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염옥의 검 (3)
이 세계에서 드래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엘더 드래곤과 레서 드래곤이다.
서부 지역에서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드래곤은 레서 드래곤이다.
일반적인 몬스터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이 쓰러뜨릴 수 없는 적은 아니다.
절정급 혹은 상급의 그래듀에이트 여러 명이 달려들면 쓰러뜨릴 수 있다.
예전에 욜스가 혼자 힘으로 쓰러뜨린 드래곤도 이런 레서 드래곤이었다.
한편 엘더 드래곤은 먼 옛날에 멸종한 고대룡(古代龍)이다.
레서 드래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녔으며, 지능도 인간보다 더 뛰어나다.
가장 큰 특징은 막강한 마력을 사용한 원거리 공격 ‘브레스’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만… 천 년 전의 철혈검제와 그 측근들은 엘더 드래곤과의 혈전을 거쳐 그들을 모두 멸종시켰다고 한다.
현재 제국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용골은 레서 드래곤의 뼈다.
하지만 엘더 드래곤의 용골도 이 세상에 남아 있긴 하다.
동부의 베르디에 후작 가문에서는 대대로 엘더 드래곤의 용골을 가보로 간직해 왔다.
훗날 가문에서 일세를 풍미할 만한 검사가 탄생했을 때 용골의 기운을 흡수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동안 한 번도 그런 검사가 나타난 적이 없어서, 그냥 고이 간직해 왔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엘더 드래곤의 용골을 이그니아스 가문이 강탈했다.
원래는 후계자인 루퍼스에게 주기 위한 것이었다.
용골의 기운은 너무 격렬해서 일반적인 그래듀에이트는 흡수하지 못하지만, 이그니아스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비전(祕傳) 연공법이라면 흡수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위협이 심각해지자 칼레온이 직접 그 힘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칼레온은 이미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상태다.
용골의 마력을 흡수해 봤자 마나 하트에 정착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연공법이라면 며칠 정도는 몸 안에 머물게 할 수 있다.
그 마력을 사용하면…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의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위대하신 염옥공(炎獄公)이시여.’
철혈검제를 보좌했던 초대 이그니아스 공작을 떠올리며, 칼레온은 전신의 마력을 활성화했다.
엘더 드래곤의 용골에서 얻어 낸 막대한 마력이 혈맥 안에서 끓어오르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신의 위업을… 못난 후손이 재현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저 멀리 욜스 교수가 부하들을 후퇴시킨 뒤 홀로 뛰쳐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때 동료였던 사람이지만, 지금 칼레온에게는 쓰러뜨려야 할 적일 뿐이다.
칼레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력을 해방했다.
‘이그니아스 염옥검술 결전절기(決戰絶技)… 디 인페르노!’
콰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막대한 불꽃이 방출되었다.
기술의 원리 자체는 단순하다.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의 특징인 불꽃의 검기를, 막대한 마력을 활용해 최대 화력으로 펼칠 뿐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을 불태울 듯한, 고대 화룡의 브레스 같은 불꽃을 뿜을 수 있다.
드래곤 수준의 마력만 갖고 있다면 말이다.
“크윽!”
칼레온은 입에서 피를 토했다.
마력은 충분했지만, 그래듀에이트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탓이었다.
전신의 혈맥이 터질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칼레온은 눈을 부릅떴다.
“오오……!”
그야말로 불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울창한 숲이 완전히 불타고 있는 상태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엄청난 광경이어서, 칼레온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그 중심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불길에 휩싸이지 않은 곳이 있었던 것이다.
아까 욜스가 달려 나오던 곳이었다.
“설마…….”
칼레온은 경신술을 사용해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온몸이 그을린 채 쓰러져 있는 욜스의 모습을 발견했다.
“…….”
주위를 둘러보고, 칼레온은 욜스가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라투시아 도룡검술을 사용해 아군을 지킨 것이다.
원래 그라투시아 도룡검술은 드래곤 같은 거대한 존재를 상대하기 위한 검술이다.
드래곤 브레스를 막는 기술도 있는 모양이었다.
“대단하군, 욜스 교수.”
칼레온은 순수한 찬사를 보냈다.
방금 전, 칼레온이 펼친 디 인페르노는 욜스의 별동대 전체를 전멸시키고도 남을 화력이었다.
하지만 욜스가 앞으로 나서서 목숨 걸고 방어하여, 별동대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 보답으로… 지금 도망치고 있는 당신의 부하들은 쫓지 않도록 하지.”
어차피 잔챙이들은 칼레온의 상대가 아니다.
칼레온이 쓰러뜨려야 하는 건 어디까지나 아카데미의 절정급 검사들뿐이니까.
