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146화 (145/212)

146화 입궁 요청 (3)

황궁에는 소수의 교수와 학생만 가게 되었다.

일단 총책임자는 발렌티아노 교수가 맡았다. 현재 가장 나이가 많은 지도 교수이고, 알드바우트 총장을 대신하기에 제격이었다.

마찬가지로 지도 교수인 안겔라도 동행하게 되었으며, 그 밖에도 몇몇 정교수가 동행하게 되었다.

학생 중에서는 나와 하인리히, 세리느, 클로에, 슈미츠, 비올라 이렇게 여섯 명만 가기로 했다.

하인리히도 측근들을 데려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딱히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르나스, 측근들에게 황궁 구경을 시켜 주고 싶었던 모양이지?”

“혹시 모르잖아. 믿을 만한 녀석들을 데려가야지.”

“의미 없는 짓을 하는군.”

하인리히가 내 옆에서 코웃음을 쳤다.

“황궁에서 싸울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거야.”

“철혈기사단이 버티고 있는 황궁에서 만일의 사태라는 건 있을 수 없어.”

하인리히의 의견도 교수들이나 세리느 등과 비슷했다.

황궁을 수호하는 철혈기사단이 있으니, 무력 충돌 같은 건 있을 수 없을 거란 얘기였다.

“어차피 검도 전부 빼앗기는데, 아무 의미 없다.”

“…….”

당연한 얘기다.

황제가 있는 황궁에 진검을 소지하고 들어가는 걸 허용해 줄 리 없다.

우리는 황궁 입구에서 검을 몰수당하게 될 것이다.

“슬슬 황궁이 보이는군.”

고개를 치켜들자, 하인리히 말대로 황궁이 보였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검술 국가의 중심다운 회색의 요새였다.

* * *

입구를 지키고 있던 철혈기사단에게 무기를 제출한 뒤, 우리는 황궁 내부로 들어갔다.

소설 속에서 묘사한 대로, 황제의 궁궐이라고 해서 호화찬란하게 장식되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요새처럼 삭막한 분위기였다.

“…….”

세리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바스티안 가문의 본성(本城)이 더 고급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환영합니다, 아카데미 여러분.”

우리를 맞이한 건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금속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 붉은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철혈기사단 4석, 폴티아나 클라리온이라고 합니다.”

폴티아나 클라리온.

그녀의 인사를 듣고 교수들이 술렁였다.

“오랜만이군, 폴티아나.”

발렌티아노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이제는 폴티아나 경이라고 불러야 하나? 졸업한 뒤로는 처음 얼굴을 보는 것 같군.”

“건강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교수님.”

폴티아나는 몇 년 전에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물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부의 명문가 클라리온 가문 출신으로, 그동안 우리를 지원해 줬던 올레아나 클라리온의 딸이다.

“벌써 4석까지 올라가다니, 역시 자네의 재능은 뛰어나.”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여전히 겸손하군.”

철혈기사단은 전원이 그래듀에이트 상급 이상인 소수 정예다.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인데 상위 4명에 들었다는 건, 그만큼 폴티아나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다만…….

“어차피 3석 이상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습니다.”

“흠…….”

폴티아나의 말대로, 3석 이상과 4석은 큰 차이가 있다.

철혈기사단의 수석, 차석, 3석 모두…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이기 때문이다.

아직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불과한 폴티아나 입장에서는 까마득하게 높은 존재로 보일 것이다.

“개인적인 얘기가 너무 길어졌군요. 일단 여러분들이 대기하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폴티아나가 다른 기사들과 함께 앞장섰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갔다.

“여러분은 외부에서 오신 분들이 머무르는 제4구역에서 대기하실 겁니다.”

황궁은 다섯 구역으로 구분된다.

가장 바깥쪽 성벽은 제5구역에 해당되며, 외부에서 온 사람이나 물자는 그 안쪽의 제4구역으로 가게 된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일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제3구역, 궁내부 및 황실 관계자들이 있는 제2구역… 그리고 황제와 직계 가족들이 있는 제1구역이 있다.

“그리고 호출을 받으면 국무회의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국무회의에서는 어떤 얘기를 하면 되지?”

“글쎄요. 그건 제가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저희는 국정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흐음…….”

“수석 기사이신 단장님이라면 뭔가 설명드릴 수 있겠지만, 지금 다른 곳에 계십니다.”

“사피아스 경 말이군…….”

사피아스 단장.

그는 철혈기사단 최강의 검사다.

당연히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이며, 6대 검술명가의 가주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지녔다.

