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염옥의 검 (2)
이그니아스 가문이 점거한 작은 성채.
그곳은 바람처럼 움직이는 푸른 머리의 청년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었다.
“하, 하인리히 아그리파다!”
“어떻게든 막아라……!”
파파팟!
질풍 같은 하인리히의 돌진에 성벽 위가 피로 물들었다.
“하, 하인리히 님! 접니다! 청색 2반에서 하인리히 님 밑에 있었던… 크헉!”
성벽 위에는 아카데미에서 하인리히와 동급생이었던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다는 건 칼레온 파벌에 몸을 담아 이그니아스 가문의 협력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인리히가 손속에 사정을 둘 이유가 없었다.
“하인리히 님, 우측에 지휘관이 있습니다!”
“알겠다, 카밀로.”
측근인 카밀로의 목소리를 듣고, 하인리히가 리히테나워 경신술을 사용해 몸을 날렸다.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비만 체형의 여성이 이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칼레온 이그니아스의 사촌, 레이나 이그니아스가 당신인가?”
“마, 막아라! 저놈을 막아!”
여성은 부하들을 질타했다.
다급히 검기를 전개하는 그들을 향해, 하인리히는 질풍 같은 연속 공격을 펼쳤다.
순식간에 쓰러진 그래듀에이트들을 돌파하여, 하인리히는 레이나 이그니아스를 향해 돌진했다.
“네놈……!”
그녀가 강대한 검기를 전개했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검기였다.
“소용없다.”
“윽……!”
콰콰콰쾅!
아그리파 절검술을 대표하는 초고속의 4연격, 더 크럭스가 펼쳐졌다.
예전에 에르나스를 상대로 펼쳤을 때는 어설프게 흉내만 내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버지인 브랜틀리 못지않은 완성도였다.
레이나 이그니아스는 이 4연격을 막아 내지 못했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후우…….”
지휘관을 쓰러뜨린 뒤 숨을 가다듬는 하인리히의 배후에서, 욜스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하다, 하인리히.”
“교수님.”
“이제는 그래듀에이트 상급도 쓰러뜨릴 수 있게 되었군.”
“한동안 검에서 멀어져 있던 인물 같았습니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이 되면 환골탈태를 한다.
그런데도 저런 비만 체형이라는 건, 한동안 검을 휘두르지 않고 태만한 삶을 살아왔다는 뜻이다.
그동안 계속 전장에서 싸워 온 하인리히와는 달리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너도 어엿한 그래듀에이트 상급인 것 같구나.”
“…….”
“정말 대단하다, 하인리히.”
얼마 전, 하인리히는 남부에서 슈라이에르 가문의 잔당을 토벌하고 백색 엘릭시르를 받았다.
그 마력을 대부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마침내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했다.
환골탈태도 경험했기 때문에, 체형도 예전보다 훨씬 건장해진 상태였다.
“너는 이미 평범한 정교수들보다 뛰어나다.”
욜스의 말대로, 하인리히는 별동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 주고 있었다.
욜스 직속의 정교수들보다 훨씬 많은 공적을 세우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아직 부족합니다.”
하인리히가 거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욜스 교수님, 소문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소문?”
“에르나스가 절정급에 도달했다는 소문 말입니다.”
“…….”
욜스의 별동대는 발렌티아노의 본대와 직접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그니아스 가문의 포로들이 얘기하는 것에 의하면, 에르나스가 절정급의 경지에 도달해 검왕과 검후를 쓰러뜨렸다고 한다.
“검왕과 검후가 사망한 건 사실로 보인다. 그렇다면… 에르나스가 절정급에 도달했다는 것도 사실이겠지.”
“그렇군요.”
하인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 변화 없이, 냉정하게.
“하인리히.”
그런 하인리히를 보면서, 욜스가 천천히 말했다.
“너라면… 앞서 나가는 에르나스를 보면서 질투심에 휩싸여 스스로를 망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게 다른 가문의 후계자들과의 차이점이지.”