절정급만 해치울 수 있다면, 병력이 더 많은 이그니아스 가문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
“그 대신 당신의 목숨은 가져가겠다.”
쓰러져 있는 욜스의 목을 베기 위해, 칼레온이 검을 치켜들었다.
동료였던 교수의 목을 치는 거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어차피 목숨을 건진다고 해도 전신 화상 때문에 검사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빨리 죽여 주는 편이 더 자비로운 일일 터.
“작별이다, 욜스 교수.”
그렇게 말하며 칼레온이 검을 내리치려 한 순간.
배후에서 바람처럼 달려든 그림자가 있었다.
“……!”
콰앙!
검이 부딪치면서 굉음이 발생했다.
가까스로 기습을 막아 낸 칼레온은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하인리히 아그리파……!”
“오랜만이군, 칼레온 이그니아스!”
푸른 머리를 휘날리며, 하인리히가 칼레온을 향해 아그리파 절검술을 펼쳤다.
“도망치지 않았던 건가……!”
“당신을 해치울 기회인데, 도망칠 리가 있나!”
허를 찔린 칼레온을 향해 하인리히가 자세를 잡았다.
아그리파 절검술의 대표적 기술인 ‘더 크럭스’였다.
“으윽!”
콰콰콰쾅!
폭풍 같은 4연격이 칼레온을 덮쳤다.
전부 막아 내긴 했지만, 칼레온은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하인리히의 실력은 칼레온이 알던 것보다 훨씬 향상되어 있었다.
“하인리히, 네 녀석…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한 건가!”
이제 보니 키도 커지고 체형도 변했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이 되어 환골탈태를 경험했다는 증거였다.
“어떻게 벌써……!”
“네 못난 아들하고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칼레온!”
“으읍……!”
아들인 루퍼스가 모욕당했다.
그 사실에 분노하면서 칼레온은 검을 휘둘렀다.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의 검기로 하인리히를 불태워 죽이려 한 순간.
“하압!”
“……!”
사각에서 튀어나온 여자의 기합 소리가 칼레온의 허를 찔렀다.
갈색 머리카락 여학생의 공격을 막아 내며 칼레온은 눈을 크게 떴다.
“세리느 바스티안?!”
파앙!
방금 전의 하인리히보다는 못하지만, 충분히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그 직후, 칼레온은 배후에서 섬뜩한 기척을 느꼈다.
“흐읍……!”
꽈앙!
거칠게 몸을 비틀며, 배후에서 날아온 검을 튕겨 냈다.
“이 비검술(飛劍術)… 클로에 유스부르크인가!”
“역시 칼레온 님에게는 통하지 않는군요.”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클로에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이런…….”
하인리히, 세리느, 클로에.
칼레온은 세 명의 학생에게 포위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끼어들지 마라.”
그때 세리느와 클로에를 쳐다보며 하인리히가 차갑게 내뱉었다.
“칼레온은 내가 잡는다. 너희는 욜스 교수님의 지시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망쳐.”
“그럴 수는 없죠.”
세리느가 냉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신이 혼자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걸 목격했는데, 무시할 수는 없었다고요.”
“웃기지 마라. 애초에 너는…….”
“그리고 이 사람은 저희 바스티안 가문을 유린한 원수예요.”
“…….”
“그러니 도망칠 수는 없어요.”
“쯧, 마음대로 해라.”
세리느의 단호한 목소리에 하인리히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가장 인상을 찌푸린 건 칼레온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에르나스도 아니고, 고작 너희들 따위가 나를 가로막는 건가.”
칼레온은 분노를 느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칼레온과 그들은 교수와 학생의 관계였다.
그들에게 얕잡혀 보일 만한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저 정도로 기어오르는 걸까.
“특히 하인리히…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했다고 해서,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하인리히가 코웃음을 쳤다.
“미하일 발트펠트가 그래듀에이트 상급이었던 에르나스에게 당한 걸 잊었나 보군.”
“그건…….”
“나도 멍청이가 아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서 나선 거니까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하인리히가 세리느와 클로에를 힐끔 쳐다봤다.
“저 녀석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
세리느와 클로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레온 이그니아스, 방금 전의 화염 공격은 확실히 대단했다.”
하인리히가 칼레온을 노려보며 말했다.
“정말로 드래곤의 브레스 같더군. 그게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의 결전절기인가?”
“용케 알고 있군. 네 아버지한테서 들었나?”
“아마 당신도 실전에서 쓰는 건 처음이었겠지.”
“…….”
“그래서 범위 조절을 잘 못했다.”
그렇게 말하며 하인리히가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숲속은 온통 불바다였다.
