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절정의 경지로 (2)
“이런 개같…….”
동부에서 이그니아스 가문이 베르디에 가문을 멸망시키고 바스티안 가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듣고, 페르디난드는 욕설을 입에 담으려다가 꾹 참았다.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일이 터지다니.
그동안 동부에서 이그니아스 가문은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주위 가문들을 복속시키고 있었다.
군사력을 과시하는 일은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슬슬 한계에 도달했는지, 본격적으로 군사 행동에 나선 것이다.
“에르나스, 네 측근인 세리느가 바스티안 출신 아니냐?”
“네, 맞습니다.”
“6검 회의에서도 바스티안 가문이 네 편을 들어 줬다고 했지…….”
바스티안 가문은 6대 검술명가 바로 아래 서열의 후작 가문이다.
동부에서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에, 이그니아스 가문을 반대하는 가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란즈슈타인 가문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니, 바스티안 가문만 잡으면 동부를 장악하는 데 걸림돌이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페르디난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그니아스 가문이 이렇게 나오면 아카데미도 동부에 개입해야 한다.
이미 가문 하나를 멸망시켜 버린 상황이니, 명분은 충분하다.
“빨리 동부로 출발해야겠군. 아직 남부에 남아 있는 발렌티아노 교수, 안겔라 교수, 욜스 교수도 동부로 진격해야 할 테고.”
하지만, 문제가 있다.
지금 출발하면 겨우 완성한 암리타를 복용할 수 없다.
“에르나스, 어떻게 하면 좋겠나?”
“…….”
“문헌에 의하면, 암리타는 복용한 뒤 보름 동안 마력을 안정시켜야 한다. 조용한 곳에 틀어박혀서 말이다.”
엘릭시르처럼 몇 시간 마력을 순환시키는 것만으로는 어렵다.
제대로 안정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움직이면 마력이 폭주할 것이다.
결국 에르나스가 암리타를 복용하면 보름 동안 꼼짝도 못하고 마력 연공만 해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동부로 달려가야 하는 상황인데 말이다.
“그냥… 암리타 복용은 나중으로 미루겠나?”
“…….”
솔직히 답답한 상황이었다.
페르디난드가 6일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암리타를 제작한 건, 빨리 에르나스에게 암리타를 먹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에르나스가 암리타를 복용해서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 앞으로 벌어질 싸움에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암리타를 복용하느라 동부에 가지 못한다면 본말전도다.
아카데미한테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라는 검술 천재가 꼭 필요했다.
“교수님.”
계속 침묵하던 에르나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해 보려고 합니다만… 어떻겠습니까?”
“뭐?”
어리둥절하는 페르디난드 앞에서, 에르나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자기 생각을 밝혔다.
얘기를 다 듣고, 페르디난드는 입을 떡 벌렸다.
“에르나스 너… 제정신이냐?”
에르나스가 제시한 방법은, 페르디난드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 * *
“하인리히 님!”
하인리히 아그리파는 불타오르는 요새 위에서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는 베리스리제 체제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슈라이에르 가문의 분가(分家)를 토벌하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냐, 카밀로.”
“동부에서 이그니아스 가문이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나선 것 같습니다! 아카데미도 곧 동부로 진격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인리히의 측근인 카밀로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예상보다 빠르군. 슈라이에르 가문이 괴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급해진 건가.”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가 패배한 건, 전쟁 준비가 완료되기 전에 아카데미가 선제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그니아스 가문은 빠르게 동부를 평정한 뒤 아카데미와 대결할 생각인 것 같았다.
“란즈슈타인 가문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상, 동부에서 이그니아스 가문을 막을 만한 세력은 없다. 바스티안 가문으로는 역부족이지.”
“하인리히 님, 혹시… 아그리파 가문은 움직이지 않는 겁니까?”
아그리파 가문은 남부의 동쪽 절반을 지배하는 가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곧장 동부로 진격해 이그니아스 가문을 제지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실 거다. 지금처럼 계속 내실을 다지는 것에 주력하시겠지.”
“아…….”
