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일인전승의 검술 (1)
“페르디난드 클래스의 다른 교수님들은 어쩌시고 저만 부른 겁니까?”
“그 녀석들은 전부 다른 일을 시켰다. 내 클래스에 소속된 사람 중에서 한가한 놈은 너 하나밖에 없더군.”
“한가한 게 아니라, 휴식을 취하고 있던 겁니다만.”
클라우비체의 집무실로 들어서면서, 나는 페르디난드 교수와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쉴 새 없이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휴식은 무슨 놈의 휴식. 세리느 바스티안과 밀회를 즐기고 있었으면서.”
“밀회가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안 도와줄 거냐?”
“그런 건 아닙니다만.”
나는 그동안 페르디난드가 암리타를 완성하는 날을 기다려 왔다.
암리타에서는 최고 등급의 엘릭시르를 능가하는 마력을 얻을 수 있으니, 내가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흥, 지난번에 진은검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눈치챘다. 너는 물욕(物欲)이 엄청나게 강한 놈이지.”
“물욕이 아니라… 검사로서 더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일일이 정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말하며 페르디난드는 집무실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장식용 검을 가리켰다.
“너, 이게 뭔지 아냐?”
“비밀 통로를 여는 장치군요.”
“…….”
페르디난드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어떻게 알았지?”
“분위기만 봐도 대충 압니다.”
“수상한데…….”
물론, 소설에서 묘사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소설에서는 그냥 클라우비체의 기밀 자료를 입수하고 끝이었다.
이곳에 암리타 관련 자료가 있는 줄 알았다면 내가 먼저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쯧, 일단 기다려 봐라.”
페르디난드가 낑낑대면서 벽에 걸린 검을 조작했다.
방향을 바꾸면서 밀고 당기고 하다 보니, 쿵 소리와 함께 숨겨진 문이 열렸다.
“대단하시군요.”
“약간의 진심도 담겨 있지 않은 칭찬이군…….”
툴툴거리면서 페르디난드가 안으로 들어갔다.
비밀 방 안에 있는 건 대부분 서류였는데, 영약의 원료로 보이는 약초 같은 것도 있었다.
“클라우비체도 스스로 영약을 만드는 것에 도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엘릭시르의 제조법은 입수하지 못한 듯하지만…….”
페르디난드가 양피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암리타의 제조법을 ‘일부분’ 손에 넣었던 모양이다.”
“……!”
이건 소설에서도 묘사되지 않았던 내용이다.
클라우비체도 암리타를 만들려고 했었던 건가.
“클라우비체는 암리타 제조법을 계속 연구했다. 그와 동시에 암리타의 재료도 수집했지.”
“그러면 여기 있는 약초들은…….”
“그래, 클라우비체가 나름대로 모아 본 암리타의 재료들이다.”
그렇게 말하며 페르디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걸로는 택도 없지만 말이다.”
“…….”
페르디난드는 줄곧 암리타를 연구했다.
그러니 클라우비체가 준비해 놓은 것들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구하지 못했던 걸 갖춰 놓았더군.”
“그러면…….”
“그래, 에르나스.”
페르디난드의 시선이 선반에 놓여 있는 유리 상자로 향했다.
그 안에는 푸르스름한 돌이 있었는데, 잘 살펴보니 속에 액체가 고여 있었다.
“지난번에 네가 가져다준 자료에 있던… 공청석유(空靑石油)다.”
“……!”
공청석유.
이것은 공청석(空靑石)이라는 광물에 고이는 물을 의미한다.
원래 공청석은 아즈라이트라는 광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대지의 기운이 집약되는 곳에 생성되는 마석(魔石)을 의미한다.
공청석은 오랜 세월 동안 대지의 기운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흐르면 내부에 물이 고이게 된다.
이 물은 진짜 물이 아니라 대지의 기운이 액체화된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영약이라 할 수 있다.
“정말로 이게 공청석유인 겁니까?”
“그래, 이론상으로는 이것만 들이마셔도 흑색 엘릭시르 이상의 마력을 획득할 수 있지.”
나는 푸르스름한 돌을 자세히 관찰했다.
사실 나한테는 돌 속에 들어 있는 액체가 공청석유인지 그냥 수분인지 구별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페르디난드가 그렇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걸 다른 재료들과 조합하면 암리타를 만들 수 있을 거다.”
“다른 재료들은 다 확보한 상태입니까?”
“그래, 거의 다.”
페르디난드가 웃으면서 말했다.
“지난번에 약속한 대로 시제품은 너한테 먹여 주마. 가장 먼저 말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해할 것 없다. 리스크가 큰 일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
내 말을 듣고, 페르디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잘못되어서 마력 폭주가 일어나도 책임 못 진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쯧, 건방진 녀석.”
“그런데 이걸 챙겨 가도 되는 겁니까?”
“집무실에 있는 물건은 전부 압수해도 된다고 이미 얘기가 끝난 상태다. 걱정 안 해도 된다.”