황제의 신뢰가 두터워, 철혈기사단에서 유일하게 검을 지닌 채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알겠네. 그러면 조용히 대기하고 있도록 하지.”

그렇게 우리는 폴티아나의 안내를 받으며 제4구역으로 향했다.

‘지금으로서는 특별한 조짐이 보이지 않아.’

나는 복도를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소설하고 비슷한 상황이긴 하지만, 다른 부분이 많아. 그러니 소설하고는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어.’

소설에서 묘사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얌전히 국무회의에 참석한 뒤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소설하고는 다른 형태로 사건이 발생한다면 어떻게든 대처해야 한다.

‘일단 지켜봐야지. 대책은 세워 놨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이 황궁 어딘가에, 하인리히의 아버지인 브랜틀리도 도착해 있을 것이다.

* * *

궁내부가 위치한 황궁 제2구역.

복도를 걷고 있던 칼데아스 사무관은 중년 기사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급히 다가갔다.

“사피아스 경!”

“칼데아스 사무관.”

철혈기사단 단장 사피아스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궁을 지키는 철혈기사단의 우두머리답게, 언제나 절도 있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 아카데미에서 대표단이 도착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다더군요.”

“혹시 어느 분이 주관하는지 아십니까? 저희 궁내부 쪽에는 아무런 얘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사피아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국무 회의에 출석한다고 하니, 재상 각하가 불러들이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 확인해 봤습니다. 재상 각하도 모른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습니까?”

“아카데미의 교수들만 불러들인 거라면 저도 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칼데아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리히테나워 대공 후보까지 불러들이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아그리파 가문의 브랜틀리 아그리파까지 오게 했으니… 궁내부에 아무런 얘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이상해서 말입니다.”

“…….”

“사피아스 경, 혹시 폐하의 의중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렇게 묻자 사피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질문에는 대답드리기 어렵습니다. 아실 텐데요.”

“그렇군요.”

칼데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긴 했지만, 사피아스의 입은 여전히 무거웠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그냥 대기하고 있도록 하지요.”

“그러시는 게 좋을 겁니다.”

“…….”

그동안 궁내부에서는 리히테나워 대공 선정을 위해 계속 준비해 왔다.

하지만 황제가 갑자기 모든 것을 뒤집어 엎으라고 한다면 그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의 황제가 그런 명령을 내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 저는 이만 제4구역으로 가 보겠습니다.”

“제4구역에? 아, 그러셔야겠군요.”

칼데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이 여러 명 있으니, 사피아스 경이 대기하고 계시는 게 좋겠군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말입니다.”

“만일의 사태라는 건 없을 겁니다, 칼데아스 사무관.”

사피아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뿐만 아니라… 차석과 3석도 대기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 * *

아그리파 가문의 가주, 청월검(靑月劍) 브랜틀리 아그리파는 작은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몇 명 안 되는 수행원들은 다른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이고, 브랜틀리 혼자 이 방으로 왔다.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긴히 할 얘기가 있다는 것 같았다.

‘어떤 얘기를 하려는 걸까.’

브랜틀리가 생각하기에, 이번 호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카데미다.

그동안 아카데미는 제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발한 군사 활동을 해 왔다.

여러 명문가를 쓰러뜨리는 등 아카데미의 본분을 벗어난 행동을 했으니, 황궁에 와서 소명을 하라는 것이다.

아카데미의 대표들이 어떻게 소명하느냐에 따라 별다른 경고 없이 마무리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황궁 측에서 강력한 제재를 내릴 수도 있다.

‘그동안 아그리파 가문은 조용히 내실만 다졌다. 우리 쪽에 제재가 내려지지는 않겠지.’

활발하게 전투를 벌여 온 아카데미와는 달리, 아그리파 가문은 계속 남부에 머물며 내실을 다졌다.

아카데미가 남부에서 슈라이에르 가문과 싸울 때도, 동부에서 이그니아스 가문과 싸울 때도 개입하지 않았다.

‘아그리파 가문은 계속 정도(正道)를 지켜 왔으니… 황궁 측에서 트집 잡을 부분도 없을 터.’

브랜틀리에게도 야심은 있다.

하지만 야심을 위해 정도에서 벗어난 짓을 할 생각은 없다.

만약 브랜틀리가 비겁한 짓도 감수하는 성격이었다면, 아카데미가 슈라이에르 가문이나 이그니아스 가문과 싸울 때 후방을 쳤을 것이다.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고 계속 정도를 지켜 왔기에… 브랜틀리는 떳떳했다.