슈라이에르 가문과 이그니아스 가문과는 달리, 아그리파 가문은 몸집을 불리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대신 내부를 정비하고 기존 병력을 훈련시키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다.
“다른 가문들이 억지로 몸집을 불리느라 애쓰는 동안, 가문 자체의 힘을 키우겠다는 생각이신 거지.”
“그런 점은 하인리히 님하고 성격이 비슷하시군요.”
“…….”
“앗, 죄, 죄송합니다.”
카밀로가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인리히가 이대로 계속 실력을 길러 에르나스를 꺾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듯이, 브랜틀리도 내실을 다져서 다른 가문들을 꺾을 생각일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는 다른 가문이 직접 쳐들어오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으실 거다.”
“그렇군요. 그러면 아그리파 가문은 그냥 중립을 지키겠군요. 하인리히 님은… 계속 아카데미에서 활동하시는 거고.”
“그렇지.”
하인리히는 아카데미에서 에르나스를 꺾고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걸 포기하지 않은 상태다.
아카데미와 아그리파 가문의 전쟁이 시작된다면 모를까, 계속 아카데미에서 싸워 나가며 공적을 쌓아 갈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아카데미에서 하인리히 님을 최대한 돕겠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말하며 하인리히는 검을 치켜들고 요새 내부로 뛰어들었다.
안쪽에는 슈라이에르 가문의 쟁쟁한 그래듀에이트가 여러 명 있었지만,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치열한 싸움을 겪을수록 빠르게 성장한다는 것을, 하인리히도 이미 깨달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부에서 수많은 싸움을 경험한 하인리히는… 어느새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 * *
남부에 머무르고 있던 아카데미의 군세는 곧바로 동부로 진군했다.
지도 교수인 발렌티아노, 안겔라, 욜스가 한꺼번에 움직였다.
남동부의 아그리파 가문이 길을 막지 않을까 우려되었지만, 다행히 아그리파 가문은 아카데미를 그냥 통과시켜 줬다.
아그리파 가문은 이번 전란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한 듯했다.
“하인리히 님을 아그리파 가문에 보내서 길을 열어 달라고 부탁해야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도 됐네요.”
행군 도중, 클로에가 세리느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 그녀들은 욜스 클래스의 수련생 신분이지만, 에르나스의 대리인으로서 작전 회의에도 참가하고 있었다.
슈라이에르 가문을 선제공격할 때 에르나스의 작전을 전달한 이후, 아카데미에서 그녀들의 존재감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최단 거리로 진군해서, 빨리 바스티안 가문을 구하러 가야겠네요.”
“클로에,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세리느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바스티안 가문을 구하기 어렵다는 건, 저도 알고 있으니까.”
“세리느 님…….”
“이그니아스 가문은 거센 불꽃 같은 가문이죠. 한번 마음먹으면… 순식간에 모든 걸 불태워 버려요.”
“…….”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바스티안 가문의 본성(本城)은 함락될 거예요.”
세리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스티안 가문이 이그니아스 가문에 의해 괴멸되는 광경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세리느 님, 그래도 유스트 바스티안 님이 그렇게 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아요.”
“그건… 그렇죠.”
“제가 알기로, 그분은 불리하다 싶으면 재빨리 도망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실 분이에요.”
“어떻게 제 아버지 성격을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거죠……?”
클로에의 말을 듣고 세리느는 쓴웃음을 지었다.
세리느의 아버지인 유스트 바스티안은 상당히 약삭빠른 성격이다.
이그니아스 가문이 쳐들어와도, 신속히 도망쳐 기회를 엿볼 것이다.
“그러니 신속히 동부로 진군해서 아버님을 구하러 가야 하는 거죠.”
그렇게 말한 뒤, 클로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요.”
“그렇죠. 무엇보다…….”
세리느는 기억을 되새기며 말했다.
“검왕(劍王)과 검후(劍后)가 이그니아스 가문에 붙었다고 하니까요.”
동부에는 뛰어난 그래듀에이트가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존재가… 검왕과 검후라 불리는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들이었다.
