것이다.
“무슨 일일까요?”
“글쎄요. 황궁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리도 없고…….”
세리느와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마력의 파장은…….”
“하인리히, 왜 그러지?”
발렌티아노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인리히를 쳐다봤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대꾸하지 않고 대기실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저 사람 왜 저래요?”
“글쎄?”
비올라와 슈미츠가 당황하면서 하인리히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여러분, 비상사태입니다.”
이름 모를 철혈기사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랜틀리 아그리파가… 역심을 드러냈습니다.”
“뭐라고?!”
하인리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경악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리인가?”
“브랜틀리 아그리파가 반역을……?”
“지금 황제 폐하가 계시는 제1구역으로 침투하려 하고 있습니다. 브랜틀리 아그리파에 호응하여 정체불명의 괴한들도 움직이고 있어서… 저희 철혈기사단만으로는 막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브랜틀리 아그리파를 막기 위해 아카데미 여러분들이 협력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뭐, 뭔가 잘못된 얘기야! 아버지가 왜……!”
하인리히가 목소리를 높이며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어깨를 잡아당기며 제지했다.
“에르나스, 이건……!”
“하인리히, 진정해.”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나는 소식을 전해 준 기사에게 시선을 향했다.
“당신, 폴티아나 4석 기사의 지시를 받고 온 건가?”
“아닙니다. 수석 기사인 사피아스 단장님의…….”
“그렇단 말이지.”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기습적으로 창뢰신기를 전개했다.
“억……!”
쿠웅!
전광석화처럼 뻗어 나간 주먹이 기사를 일격에 기절시켰다.
내 돌발 행동에 대기실에 있던 모든 이가 경악했다.
“에, 에르나스?”
“지금 무슨 짓을……!”
“놈들은 지금 저희와 브랜틀리 아그리파를 충돌시킬 생각입니다.”
기사가 차고 있던 검을 뺏으면서,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리고 싸움에서 살아남은 쪽을… 황궁에서 무력을 사용하여 황제 폐하를 노린 반역자로 몰아세워 처단할 생각이죠.”
“……!”
소설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브랜틀리한테 미리 메시지를 보내 놨었는데, 그게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다.
만약 브랜틀리가 놈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비더케렌 환혼술을 받아들였다면… 브랜틀리는 놈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우리를 공격했을 것이다.
“에, 에르나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자세히 설명해 줄 시간은 없어, 하인리히.”
내 팔을 붙잡는 하인리히에게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네 아버지가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는 거지.”
“……!”
“그리고 위기에 처해 있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나는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했다.
수십 명의 그래듀에이트가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 한 명도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다.
“어물쩍거리다간 우리 모두가 역적으로 몰리고 말아. 그렇게 되기 전에 모조리 쓸어버리고 정리해야 해.”
아카데미와 아그리파 가문.
현재 남아 있는 두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막기 위해… 철혈기사단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