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백화의 검 (1)
불타는 숲속.
그곳에 착지한 나는 주위를 살펴봤다.
하인리히와 세리느, 클로에는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다행히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정신을 잃고 있는 욜스가 문제였는데, 상당한 중상을 입은 것 같았다.
“에르나스…….”
하인리히가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본대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니었나?”
“아무래도 내가 직접 달려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뭐라고?”
“칼레온 이그니아스가 별동대부터 각개격파 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원래 각개격파는 원래 우리가 즐겨 쓰던 작전이다.
병력이 부족한 아카데미는 강력한 그래듀에이트를 내세워 적들을 각개격파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칼레온은 그동안 아카데미 교수로 있었고, 이곳 동부 전역에서도 아카데미의 각개격파 전술에 큰 피해를 입었다.
칼레온도 각개격파 전술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사실 확신은 없었어. 도박 같은 거였는데, 다행히 맞아떨어졌군.”
“에르나스, 너…….”
하인리히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고 세리느와 클로에에게 시선을 향했다.
“세리느, 클로에, 일어설 수 있겠나?”
“네, 에르나스…….”
“괜찮아요.”
세리느와 클로에가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섰다.
그녀들의 몸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금 여유가 별로 없어.”
그렇게 말하며 나는 욜스에게 시선을 향했다.
“욜스 교수님을 데리고 가.”
“에르나스, 하지만…….”
“부탁할게.”
“…….”
세리느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클로에가 세리느의 팔을 잡아당겼다.
“세리느 님, 가죠.”
“클로에…….”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에르나스 님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이것 정도예요.”
“알겠어요.”
결국 클로에가 욜스를 안아 들었고, 세리느는 검을 든 채 그녀 옆을 지키며 자리를 떴다.
“조심해요, 에르나스.”
떠나기 전, 세리느는 나를 쳐다보며 간절한 목소리를 남겼다.
마음만 같아서는 나하고 함께 싸우고 싶었을 것이다.
“적절한 판단이다, 에르나스.”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며, 하인리히가 입을 열었다.
“녀석들이 있어 봤자 걸리적거리기만 하겠지.”
“착각하지 마, 하인리히.”
“뭐라고?”
“네가 내 말을 잘 들을 것 같았으면, 너한테도 여기서 도망치라는 말을 했을 거야.”
“네놈……!”
하인리히한테 여기서 도망치라고 말해 봤자, 들어 처먹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건방지군, 에르나스! 너란 녀석은 정말……!”
“나중에 얘기해.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니까.”
“에르나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자, 가만히 지켜보던 칼레온이 입을 열었다.
“서로 사이가 좋군, 에르나스, 하인리히.”
“그렇지 않은데.”
“오해다!”
나와 하인리히가 반발하는 모습을 보면서 칼레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카데미 교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드는군.”
“칼레온.”
“너희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복잡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시절도 있었지. 어떻게 해야 루퍼스가 너희를 따라잡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고민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렇게 말하고 칼레온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참 평화로웠지.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희를 제거해 두는 거였는데 말이다.”
칼레온이 그때 직접 손을 썼다면 대항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하인리히도 그렇고, 아직 미숙하던 시절이니까.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지, 칼레온 이그니아스.”
나는 칼레온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그니아스 가문의 가주이자 아카데미의 지도 교수로서, 당신은 모든 것을 최대한 정정당당하게 진행하려 했어. 비겁한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려고 하거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술수를 부리는 일도 없었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카데미에서 비교적 마음 편히 생활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의 지도 교수인 칼레온이 거리낌 없이 교활한 짓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언제 습격당할지 몰라 두려워하며 노이로제에 걸렸을 것이다.
“랭커스터 가문에서 나한테 비겁한 짓을 했을 때는 진지하게 분노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서 줬지. 나는 당신의 그런 모습을 좋게 생각했어.”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칼레온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과거형으로 말하는 걸 보면, 지금은 아니라는 얘기겠지.”
“그래, 칼레온 이그니아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퍼스가 나와 하인리히에게 못 미친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고 아카데미에 계속 남아 소임을 다했다면, 나는 당신을 계속 인정했을 거야.”
“…….”
“자기 아들이 경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 판을 깨 버리고 무력으로 승리를 쟁취하려 하고 있지. 이제 당신은… 클라우비체와 별다를 바 없는 남자가 되어 버렸어.”
물론, 어쩔 수 없었던 측면은 있다.
칼레온보다 먼저 다른 가문의 가주들이 판을 깨기 시작했으니까.
