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입궁 요청 (1)
“2차 방어선이 무너졌습니다!”
“7번대 괴멸! 6번대 쪽도 진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파르데아 이그니아스 님이 전사했습니다……!”
이그니아스 가문의 지휘 본부는 시끄러웠다.
곳곳에서 부정적인 소식이 연달아 들어오고 있었다.
현재 이그니아스 가문은… 아카데미 측의 전면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중이었다.
“칼레온 님은 아직인가?!”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가주인 칼레온이었다.
이그니아스 가문의 최강 전력인 칼레온이 돌아와 준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칼레온은 나타나지 않았다.
“루퍼스 님……!”
그때 참모 한 명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주님은 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아카데미의 지도 교수들을 각개격파 하겠다고 나가시지 않았습니까?”
“…….”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루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용골의 마력을 흡수한 아버지가 출진한 지도 벌써 하루가 꼬박 지났다.
지금쯤이면 아카데미의 절정급 그래듀에이트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귀환했어야 하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다.
“전장에 발렌티아노 교수와 안겔라 교수가 멀쩡히 나와서 아군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후방에 페르디난드 교수의 모습도 보였다고 합니다.”
“…….”
“가주님은… 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따지는 듯한 참모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루퍼스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자, 다른 참모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루퍼스 님에게 무슨 말버릇인가!”
“하지만 가주님의 소식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대체 뭘 하고 계신지, 원……!”
“우리는 가주님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가주님이나 루퍼스 님을 비난하는 듯한 말투는 삼가라!”
“그래도……!”
그동안 이그니아스 가문은 가주인 칼레온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해 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와의 싸움에서 열세에 놓이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본진까지 무너질 상황이 되니… 그동안 칼레온에게 충성을 바치던 중진들까지 동요하고 있었다.
“혹시 가주님이 이미 쓰러지셨다면……!”
“어허, 어떻게 그런 말을……!”
“죽고 싶은 게냐!”
자기들끼리 다투기 시작한 중진들의 모습을 보면서, 루퍼스는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이그니아스 가문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바깥에서 병사가 뛰쳐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남쪽 11번대의 올테라 님이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올테라가 쓰러졌다고?!”
올테라 이그니아스는 그래듀에이트 상급으로, 이그니아스 가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다.
“아카데미 놈들의 별동대가 남쪽을 친 건가?”
“그것이…….”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병사가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을 때.
갑자기 엄청난 충격이 지휘 본부를 덮쳤다.
“아악!”
“이건……!”
루퍼스는 다급히 경신술을 사용해 솟구쳤다.
모든 게 무너진 지휘 본부에서 뛰어나가, 주위 상황을 살폈다.
“……!”
그리고 루퍼스는 깨달았다.
은백색 머리카락을 지닌 청년이 검을 들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에르나스……!”
“오랜만이군, 루퍼스.”
에르나스는 냉정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루퍼스는 올테라가 에르나스한테 당했다는 걸 눈치챘다.
남쪽에서 나타난 에르나스가 올테라를 쓰러뜨리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에,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어떻게 여기까지……!”
지휘 본부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다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에르나스가 검을 허공에 휘두른 순간,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악……!”
“아아악……!”
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새하얀 얼음의 단검이 수십 개씩 나타나 사람들을 꿰뚫었다.
절반은 치명상을 입었고, 나머지 절반도 전투력을 상실했다.
주위에서 달려오던 검사들조차 그 참상에 주춤했다.
“더 이상 덤벼들 사람은 없는 건가?”
“……!”
에르나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어도, 다들 뒷걸음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루퍼스는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앗……!”
그러던 도중, 루퍼스는 뒤늦게 깨달았다.
에르나스가… 붉은색 팔찌를 끼고 있다는 것을.
“아아……!”
틀림없었다.
아버지가 출진할 때 장착했던, 이그니아스 가문의 가보… 아티팩트 ‘니플가디르’였다.
그걸 에르나스가 갖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루퍼스는 빠르게 이해했다.
“크윽……!”
가문을 위해 마지막 싸움에 나섰던 아버지가 에르나스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루퍼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주저앉아 통곡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상… 루퍼스가 이그니아스 가문의 가주 역할을 해야 하니까.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루퍼스는 눈물을 삼키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이그니아스 염옥검술로 불꽃의 검기를 전개했다.
“덤벼라! 이그니아스 가문을 대표하여, 내가 너를 상대해 주겠다!”
“…….”
에르나스가 말없이 루퍼스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 눈빛은 결코 차갑지 않았다.
“좋다, 루퍼스.”
