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129화 (129/212)

129화 절정의 경지로 (3)

남부에서 출발한 아카데미의 군세는 어려움 없이 동부로 진입했다.

남부와 동부의 경계 지역은 아그리파 가문의 영향력이 강한 곳인데, 아그리파 가문이 중립을 지키기로 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동부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발렌티아노 교수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올레아나 님.”

동부에 진입한 아카데미를 맞이해 준 건, 클라리온 가문의 가주인 올레아나 클라리온이었다.

클라리온 가문은 바스티안 가문과 마찬가지로 6대 검술명가 바로 아래에 있는 후작 가문인데, 지난 6검 회의에서는 에르나스에게 힘을 실어 줬다.

원래 란즈슈타인 가문과 친분도 있었기 때문에, 현재 동부에서는 반(反)이그니아스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희 클라리온 가문은 그리 병력이 많지 않습니다. 영지를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고… 저도 이제 건강이 안 좋아서 말입니다.”

올레아나는 그래듀에이트 상급이지만, 나이가 너무 많아 이제는 검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보급을 비롯한 후방 지원 정도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올레아나 님.”

“다른 명문가들에게도 아카데미에 힘을 실어 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아그니아스 가문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가문이 많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올레아나는 주위를 살짝 둘러봤다.

“그런데 에르나스 님은 안 계시는 건가요?”

“에르나스는 다른 곳에서 출발했습니다. 저희보다는 늦게 도착할 겁니다.”

“그렇군요.”

올레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에르나스 님이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를 쓰러뜨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역대 최연소의 절정급 검사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페르펙티오 님이 이걸 아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궁금하군요.”

“…….”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

란즈슈타인 가문의 가주이자, 에르나스의 아버지.

그는 지금 철혈검제의 영묘(靈廟)에 측근들과 함께 틀어박혀 있다.

란즈슈타인 가문의 사병(私兵)들도 동부 끄트머리에 있는 영지에서 침묵하고 있는 상태다.

“올레아나 님, 란즈슈타인 가문의 협력을 얻을 수는 없습니까?”

“어렵겠지요. 관여하지 않는 방침인 것 같습니다.”

“…….”

6대 검술명가 중에서 오로지 란즈슈타인 가문만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 대신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좀 기묘한 상황인 건 사실이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철혈검제의 위령제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군요. 란즈슈타인 가문 쪽에는 기대하지 않고, 우리들 힘만으로…….”

“올레아나 님!”

그때 클라리온 가문 쪽에서 다급히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바스티안 가문의 본성이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올레아나가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스티안 가문은 이그니아스 가문의 공격을 받는 중이었다. 꽤 오래 버티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그니아스 가문의 맹공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유스트 님의 소식은 알 수 없나요?”

“측근들과 함께 도망치신 것 같습니다. 이그니아스 가문이 추적 중이라고 합니다.”

“다행이군요.”

여러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스티안 가문의 가주인 유스트 바스티안은 올레아나 이상으로 동부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다.

이그니아스 가문 입장에서는 유스트를 반드시 해치우고 싶었을 것이다.

“발렌티아노 교수님, 유스트 님 쪽으로 병력을 파견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래야 하겠죠.”

발렌티아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욜스 교수에게 이 일을 맡기겠습니다.”

“황제 폐하께 ‘도룡검’의 칭호를 받은 욜스 교수님 말이군요.”

“네, 바스티안 가문 출신의 세리느도 욜스 교수 밑에 있지요.”

그렇게 말하며 발렌티아노가 지도를 살폈다.

“일단 욜스 교수의 별동대가 유스트 님을 찾으면서 이그니아스 가문의 측면을 견제하고, 저와 안겔라 교수의 본대가 이그니아스 가문을 정면에서 공격하겠습니다.”

“정면에서 공격한다면…….”

“네, 아마도 플라티온 평야에서…….”

발렌티아노가 지도를 응시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검왕(劍王) 가르디우스 플라티온과 격돌하게 되겠지요.”

* * *

플라티온 평야는 동부 한가운데에 위치한 넓은 땅이다.