“당신은 이제 그냥 권력을 탐하는 평범한 남자로 전락해 버린 상태야. 존경할 만한 가치가 없지.”
“인정하지, 에르나스…….”
칼레온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대로, 나는 그동안 지켜 온 원칙을 버렸다. 권력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뒤엎어 버렸지.”
“…….”
“하지만… 나는 이그니아스 가문의 가주다.”
그렇게 말하며 칼레온이 나를 노려봤다.
“가문의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걸 위해서라면, 개인적 긍지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이그니아스 가문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칼레온은 자신이 지켜 온 긍지까지 버리고 지금 이곳에 있다.
“루퍼스에게 줄 예정이었던 용골의 마력을 스스로 차지한 것도, 그것 때문인가?”
“그것까지 꿰뚫어 본 건가? 대단하군.”
칼레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현재 이그니아스 가문은 승리가 절실하다. 아들을 위해 준비했던 영약을 빼앗아서라도, 너희들을 반드시 꺾어야만 했다.”
“…….”
“그러니… 에르나스.”
나를 노려보면서, 칼레온이 검을 치켜들었다.
“네가 이렇게 직접 달려와 준 건, 나한테는 반가운 일이다. 마력이 소모되기 전에 너를 해치워 두고 싶었으니까.”
“에르나스……!”
내 옆에서 하인리히가 다급히 소리쳤다.
“칼레온은 막대한 마력으로 마치 드래곤 브레스 같은 염검술(炎劍術)을 사용한다! 게다가 마력을 회수하는 아티팩트를…….”
“알고 있으니 설명 안 해도 돼, 하인리히.”
그 직후.
칼레온의 검에서 격렬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나와 하인리히는 양방향으로 흩어지면서 그 공격을 피했다.
‘역시 하인리히는 움직임이 빠르군. 다른 사람이면 화염에 휩쓸렸을 거야.’
하인리히는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한 상태였다.
안 그래도 하인리히는 예전부터 스피드만큼은 한 단계 높은 경지의 상대와도 맞먹을 정도로 뛰어났다.
회피에만 집중한다면 칼레온의 화염에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야.’
칼레온은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의 수준을 초월한 힘을 보여 주고 있다.
아직 절정급에 도달하지 못한 하인리히의 기량으로는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없다.
계속해서 도망만 다니다가 체력과 마력이 고갈되어 쓰러지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칼레온은 니플가디르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아티팩트 ‘니플가디르’.
칼레온의 선조인 염옥공(炎獄公)… 초대 이그니아스 공작이 사용했던 아티팩트다.
주위의 마력을 재흡수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칼레온은 마음껏 고화력의 불꽃을 뿜어 댈 수 있다.
그러니 도망 다니면서 시간을 끌어 봤자 칼레온의 마력을 고갈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칼레온의 공격을 피하면서 하인리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하인리히에게 말을 건넸다.
“하인리히, 부탁할 게 있어.”
“부탁?”
필사적으로 공격을 피하던 하인리히가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을 끌어 줬으면 해.”
“시간을……?”
“네가 시간을 끌어 준다면, 칼레온에게 반격할 수 있어.”
“……!”
그동안 나는 칼레온을 꺾기 위한 수단을 준비해 왔다.
현재의 칼레온은 평범하게 싸워서는 이길 수 없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아직 100% 완성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가 시간을 끌어 줄 필요가 있었다.
“부탁한다, 하인리히.”
“…….”
내 목소리를 들으며, 하인리히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보였다.
* * *
“알겠다.”
짧게 대답한 뒤, 하인리히는 앞쪽으로 몸을 날렸다.
맹렬한 화염이 덮쳐 왔지만, 검기를 휘둘러 그 틈을 파고들었다.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지금은 너한테 의지하는 수밖에 없겠지.’
직접 마주치니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에르나스는 현재의 자신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오른 상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르나스를 따라잡는 걸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지금 에르나스가 더 강하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칼레온 이그니아스를 꺾으려면 네 힘이 필요하다.’
하인리히는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다.
그렇기에 에르나스를 위해 시간을 버는 역할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하인리히는 칼레온이라는 강대한 적 앞에 서 있다.
자력으로 칼레온을 쓰러뜨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이상… 에르나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에르나스, 그러니… 나한테 보여 다오.’
전력을 다해 마력을 끌어올리며, 타오르는 불꽃을 돌파한다.
그렇게 칼레온에게 접근하면서 하인리히는 검을 치켜들었다.