“마력을 너무 많이 쓴 것 아닌가? 이렇게 하면 마나 하트가 텅텅 비게 될 텐데.”
“나를 너무 우습게 아는군. 지금 내 검기를 경험해 봤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과장해서 미안하군. 그래도 어쨌든 마력이 많이 소모되었겠지.”
“…….”
“다시 회수할 수 있는 검기의 마력과는 다를 거다. 저렇게 활활 타고 있는 화염에서 마력을 재흡수한다는 건 불가능해.”
하인리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게 마력을 잃은 당신이라면 내 힘으로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지. 방금 전에 몇 번 공격을 주고받으면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여전히 오만방자하군, 하인리히…….”
칼레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네 지적은 맞다. 지금 나는 마력을 많이 소비한 상태지.”
방금 전의 화염은 막대한 마력을 방출하여 만든 것이다.
당연히 그만큼의 마력이 칼레온의 몸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하지만… 나를 너무 바보 취급 하는 것 아닌가?”
비슷한 생각을 갖고 덤벼들었을 세리느와 클로에도 힐끔 쳐다본 뒤, 칼레온은 왼손을 치켜들었다.
“내가 고작 한 번뿐인 공격을 날리기 위해 이 영역에 진입했다고 생각하나?”
“뭐라고?”
칼레온의 왼쪽 손목에 채워져 있던 팔찌가 갑자기 빛났다.
그러자 숲을 불태우고 있던 화염이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뭐지?”
“이건……!”
하인리히와 세리느가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칼레온 님, 설마…….”
나무 위에 있던 클로에가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방출한 마력을… 회수하는 아이템을 갖고 있는 건가요?”
“아티팩트라는 것이다, 클로에 유스부르크.”
아티팩트.
그 단어를 듣고 하인리히가 눈을 크게 떴다.
“아티팩트라고? 설마……!”
“그래, 네 아버지도 아티팩트를 하나 갖고 있을 거다.”
경악하는 하인리히를 보면서, 칼레온이 미소 지었다.
“이그니아스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아티팩트 ‘니플가디르’… 주위에 흩어진 마력을 재흡수하여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궁극의 아티팩트다.”
“……!”
“내 조상인 염옥공께서는 이 아티팩트의 힘으로 초고화력의 절기를 무한히 연발하셨다더군.”
하인리히, 세리느, 클로에가 다급히 거리를 벌리는 모습이 보였다.
칼레온은 상관하지 않고 검을 치켜들었다.
재흡수한 마력을 사용해, 가볍게 화염의 검기를 펼쳤다.
불타오르는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크윽!”
“아악!”
“……!”
세 사람이 불꽃의 검기에 휘말리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칼레온은 앞으로 걸어갔다.
“걱정하지 마라. 나도 동부 검술명가의 가주다. 용기 있게 나한테 도전한 너희들을 존중해 줄 것이다.”
“카, 칼레온……!”
“고통스럽게 불타 죽게 하지는 않겠다. 내 검으로 한 명씩 숨통을 끊어 주마.”
그렇게 말하면서 칼레온은 가장 먼저 하인리히에게 다가갔다.
“너도 루퍼스의 미래에 방해가 될 녀석이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크윽……!”
하인리히가 반격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칼레온은 하인리히의 검을 날려 버린 뒤, 천천히 검을 치켜들었다.
“작별이다, 하인리히.”
“칼레온……!”
마지막까지 투지를 잃지 않은 하인리히가 칼레온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에 내심 감탄하면서, 칼레온이 검을 내리치려던 순간.
“음……?!”
콰쾅!
은색 칼 한 자루가 벼락처럼 날아와 칼레온의 목을 노렸다.
칼레온은 다급히 검을 쳐 냈지만, 그 직후 검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 차가운 기운은……?!”
칼레온은 경악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기운이 주위의 화염을 상쇄해 주고 있었다.
“이건……!”
검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무서운 속도의 경신술로 이쪽에 접근하는 청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차가운 기운은 페르디난드 교수의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의 힘이다.
그런데 왜 저 녀석이 그 힘을 쓴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쿠웅!
굉음과 함께, 은백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착지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하인리히도 세리느도 클로에도 경악했다.
“네, 네놈, 어떻게…….”
“다행히 도박에 성공했군.”
정신을 잃고 있는 욜스의 모습을 확인한 뒤, 청년은 칼레온에게 시선을 향했다.
“역시 별동대부터 각개격파 하기로 마음먹었던 건가, 칼레온 이그니아스.”
“에르나스, 네놈이 왜 여기에……!”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카데미 본대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을 그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났다.
얼음 같은 냉기의 검과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