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145화 (144/212)

145화 입궁 요청 (2)

이그니아스 가문의 항복을 받아 낸 뒤.

우리는 한곳에 모여 향후 방침을 의논했다.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유스트 바스티안 후작, 그동안 계속 후방 지원을 해 준 올레아나 클라리온 후작도 함께였다.

“그러면… 동부를 안정시키는 건 유스트 님과 올레아나 님에게 맡기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발렌티아노 교수님.”

“저희가 해야 할 일이죠.”

발렌티아노의 부탁에 유스트와 올레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그동안 동부의 반(反)이그니아스 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이그니아스 가문이 무너진 이상, 그들에게 동부 재편을 맡기는 게 자연스러웠다.

“유스트 님, 올레아나 님.”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당부했다.

“이그니아스 측에 붙었던 가문들에게 지나친 보복을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에르나스 님은 꽤나 상냥하시군요.”

“분란의 불씨를 남겨 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보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스트가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특히 저희 바스티안 가문은 정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단 말입니다.”

“그런 부분의 배상을 받는 것까지 막지는 않겠습니다. 깊은 원한이 남을 정도로 쥐어짜지 말아 달라는 말씀입니다.”

“흐음, 그런 거라면…….”

그때 곁에 있던 올레아나가 입을 열었다.

“에르나스 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동부 전체의 통합을 위해, 그런 부분은 최대한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올레아나 님.”

“…….”

유스트가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유스트는 상당히 계산적인 인간이다. 이번 기회에 바스티안 가문의 힘을 더 키울 생각이었겠지만… 올레아나가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세리느를 억지로 에르나스의 약혼자로 만들었던 인물이야. 방심해서는 안 돼.’

물론, 내 입장에서는 중요한 아군이다.

그래도 승리자 측에 섰다고 위세를 부리는 건 최대한 막고 싶었다.

“이그니아스 가문의 처우도, 임시 가주인 루퍼스와 충분한 소통을 거쳐서 결정했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에르나스 님.”

칼레온이 죽었으니, 이그니아스 가문을 이끌 권리는 루퍼스에게 있다.

다만 아직 나이가 어린 터라, 정식 가주가 되려면 절차가 더 필요했다.

안 그래도 동부 지역은 절차를 무척 중요시하는 터라… 루퍼스가 정식으로 가주 역할을 하려면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유스트가 이 부분을 파고들어 이그니아스 가문을 뜯어먹으려 하겠지만, 이것도 올레아나가 잘 견제해 줘야 한다.

“그러면… 이렇게 뒷일을 맡기고 우리는 동부를 떠나면 되겠군.”

발렌티아노 교수가 입을 열었다.

“황궁에서 호출이 있었으니 말일세.”

“황궁에서의 호출…….”

안겔라 교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 이 타이밍에 개입하는지 모르겠군요. 다 끝난 판에.”

“아니, 우리가 이그니아스 가문을 무너뜨리는 게 늦어졌으면 전쟁 도중에 개입했겠지.”

발렌티아노의 말이 맞다.

황궁에서의 사자가 도착한 건 이그니아스 가문과의 싸움이 끝난 직후다.

내가 루퍼스를 제압하여 항복을 얻어 내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황궁의 사자는 싸움을 중지하고 입궁(入宮)부터 하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면 상당히 곤란해졌겠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황궁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황궁 측의 요구대로라면…….”

발렌티아노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와 안겔라 교수, 자네와 하인리히 아그리파는 반드시 가야겠지.”

황궁에서는 두 명 이상의 지도 교수 그리고 리히테나워 대공 후보인 나와 하인리히를 불렀다.

“이그니아스 가문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칼레온과 루퍼스도 호출받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남부의 브랜틀리 아그리파도 호출을 받았겠죠.”

“…….”

하인리히의 아버지인 브랜틀리는 남부에 틀어박혀 조용히 내실을 다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황궁의 호출 요구에는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황제 폐하의 신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황궁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죠.”

“에르나스… 너는 황궁의 노림수가 뭐라고 생각하지?”

안겔라가 입을 열었다.

“이건 그동안 너하고 가까이 지내던 궁내부 쪽이 아니라, 아예 황실 쪽에서 부른 것 같던데.”

“정확한 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적어도 기본적인 점검 정도는 하려고 하겠죠.”

“점검?”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갈 검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려는 겁니다.”

“흐음…….”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중부 지역으로 우리 병력을 이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병력은 남부 쪽에서 대기하게 해야겠죠.”

“아그리파 가문을 견제하게 만들자는 얘기군.”

“네, 슈라이에르 가문에게 요청해 적절한 곳에 주둔하게 하면 될 겁니다.”

현재 슈라이에르 가문은 베리스리제가 이끌고 있다.

아카데미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요청하면 바로 주둔지를 내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그리파 가문이 군사 행동에 나서도 바로 대응할 수 있겠네.”

“물론, 전부 다 그쪽으로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몇 명 정도는 우리와 동행하게 해야겠죠.”

“그래, 우리 넷만 갈 수는 없으니 말이야.”

안겔라가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발렌티아노가 입을 열었다.

“굳이 전력을 갖추고 움직일 필요가 있나? 브랜틀리 아그리파가 황궁 근처에서 우리를 습격할 리도 없을 테고, 굳이 그래듀에이트 여러 명을 데리고 다니면서 황궁을 자극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발렌티아노 교수님, 그래도 만일의 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의 사태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건 우리가 걱정 안 해도 돼.”

발렌티아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궁에는 철혈기사단이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나서기도 전에 제압해 주겠지.”