욜스가 미소를 지었다.
“에르나스에 대한 경쟁심을, 네가 더 강해지기 위한 원동력으로 삼아라.”
“…….”
“너는 더 강해질 수 있다. 흔들림 없이 나아가도록 해라.”
그렇게 말을 남긴 뒤, 욜스는 자리를 떴다.
소탕전이 진행되고 있는 전장을 둘러보며, 하인리히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에르나스…….’
에르나스가 절정급에 도달했다는 건, 분명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욜스가 말했듯이 하인리히가 질투심에 휩싸이는 일은 없다.
오히려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기다려라, 에르나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하인리히가 검기를 전개했다.
‘나도 머지않아 그곳에 도달하고야 말겠다.’
앞서 나가는 검술 천재를 이정표 삼아, 하인리히는 계속해서 달려 나갈 생각이었다.
* * *
“포로들에게서 얻어 낸 정보에 의하면, 욜스 교수의 별동대가 적들의 측면을 잘 공략하고 있는 것 같더군.”
천막 안에 펼쳐 놓은 지도를 내려다보며, 페르디난드 교수가 입을 열었다.
“조만간 별동대와 함께 이그니아스 가문의 본진을 협공할 수 있겠어.”
“그렇겠군.”
아카데미 본대를 지휘하는 발렌티아노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욜스 교수의 별동대가 너무 신출귀몰해서, 우리가 직접 연락을 취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 같네.”
“그래도 이제 곧 연락이 닿겠죠.”
안겔라 교수가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욜스 교수가 유스트 바스티안을 확보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그니아스 가문 측에서 아무런 발표도 없으니 그 부분도 걱정 안 해도 되겠죠.”
“그래, 적어도 이그니아스 가문이 바스티안 공작을 사로잡지는 않은 것 같군.”
그렇게 대화하던 교수들이 나를 쳐다봤다.
“에르나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글쎄요.”
나는 작전 회의에 유일하게 참가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이미 나는 지도 교수와 거의 동일한 지위를 획득했다고 할 수 있었다.
“욜스 교수님 곁에는 세리느도 있습니다. 별동대를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것도 그렇군.”
“저희가 추가로 인원을 파견하기도 그렇고 말입니다.”
승승장구하면서 이그니아스의 본진 가까이까지 왔지만… 여유를 부려도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동부의 여러 명문가들 중 절반은 이그니아스 가문을 지지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우리는 순식간에 포위당할 것이다.
클라리온 가문의 올레아나가 반(反)이그니아스 진영의 가문들을 규합해서 견제해 주고 있지만… 그 가문들도 아카데미가 무너진다 싶으면 바로 발을 뺄 것이다.
“전력을 다해 이그니아스 본진을 쳐서, 칼레온 이그니아스를 빠르게 제압하는 걸 우선해야 합니다.”
“흠, 맞는 말이군.”
발렌티아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예부대를 앞세운 속전속결… 그게 최선이지.”
“우리 아카데미는 그것밖에 없지. 머릿수가 부족하니까.”
페르디난드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네 사람에… 욜스 교수까지 합치면 절정급이 다섯 명이지. 우리가 일제히 나서서 공격한다면, 이그니아스 본진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을 거야.”
“칼레온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검왕과 검후가 각개격파당한 게 가장 뼈아프겠군.”
발렌티아노의 지적대로 칼레온의 가장 큰 실책은 이것이었다.
검왕 가르디우스와 검후 이사벨라를 옆에 두고, 셋이 함께 아카데미와의 결전에 나섰다면 승산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레온은 검왕과 검후가 독자적으로 움직이게 했고, 결국 각개격파당해서 칼레온 혼자만 남게 되었다.
“아무리 칼레온이 뛰어난 검사라고 해도, 우리들을 막아 내지는 못할 걸세.”
“그렇지.”
칼레온은 아카데미의 교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다들 칼레온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알고 있었다.