은색 검을 들고 에르나스가 자세를 잡았다.
“결투를 받아들이지.”
“결투……?”
“그래, 결투다.”
아카데미에서는 종종 결투가 이루어졌다.
학생들끼리 어떤 갈등이 생겼을 때, 검술 대결로 결판을 내는 것이다.
하지만 루퍼스는 이미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다. 이곳도 아카데미가 아니라 전장 한복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나스는 결투를 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네가 이긴다면, 나는 물러나겠다.”
“뭐……?”
물러나겠다?
이제 아카데미의 주요 전력인 에르나스가 물러나 준다고?
당혹스러워하는 루퍼스에게, 에르나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긴다면… 이그니아스 가문은 즉각 항복하도록 해라.”
“……!”
루퍼스는 숨을 삼켰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 조건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좋다, 에르나스.”
고개를 끄덕이면서, 루퍼스는 검을 치켜들었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다.”
“…….”
에르나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들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은 검을 들고 대치했다.
“하압……!”
먼저 움직인 건 루퍼스였다.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의 검기를 전개하면서, 경신술을 쓰며 에르나스에게 돌진했다.
전신전령(全身全靈)을 쏟아부은, 결사의 돌격이었다.
“……!”
하지만, 루퍼스의 돌격은 막혔다.
에르나스가 완벽한 자세로 방어했기 때문이다.
동부의 유명한 그래듀에이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완벽한 방어였다.
“정말로 대단하군…….”
루퍼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카데미에서 처음 맞붙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런데 에르나스는 어느새 너무 먼 곳까지 가 버렸다.
그 사실에 루퍼스는 원통함을 느꼈다.
“…….”
에르나스가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일격에 루퍼스의 검이 튕겨져 나갔고,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네 승리다, 에르나스…….”
비틀거리면서도, 루퍼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열었다.
“다들 들어라.”
주위 검사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루퍼스를 보고 있었다.
“이그니아스 가문은 지금 이 시간부터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아카데미에 항복한다. 위대한 그래듀에이트 칼레온 이그니아스의 후계자, 루퍼스 이그니아스의 명령이다…….”
“루퍼스 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검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루퍼스는 의식을 잃었다.
* * *
‘이걸로 이그니아스 가문과의 싸움도 끝났군.’
응급처치를 받는 루퍼스를 곁눈질하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에 루퍼스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봤으니… 이그니아스 가문의 검사들도 루퍼스를 차기 가주로 인정하겠지.’
사실 나는 루퍼스가 저항한다면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내 앞에서 검을 뽑는 루퍼스를 보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투를 제안한 뒤 생명에 지장이 없는 부상만 입힌 것이다.
‘루퍼스, 방금 전의 너는 이그니아스 가문의 차기 가주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었어.’
루퍼스는 결투를 받아들였고, 패배를 수용했다.
차기 가주다운 모습을 보여 줬으니, 이그니아스 가문의 검사들도 루퍼스를 따를 것이다.
남부에서 슈라이에르 가문을 제압했을 때보다 수월하게 전후 처리가 가능할 것 같았다.
“에르나스.”
그때 검은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부하들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왔다.
발렌티아노 교수와 함께 이그니아스 가문 본진을 공략하고 있었던 안겔라 교수였다.
“이그니아스 가문의 병사들이 왜 갑자기 백기를 드는지 궁금했는데… 네가 도착한 거였군.”
“빨리 마무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욜스 교수의 별동대를 도우러 갔던 네가, 이렇게 돌아와서 이그니아스 가문 수뇌부를 제압했다는 건…….”
안겔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칼레온 이그니아스를 쓰러뜨린 모양이구나.”
“네, 제가 쓰러뜨렸습니다.”
“후후, 너는 정말로 대단한 녀석이야.”
그렇게 말하며 안겔라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미하일 발트펠트와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에 이어 칼레온 이그니아스까지 쓰러뜨리다니… 나머지 검술명가의 가주들도 전부 다 네가 쓰러뜨리게 되는 거 아냐?”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헨리 랭커스터는 이미 칼레온 이그니아스가 쓰러뜨렸죠. 나머지 둘 중 한 명은… 제 아버지고 말입니다.”
“글쎄,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
안겔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 직감적으로 뭔가를 느낀 걸까.
“어쨌든 네 덕분에 빨리 항복을 얻어 내서 다행이야. 이미 승기를 잡은 상태였지만, 이그니아스 가문이 철저히 항전한다면 우리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그렇죠.”