‘네가 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걸, 눈앞에서 보여 달란 말이다!’
쿠쿵!
팔을 스친 화염이 호신기를 불태웠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면서, 하인리히는 포효했다.
“칼레온 이그니아스! 내가 상대해 주마!”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군!”
칼레온은 주위에 막대한 화염을 전개한 상태로 검을 치켜들었다.
어딘가에 있을 에르나스를 화염으로 견제하면서, 가까이 접근해 오는 하인리히를 직접 검으로 베어 버리려 하는 것이다.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했나!”
“윽……!”
쿠웅!
검과 검이 부딪친 순간, 하인리히는 뒤로 밀려 나갔다.
“순수한 검사로서의 역량도, 너는 나한테 못 미친단 말이다!”
“……!”
콰앙!
칼레온의 날카로운 검격(劍擊)이 하인리히를 덮쳤다.
가까스로 막아 내기는 했지만, 충격이 너무 심했다.
손목의 통증이 심해서 순간적으로 검을 놓칠 뻔했다.
“얕보지 마라……!”
목소리를 높이면서 칼레온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불꽃이 스치면서 피부 곳곳에 화상이 생겼다. 하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연속 공격을 펼쳤다.
“하아압……!”
콰콰콰쾅!
아그리파 절검술을 대표하는 초고속의 4연격, 더 크럭스가 펼쳐졌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칼레온에게 완벽하게 막혔다.
“네 기술 따위는 이미 완전히 간파했다!”
“큭……!”
촤악!
호신기를 뚫고 파고들어 온 칼날이, 하인리히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피부가 찢기면서 속살이 불타는 감각에 하인리히는 처절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면서 버텼다.
“……?!”
몸을 빼지 않는 하인리히의 모습에 칼레온이 흠칫 놀랐다.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걸 느끼며, 하인리히는 혼신의 반격을 날렸다.
푸른 번개에 휩싸인 마지막 일격을.
“이건……!”
그것은 최근에 욜스 교수를 통해 습득한,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의 검기였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칼레온의 허를 찌르기에는 충분했다.
푸른 번개의 검기가 자신의 목을 노리는 걸 깨닫고, 칼레온은 다급히 몸을 비틀었다.
“윽……!”
파앗!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의 검기가 칼레온의 이마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상처는 깊지 않았으나, 피가 흘러나와 칼레온의 얼굴 반쪽을 적셨다.
“크윽…….”
역시 지금 실력으로는 칼레온에게 제대로 된 상처를 입히는 건 불가능한 건가.
하인리히는 무력감을 느끼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미 하인리히는 완전히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하인리히, 네놈…….”
칼레온이 눈을 크게 뜨고 하인리히를 내려다봤다.
자신의 예상을 초월한 하인리히에게 놀라움을 느낀 것이다.
그 반응에 하인리히는 만족감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에르나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 하인리히는 마음속으로 에르나스에게 말을 건넸다.
‘이쯤 버텨 줬으니… 이제 준비는 다 됐겠지?’
숨통을 끊기 위해 검을 치켜드는 칼레온 앞에서, 하인리히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목격했다.
“……!”
쿠쿵!
숲을 뒤덮고 있던 화염이 반으로 쪼개졌다.
흠칫 놀란 칼레온이 고개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뭐냐……!”
불꽃 사이로 새하얀 것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것은 하얀 용 같기도 했고, 뱀 같기도 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비늘처럼 작은 칼날의 집합체였다.
차가운 얼음의 칼날이 마치 사복검(蛇腹劍)의 칼날처럼 춤추면서 불꽃을 가르고 있었다.
“에르나스, 대체 무엇을……!”
칼레온이 당혹스러워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인가? 아니, 페르디난드 교수도 이런 기술은 쓰지 못했다! 이건 대체……!”
“아니, 이건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이 맞다.”
불꽃을 가르는 얼음의 사복검 너머에서, 에르나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페르디난드 교수는 쓰지 못하는… 내가 직접 창조한 기술이지.”
“뭐, 뭐라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얼음의 칼날을 녹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불꽃을 구성하는 마력이 냉기에 얼어붙어… 칼날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절세검술인 케르베스트 백화검술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소리인가?!”
“그래, 칼레온 이그니아스.”
칼레온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으며 하인리히는 만족감을 느꼈다.
역시 에르나스는… 자신이 이정표로 삼기에 충분한, 진짜 검술 천재다.
“이것이 바로… 백화검린(白華劍鱗)이다.”
뒷일을 부탁한다, 에르나스.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하인리히는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