‘어쩌면 리히테나워 대공 선정과 관련된 얘기를 하려는 걸지도 모르겠군.’

풍문에 의하면 에르나스가 동부에서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에 도달했다고 한다.

솔직히 브랜틀리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였다.

하지만 에르나스가 ‘검왕’ 가르디우스와 ‘검후’ 이사벨라에 이어 칼레온 이그니아스까지 직접 쓰러뜨렸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황궁은 에르나스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선정하기로 마음을 굳힌 건가?’

그동안 브랜틀리는 아들인 하인리히가 에르나스를 꺾는 걸 기다려 왔다.

에르나스가 하인리히보다 앞서 나가고 있긴 하지만, 언젠가 하인리히가 역전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리히테나워 대공을 선정해야 하기로 결정했다면… 황궁에서는 에르나스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뽑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다. 궁내부가 하던 얘기하고도 달라. 그렇다면…….’

리히테나워 대공을 빨리 뽑아야 할 이유.

그건 하나밖에 없다.

‘황제 폐하의 건강이 더 안 좋아지신 건가?’

만약 황제가 오늘내일 하는 상황이라면, 급히 리히테나워 대공을 선정해야 한다.

에르나스와 하인리히의 경쟁이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기다려 줄 여유가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겠군.’

다른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면 몰라도, 황제의 죽음이 다가왔기 때문이라면 브랜틀리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브랜틀리가 좀 더 뻔뻔한 인물이었다면 에르나스를 공격해 목숨을 빼앗는 것도 고려하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음……?”

그때 브랜틀리는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꼈다.

거대한 마력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감지한 것이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면서 갑옷 차림의 남녀 셋이 들어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아그리파 공작.”

“사피아스 경…….”

가장 먼저 브랜틀리에게 말을 걸어온 건, 철혈기사단의 수석 기사이자 단장인 사피아스였다.

“그리고… 마르타 경과 실리온드 경이군.”

사피아스의 좌측에는 붉은 머리의 중년 여성이 있었고, 우측에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있었다.

철혈기사단의 차석인 마르타, 3석인 실리온드였다.

즉… 철혈기사단을 대표하는 상위 실력자 세 명이 한곳에 모인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지? 철혈기사단에서 나한테 볼일이 있는 건가?”

“그 말은 적절치 않다, 아그리파 공작.”

사피아스가 브랜틀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지금 우리는 황제 폐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여기에 온 거니까.”

“뭐라고?”

브랜틀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황제 폐하의 뜻……?”

“미리 말해 두지만, 이건 궁내부조차 모르는 일이다. 극비 그 자체니까.”

“…….”

“그러니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줬으면 좋겠다. 이곳은 방음 설비가 되어 있는 방이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사피아스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등 뒤에 서 있는 마르타와 실리온드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를 불러들인 것 자체가 황제 폐하의 뜻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러면 아카데미의 대표들을 불러들인 것도 마찬가지겠군.”

“그래, 국무회의에 참석해서 소명하는 것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지.”

“…….”

브랜틀리는 입을 다문 채 사피아스를 노려봤다.

그러자… 사피아스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아그리파 공작… 아들인 하인리히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만들고 싶지 않나?”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꼭 확인해야 하는 부분이라 묻는 거다.”

사피아스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하인리히가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선정될 가능성은 낮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하지만… 당신 하기에 따라서는 하인리히가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임명될 수도 있지.”

“뭐라고?”

브랜틀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인리히 아그리파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임명하실 수도 있다는 얘기다. 궁내부를 거치지 않고, 직권으로.”

“……!”

황제가 직접 하인리히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임명한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사피아스 경, 그게 무슨…….”

“물론, 조건은 있다.”

“조건이라고?”

“그래, 사실… 이 얘기를 꺼내기 위해 당신을 이곳에 부른 거지.”

그 순간.

브랜틀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브랜틀리 앞에는 절정급의 검사가 세 명 있다.

검을 몰수당한 브랜틀리와는 달리, 세 명 다 진은(眞銀)으로 만든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수명이 얼마 안 남으셨다. 어떤 치료도 소용없는 상황이지.”

“사피아스 경…….”

“하지만… 황제 폐하의 수명을 연장할 방법이 딱 하나 존재한다.”

브랜틀리는 확실히 이해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건… 협박이다.

“브랜틀리 아그리파, 당신의 육체를 제공해 줬으면 좋겠다. 황제 폐하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말이다.”

아들을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만들어 줄 테니, 네 목숨을 내놓아라.

최강의 철혈기사는 브랜틀리에게 그렇게 요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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