이걸로 동부에서의 전쟁은 일단락되었지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그니아스 가문과의 싸움이 길게 이어지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다.
“별동대 쪽에서는 욜스 교수님이 큰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래?”
“한동안 전선에 복귀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페르디난드 교수님도… 한동안 요양이 필요하신 상태죠.”
페르디난드도 ‘검왕’ 가르디우스와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이 회복되지 않았다.
그동안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이그니아스 가문과의 싸움에 참가하고 있었지만… 이제 이그니아스 가문도 항복했고, 슬슬 제대로 요양을 할 때가 되었다.
“그러니 지도 교수급은 안겔라 교수님과 발렌티아노 교수님 정도가 됩니다. 알드바우트 학장님은 아카데미에 머무르셔야 하고… 한동안 전력이 부실한 상태가 지속될 겁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있는데 전력이 부실하다고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안겔라가 피식 웃었다.
“남부에서 아그리파 가문이 움직이더라도 우리가 대처하면 충분해. 브랜틀리 아그리파는 위협적인 존재지만, 우리 쪽에는 절정급 그래듀에이트가 여러 명 있으니까.”
원래 남부에는 세 명의 절정급이 있었다.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와 살바토레 아틸리온은 내 손으로 쓰러뜨렸으니, 브랜틀리 아그리파 한 사람만 남았다.
“아그리파 가문이 문제가 아닙니다.”
“흐음… 다른 곳이 더 신경 쓰이나 보지?”
그렇게 말하며 안겔라가 동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여기서 더 동쪽으로 가면 바다가 펼쳐진다.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이 머무르고 있는 영묘도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에르나스, 혹시 너희 가문하고…….”
“반대편입니다, 교수님.”
“뭐?”
나는 안겔라와 반대로 서쪽을 쳐다봤다.
“이제 슬슬… 저쪽도 움직임을 보일 테니까요.”
* * *
“후우…….”
하인리히는 나무 밑동에 걸터앉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주위에서는 별동대 교수들이 유스트 바스티안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그니아스 가문의 추격을 피해 숨어 있다가 이제야 기어나온 것 같았다.
‘세리느 바스티안도 표정이 밝아졌군.’
아버지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세리느를 곁눈질하며, 하인리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원래 하인리히는 다른 사람 표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요새는 조금 변했다.
‘에르나스 곁에서 알짱거리는 여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강단이 있었어.’
하인리히는 칼레온과의 싸움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세리느, 클로에가 함께 칼레온을 협공했지만, 결국 칼레온을 쓰러뜨린 건 에르나스였다.
‘에르나스 녀석… 내가 기절해 있는 사이에 칼레온을 쓰러뜨리다니.’
솔직히 아쉬웠다.
에르나스가 칼레온을 어떻게 쓰러뜨리는지 직접 지켜봤다면,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테니까.
에르나스를 따라잡고 싶은 하인리히 입장에서는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어쨌든… 지금쯤 에르나스가 이그니아스 본진에 도달했겠군.’
에르나스는 욜스 교수가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진 걸 확인한 뒤 곧바로 이그니아스 가문의 본진으로 향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금방 항복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걸로 슈라이에르 가문에 이어 이그니아스 가문도 무너진 건가.’
이제 아카데미와 맞붙을 수 있는 세력은 아그리파 가문만이 남게 되었다.
과연 아그리파 가문은 아카데미와 싸우게 될까.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실까.’
하인리히는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계속 싸워 왔다.
경쟁을 포기한 고르트나 베리스리제, 루퍼스는 일찌감치 아카데미를 떠났지만, 하인리히만은 계속 남아서 묵묵히 싸워 왔다.
하지만 아카데미가 아그리파 가문과 싸우게 되면… 하인리히는 어떻게 해야 할까.
“……?”
그때 하인리히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정찰을 나갔던 클로에가 다급히 돌아오고 있었다.
“클로에 유스부르크, 무슨 일이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하인리히가 묻자, 클로에가 긴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쪽으로 사자(使者)가 오고 있어요.”
“사자?”
어디서 사람을 보낸 걸까.
혹시 아그리파 가문 쪽일까.
“놀라지 마세요, 하인리히 님.”
클로에의 목소리는 평소답지 않게 딱딱했다.
“황궁에서 온 사자예요. 아카데미 측에 입궁(入宮)을 요구하려는 것 같아요.”
“……!”
황궁.
중부 지역에 위치한, 제국의 심장부.
병석에 누워 있는 황제, 그리고 차기 황제가 될 황녀가 있는 곳.
그동안의 전란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그곳에서… 침묵을 깨고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