대대로 플라티온 백작 가문에서 관리해 왔다.

평소에는 평화로운 지역이지만, 지금은 이그니아스 가문의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동부에서 오든 남부에서 오든, 아카데미의 병력이 이 평야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라티클 님, 남부에서 올라온 아카데미의 병력이 클라리온 가문과 접촉한 것 같습니다.”

“흠, 그런가.”

건장한 체격을 지닌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라티클 이그니아스라는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검사로, 사촌 형인 칼레온의 명을 받고 플라티온 평야 방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발렌티아노 교수와 안겔라 교수가 병력을 이끌고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조만간 이쪽에 도착하겠군. 철저히 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나는 가르디우스 님을 만나고 오겠다.”

라티클은 막사에서 나가 평야를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플라티온 가문의 저택이었다.

“라티클 이그니아스다. 가르디우스 님은 자리에 계신가?”

“네, 들어오십시오.”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어디선가 피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집사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간 직후, 라티클은 눈을 의심했다.

방 안에 머리가 터진 시체가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 가르디우스 님!”

“왜 그리 호들갑인가.”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이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주름살이 가득한 백발의 노인이었지만, 체격은 라티클 이상으로 건장했다.

이 노인이 바로… 플라티온 가문의 가주인 ‘검왕’ 가르디우스 플라티온이었다.

“이, 이게 누굽니까?”

“혈검장로회에서 나온 놈이다.”

“혈검장로회에서 가르디우스 님에게 암살자를 보낸 겁니까?”

라티클은 어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왕’ 가르디우스를 어떻게 암살한단 말인가.

“나에게 협력 요청을 하더군.”

“혀, 협력 요청이라 하셨습니까?”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말살하기 위해 손을 잡자고 했다.”

“……!”

“너희 이그니아스 가문에 찾아가 봤자 상대를 안 해 줄 게 뻔하니, 나한테 찾아온 모양이더군.”

확실히 이그니아스 가문은 혈검장로회 같은 놈들과 손을 잡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디우스를 찾아오다니…….

“요구 사항이 너무 많아서, 그냥 죽여 버렸다.”

“그, 그렇군요.”

가르디우스가 특별히 난폭한 인물인 건 아니다.

오히려 평상시에는 온화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만… 호적수와의 싸움을 앞두고 있을 때는 다르다.

“발렌티아노 교수, 안겔라 교수와의 싸움을 앞두고 있는 가르디우스 님을 귀찮게 하다니…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놈이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라티클.”

“네?”

“그런 잔챙이들은 내 적수가 못 된다.”

“……!”

“발렌티아노는 십여 년 전에 겨뤄서 내가 승리했다. 안겔라하고는 싸워 본 적이 없지만… 우왕좌왕 뛰어다닐 뿐인 여자에게 내가 질 리가 없지.”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인 발렌티아노와 안겔라조차 무시하는, 절대적인 자신감.

이것이 ‘검왕’ 가르디우스였다.

“그렇다면 가르디우스 님은…….”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건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다.”

“……!”

“그래듀에이트가 된 지 1년 정도밖에 안 된 놈이,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와 살바토레 아틸리온을 혼자서 쓰러뜨렸다더군.”

가르디우스의 혼탁한 눈이 불타올랐다.

“오랜만에 나타난 유망주다. 미지수의 실력을 지닌 그놈하고 싸워 보고 싶다.”

“하, 하지만, 가르디우스 님.”

라티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르나스는 아마 좀 늦게 도착할 겁니다. 발렌티아노 교수나 안겔라 교수가 먼저 도착할 테니, 그들하고 먼저 싸워 주셔야…….”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네?”

“나는 에르나스와의 싸움에만 관심이 있다.”

“아, 아니, 가르디우스 님!”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듣고, 라티클은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원래 얘기와 다르지 않습니까!”

가주인 칼레온 이그니아스가 가르디우스를 어렵게 섭외한 건, 아카데미의 절정급 교수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가르디우스가 이렇게 나오면 작전이 꼬이게 된다.