뛰어난 검사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정도는 아니다… 그것이 교수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그 부분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의 칼레온 이그니아스는 우리들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강할 겁니다.”
“뭐라고?”
“에르나스, 그게 무슨 소리지?”
교수들이 당혹스러워했다.
“이봐, 한창 성장 중인 학생도 아니고… 칼레온이 못 보는 사이 얼마나 강해졌겠나?”
“그래, 내가 알기로 칼레온은 이미 본인의 한계점에 도달한 상태다.”
페르디난드와 발렌티아노가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건 칼레온의 진짜 한계점이 아닙니다.”
“뭐?”
“궁지에 몰린 이상, 칼레온은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의 진정한 힘을 발휘하려 할 겁니다.”
이그니아스 염옥검술은 천 년 전에 철혈검제를 보좌했던 초대 이그니아스 공작 ‘염옥공(炎獄公)’이 창시한 검술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그니아스 가문의 가주들 중에 염옥공 수준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르테리스 가문에서 마르테리스 이륜검술을 대성한 사람이 수백 년 동안 없었던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하지만… 지금 칼레온은 일시적으로나마 염옥공에 근접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소설과 같은 선택을 했다면 말이다.
“제 추측이 맞다면… 칼레온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화력’을 낼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겁니다.”
“화력……?”
평소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에, 교수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 *
욜스 교수가 이끄는 별동대는 이그니아스 가문의 본진을 향해 계속 전진했다.
얼마 전에는 본대와 연락도 닿았다.
에르나스가 절정급에 도달하여 검왕과 검후를 쓰러뜨렸다는 것도 확인했으니, 이제는 날짜를 맞춰서 이그니아스 가문의 본진을 협공하는 것만 남았다.
‘에르나스의 예상대로라면… 칼레온 이그니아스는 새로운 힘을 손에 넣은 상태다.’
울창한 숲속을 지나며 욜스는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그 정도의 힘을 얻었다면, 아카데미의 지도 교수들이 전력을 다해 맞서 싸워야 할 터.’
그렇게 생각하며 욜스는 고개를 돌렸다.
함께 움직이고 있는 아카데미의 정교수들 그리고 하인리히나 세리느 같은 엘리트 학생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칼레온에게는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내 그라투시아 도룡검술로도… 상대하기 어려울 거다.’
욜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교수들 그리고 에르나스와 힘을 합쳐서 싸워야 한다.
“욜스 교수님!”
하지만, 바로 그때.
욜스 클래스의 조교수인 클로드가 달려왔다.
그는 남부 출신으로, 살바토레 아틸리온의 검술 도장에서 수련한 경력이 있다.
“방금 아틸리온 마력탐측술로 감지했습니다! 심상치 않은 마력이 전방에 있습니다!”
“심상치 않은 마력?”
흠칫 놀란 욜스가 전방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순간.
한 남자가 숲속에서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칼레온 이그니아스……!”
전신을 붉은 기운으로 휘감은 채 날아오르는 그 모습에, 누구나 시선을 빼앗겼다.
하지만, 욜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칼레온의 작전을 직감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다들 호신기를 전개하며 후퇴하라!”
이그니아스 본진은 아카데미의 본대와 별동대에게 양쪽 방향에서 압박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동안 아카데미는 칼레온이 방비를 철저히 하고 결전에 임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칼레온은 본진에서 대기하지 않고 뛰쳐 나왔다.
칼레온이 노림수는, 측면에서 접근하던 욜스의 별동대를 습격하는 것.
지금까지 각개격파에 당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아카데미 진영을 각개격파 해 주려는 것이다.
“명령이다!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지금 칼레온 이그니아스는……!”
소리를 지르면서 욜스는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지금 날아올 공격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욜스가 그라투시아 도룡검술로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해야만 했다.
“브레스를 뿜는 드래곤과 마찬가지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칼레온이 붉게 타오르는 검을 휘두른 순간.
먼 옛날에 멸종한 고대 화룡(火龍)의 브레스 같은… 지옥의 불꽃이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