* * *

철혈기사단.

그것은 황궁을 지키는 친위 부대의 이름이다.

현 시점의 제국에서 기사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건 철혈기사단밖에 없다.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를 지키는 친위 기사단인 만큼, 우수한 인력이 집결되어 있다.

“에르나스 님, 아카데미와 비교하자면 어느 쪽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단순 비교는 어렵지.”

슈미츠의 질문에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 나는 슈미츠뿐만 아니라 세리느, 클로에, 비올라와 함께 황궁에 가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듀에이트의 머릿수만 따지자면 아카데미가 우위에 있어. 하지만 철혈기사단은 그래듀에이트 상급 이상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종합적인 전력은 더 앞설지도 몰라.”

“그래듀에이트 상급 이상……!”

슈미츠가 놀라워하자, 옆에서 비올라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지금까지하고는 입장이 반대가 되는 거네요. 지금까지의 싸움에서는 항상 우리 아카데미 쪽이 소수 정예였는데, 이번에는 철혈기사단이 더 소수 정예니까.”

“비올라, 우리가 철혈기사단하고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런 식의 비교는 굳이 필요 없어요.”

세리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분들은 황제 폐하와 황궁을 지키는 친위 기사들이에요. 세속적인 싸움 같은 것하고는 거리가 머니까, 그런 얘기는 입에 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으윽… 슈미츠 님이 먼저 얘기를 꺼냈거든요.”

비올라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서 클로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철혈기사단이 있으니 별다른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죠. 브랜틀리 아그리파가 우리를 습격하고 싶어도 철혈기사단 때문에 엄두를 못 낼 거예요.”

“흑천마교가 중부 지역에 얼씬도 못 하는 것도 철혈기사단 때문이죠. 그러니 싸움이 벌어질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말한 뒤 세리느가 나를 쳐다봤다.

“에르나스, 아카데미 측에서도 특별히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잖아요?”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들도 그냥 조용히 넘어가기를 바랄 뿐이야.”

“그러니 우리 모두 엄숙한 기분으로 조용히 다녀오면 되는 거예요. 소란 피우지 말고.”

세리느 말대로, 조용히 다녀오는 게 최선이다.

대표인 발렌티아노가 나서서 그동안의 경위를 설명하고, 앞으로 제국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며 돌아오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평화롭게 넘어갈 리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 조용히 끝날 리가 없지.’

나는 소설 내용을 떠올렸다.

황궁의 호출을 받는 것도 소설 속에 나왔던 사건이다.

그때도 주인공인 아칸델이 교수들과 함께 황궁에 들어갔다.

‘문제는 소설하고 똑같이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야.’

소설의 아칸델도 세리느, 클로에, 슈미츠, 비올라를 데리고 갔었다.

하지만 함께 간 교수들은 전혀 달랐다.

게다가… 소설에서는 아직 이그니아스 가문이 몰락하지 않은 상태라, 칼레온과 루퍼스도 호출을 받았다.

‘이미 많은 게 달라졌어. 황궁에서의 사건도 소설하고는 다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자칫하면… 황궁에서 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으니까.

* * *

황궁에서 가장 깊은 곳.

지금은 대여섯 명 정도만 접근할 수 있는 은밀한 침실에, 노인 한 명이 누워 있었다.

누가 봐도 죽을 날이 머지않은, 병색이 완연한 노인이었다.

“황제 폐하.”

노인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는 갑옷 차림의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곳에 무장을 한 채 드나드는 걸 허락받은 유일한 사람… 철혈기사단장 사피아스였다.

“아카데미와 아그리파 가문에서 호출에 응했습니다. 조만간 황궁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

노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힘겹게 호흡을 하면서, 사피아스에게 눈짓을 했을 뿐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사피아스는 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이해했다.

“이그니아스 가문은 호출하지 않았습니다. 칼레온 이그니아스는 사망했고, 그 아들인 루퍼스 이그니아스는 무력합니다. 더 이상 리히테나워 대공 후보도 아니니, 호출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

“슈라이에르 가문의 베리스리제 슈라이에르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황궁에 불러들여 번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죠.”

사피아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러들이는 건 아카데미의 지도 교수들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리고 브랜틀리 아그리파와 하인리히 아그리파 정도입니다.”

“…….”

“리히테나워 대공에 가장 가까운 건 역시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입니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절정급에 도달한 상태이며, 검술명가의 가주를 세 명이나 쓰러뜨렸습니다.”

“…….”

“걱정 마십시오, 폐하.”

오랫동안 노인을 보필했기 때문에, 사피아스는 노인이 궁금해하는 것을 바로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에르나스가 황궁에서 검을 뽑아 역심(逆心)을 드러낼 일은 없습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철혈기사단이 전력을 다해 에르나스의 목을 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피아스는 미소를 지었다.

“저도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입니다. 에르나스가 대단한 재능을 지녔다고는 하나 아직 애송이입니다. 그런 애송이를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

사피아스도 에르나스가 검술명가의 가주들을 쓰러뜨린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피아스는 에르나스를 제압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건… 사피아스가 그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철혈기사단 최강의 검사로서, 사피아스는 에르나스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걱정 마시고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사피아스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들을 맞이해서 잘 살펴본 뒤, 바로 폐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

“네, 제가 두 눈을 부릅뜨고 똑똑히 살펴보겠습니다.”

노인의 간절한 눈빛 앞에서, 사피아스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가장 걸맞은 제물이 누구인지… 제가 정확히 판별해 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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