“저희 가주님하고도 이미 얘기가 다 끝난 부분 아닙니까!”

“글쎄, 잘 모르겠군.”

“가르디우스 님……!”

라티클은 등에서 땀이 나는 걸 느꼈다.

‘그래, 이런 성격이라 큰 세력을 이루지 못했지…….’

검왕이라 불릴 정도의 실력을 지녔지만, 이런 괴팍한 성격 때문에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다.

남부에서 검술 도장을 운영했던 살바토레처럼 많은 제자를 거느리지도 못했다.

플라티온 평야에서 혼자 외롭게 군림하는 독불장군… 이게 ‘검왕’ 가르디우스였다.

“이, 일단 제 얘기를 들어 주십시오.”

라티클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필사적으로 가르디우스를 설득했다.

어떻게든 가르디우스를 전장에 끌어내지 못하면, 에르나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플라티온 평야가 뚫리게 될 것이다.

* * *

언제부터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걸까.

“여기는…….”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나는 특별히 제작된 마차에 앉아 있었을 터였다.

페르디난드가 만들어 준 암리타를 복용한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력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내 정신세계인가?”

지금 나는 새하얀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소설에서 비슷한 공간을 묘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별로 동요하지도 않았다.

“제대로 된 것 같군.”

소설에서 주인공인 아칸델이 절정급의 경지에 들어설 때도 이런 공간을 경험했다.

그러니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력은… 내 안에서 서서히 자리 잡고 있는 것 같고.”

지금 나는 정신세계에 갇혀 있지만, 현실의 육체가 어떤 상태인지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암리타의 막대한 에너지가 혈맥에서 순환하며 조금씩 내 몸과 일체화되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문제없겠지.”

암리타의 기운을 전부 다 흡수하려면 보름이 걸린다는 설정이다.

엘릭시르처럼 현대 기술이 적용된 영약이 아니라 어쩔 수 없다.

다만 지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바깥에는 별일 없으려나.”

지금 바깥에서는 페르디난드 교수와 슈미츠, 비올라 등이 나를 지켜 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혈검장로회도 이렇게 내 주변에 사람이 많을 때는 습격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동부에 들어가서 이그니아스 가문과 싸울 때가 문제다.

검왕, 검후, 그리고 칼레온 이그니아스… 그런 놈들과 충돌하기 전에 끝마칠 수 있을까.

“마력을 다 흡수해서 마나 하트에 저장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암리타의 마력을 마나 하트에 저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마력을 활용해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의 경지에 진입해야 한다.

절정급에 도달하지 못한 채 이 막대한 마력을 써먹는 건 위험한 일이다.

마력 폭주 때문에 폐인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 정신세계에서, 절정급에 도달하기 위한 깨달음을 얻어야 해.”

소설 속에서도 그랬다.

주인공인 아칸델은 이 정신세계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이 되어 현실 세계로 돌아갔다.

그때 아칸델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면 나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과의 싸움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팔짱을 낀 채 대기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배후에서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쯧, 이런 건가.”

고개를 돌려 보니, 에르나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내가 이쪽 세계에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존재… 소설의 주인공, 아칸델이었다.

“그래, 아칸델에게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게 중요했지만… 내가 초월해야 할 존재는 에르나스가 아니지.”

그동안 나는 나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소설 속의 에르나스를 초월해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칸델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은 많이 해 봤다.

“너를 초월해야, 내가 진정한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사실 아칸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흐릿하게 보여서 이목구비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칸델이 맞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나와 함께했던… 소설의 주역이었으니까.

“좋다, 아칸델.”

손을 움직이자, 저절로 손안에 검이 출현했다.

아칸델도 어느새 검을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너를 꺾고… 검왕도 검후도 칼레온 이그니아스도 꺾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주마.”

물론, 그걸로 끝이 아니다.

소설에서는 한 번도 묘사한 적이 없는 경지까지 도달해야 한다.

“나는 절정을 넘어선 경지에 도달해야 하니까.”

내가 쓴 소설을 능가하고.

내가 만든 주인공을 능가하여.

나는 나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으로서, 이 세계의 정점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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