그들은 본래 중립적인 입장이었으나, 칼레온에게 회유당해 이그니아스 가문의 협력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이그니아스 가문에는 칼레온까지 포함해 절정급이 3명이나 있는 것이다.
“우리 지도 교수님들도 상대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렇죠…….”
발렌티아노와 안겔라, 욜스도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지만, 검왕과 검후 상대로는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예전에 발렌티아노 교수님도 검왕에게 패배를 맛본 적이 있다고 하죠.”
“십여 년 전의 얘기라고 하긴 하지만요.”
발렌티아노도 동부 출신이기 때문에, 검왕과도 교류가 있었다.
하지만 직접 겨뤄 봤을 때는 완패를 경험했다고 한다.
아카데미에서 동부 검술의 최고 권위자인 발렌티아노를 쓰러뜨렸을 정도니… 정말 엄청난 실력자인 것이다.
“병력이 부족한 아카데미가 그동안 여러 가문과 싸우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각 클래스의 지도 교수님들처럼 강력한 그래듀에이트가 많았기 때문이죠.”
클로에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명문가가 많은 동부에서는 아카데미가 큰 우위를 점하지 못해요. 지도 교수님들만 믿고 있을 수는 없죠.”
“그렇죠. 그러니…….”
세리느는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을 쳐다봤다.
아카데미가 있는… 에르나스가 있는 서쪽을 쳐다본 것이다.
“빨리 합류해 줘야 할 텐데요.”
“그렇죠.”
에르나스가 빨리 와 줘야 한다.
세리느도 클로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아카데미에서도 페르디난드 교수가 이끄는 그래듀에이트들이 동쪽으로 출발했다.
남부 원정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꽤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 중에서도 꽤 많은 인원이 차출되었다.
“이제야 겨우 우리에게도 기회가 오는군.”
“솔직히 저는 별로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죠…….”
에르나스의 측근이던 슈미츠 하르트만, 비올라 오리셔스도 이번 원정에 참가하게 되었다.
세리느와 클로에는 남부 원정에 참가했지만, 두 사람은 아카데미에 남아 있었다.
“슈라이에르 가문과의 싸움에 참가하지 못한 건 정말 분통스러운 일이었다. 내 고향인 남부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다.”
“원래 학생들은 이런 싸움에 참가하면 안 되는 거라고요…….”
슈미츠와 비올라 외에도 상당히 많은 학생이 이번 동부 원정에 차출되었다.
차출을 거부한 학생은 거의 없었다.
다들 실전을 통해 공적을 세우는 걸 바라고 있었으니까.
“정말 세상이 혼란스럽네요.”
“그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우리가 싸우는 거지. 군소리하지 마라, 비올라.”
의욕적인 슈미츠 옆에서 비올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열심히 싸우면 느긋하게 지낼 수 있는 세상이 찾아오는 거 맞나요?”
“그렇겠지. 에르나스 님이 그런 세상을 만들어 주실 거다.”
“으음…….”
비올라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봤다.
행군하는 학생들 사이에 특별한 마차가 섞여 있었다.
“정작 에르나스 님은 쿨쿨 잠들어 있는데 말이죠.”
“잠들어 있는 게 아니라니까!”
버럭 소리를 지른 뒤, 슈미츠는 다급히 헛기침을 했다.
“에르나스 님은, 지금 특수한 영약을 먹고 마력 연공 중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에르나스 님을 지키면서 기다려야 하는 거다.”
페르디난드 클래스에서 급히 제작한 특수 마차.
그 안에서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홀로 가부좌를 틀고 마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고대 영약 ‘암리타’의 마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서기 위해.
본래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에르나스의 뜻이 워낙 확고해 강행하게 되었다.
“이그니아스 가문과의 싸움이 본격화되기 전에 에르나스 님이 마력 연공을 마칠 수 있을까요?”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지.”
이그니아스 가문은 슈라이에르 가문보다 더 강하다.
절정급조차 쓰러뜨릴 수 있는 에르나스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에르나스 님이 제때 깨어나실 수 있느냐에 따라… 이 전쟁의 결과가 달라질 거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한낱 학생에 불과했던 그는, 어느새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