“그건 그동안 클라우비체가 저질러 온 음모의 증거를 압수하라는 뜻이지, 이런 것까지 멋대로 다 가져가라는 뜻은 아닐 텐데요.”
“그럼 이걸 두고 가자는 얘기냐?”
“무단으로 가져갔다가 나중에 슈라이에르 가문에서 문제 삼으면 곤란합니다. 기껏 화평을 맺었는데, 신뢰를 깨뜨리는 행동을 하면 안 되죠.”
“으음…….”
페르디난드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슈라이에르 가문에서 공청석유를 순순히 우리한테 넘겨줄까?”
“음…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떻게?”
“우리가 이걸 가져가는 대신, 나중에 암리타를 정식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면 슈라이에르 가문에도 제공해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어차피 베리스리제가 지금 당장 공청석유를 먹어 봤자 몸에서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마력 폭주가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공청석유를 제공한 뒤 나중에 암리타를 얻어먹는 편이 베리스리제의 성장을 위해서도 좋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흠… 그럴듯하군. 그러면 내가 새 가주한테 얘기해 두도록 하지.”
“네, 그렇게 해 주세요.”
“그것까지 처리한 뒤, 이 공청석유를 아카데미로 가져가면 암리타를 제조할 수 있겠지.”
페르디난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그동안 꿈꿔 왔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거다.”
평소 까칠하기만 한 페르디난드가 이렇게 들뜬 표정으로 웃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면 에르나스, 바로 아카데미로 돌아가자.”
“벌써 돌아가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각종 뒷수습은 발렌티아노 교수가 책임지고 진행할 거고, 더 이상 내가 여기 남아 있을 필요가 없지.”
페르디난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나는 최전선에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총장님에게 보고도 드릴 겸, 아카데미로 돌아가야지.”
“그렇군요.”
“너도 지금 당장 남부에서 할 일은 없지 않느냐?”
“그건 그렇죠.”
아그리파 가문 및 이그니아스 가문의 동향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지금 당장 쳐들어갈 것도 아니니, 이제는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된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해야 되는 일도 있으니까.’
암리타를 만들어 복용하는 것 말고도, 아카데미에서 처리해야 되는 일이 있다.
그러니 페르디난드와 함께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게 맞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함께 아카데미로 돌아가도록 하죠.”
“다행이군.”
“네?”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도중에 습격이라도 당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네가 함께 가면 든든하지.”
“페르디난드 클래스에 소속된 교수들하고 같이 가는 것 아닙니까?”
“그놈들보다 네가 더 든든하니까 말이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에르나스, 너는 현재 3차 시험을 통과한 ‘전공생’ 신분이지만… 네 위상은 이미 다른 교수들을 능가한다.”
“교수님…….”
“이번에는 무려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를 쓰러뜨렸지. 게다가 살바토레 아틸리온까지 쓰러뜨렸다고 하더군.”
지난번에도 나는 미하일 발트펠트를 쓰러뜨렸지만, 그때는 욜스와 함께 싸웠다.
하지만 이번에 클라우비체와 살바토레를 쓰러뜨릴 때는 나 혼자 싸운 것이었다.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를 혼자서 쓰러뜨릴 수 있는 실력이라니… 너는 정말로 무서운 놈이다.”
그렇게 말하며 페르디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네가 나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붙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군.”
“그러면 대련이라도 해 주시죠.”
“싫다. 그러다가 패배하기라도 하면 나만 망신을 당하는 건데, 누구 좋으라고 대련을 하냐?”
“교수로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그동안 여러 번 말하지 않았나?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고.”
“거참…….”
이 사람도 정말 독특한 교수다.
“어차피 너는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성장하지 않나? 내가 꼭 너한테 가르침을 주지 않아도 될 텐데.”
“후우… 됐습니다. 굳이 얘기를 꺼낸 제가 어리석었군요.”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페르디난드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나는 페르디난드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게 있었으니까.
‘그래, 슬슬 때가 되었지.’
내가 페르디난드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건 암리타뿐만이 아니다.
현재는 이 세상에서 페르디난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일인전승(一人傳承)의 특수한 검술… 그것을 유스레흐트의 ‘능력 재현’으로 얻어 낼 수 있다.
‘내 힘으로는 제대로 활용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그동안 계속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절정급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이라면, 그 검술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 * *
나는 페르디난드 클래스와 함께 슈라이에르 본성을 떠났다.
아직 남부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다른 교수들에게 맡기면 될 것이다.
‘아그리파 가문도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고… 남부 쪽은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페르디난드 클래스의 교수들과 야영을 하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남부보다는 동부가 문제인데…….’
현재 이그니아스 가문은 동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다.
칼레온이 아카데미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동부로 돌아가 명문가들을 포섭하고 있는 중이다.
머지않아 이그니아스 가문과도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될 것이다.
‘때가 오기 전에, 준비를 해 놔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페르디난드는 내 옆자리에서 모포를 덮은 채 잠들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를 붙잡고 고대 검술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결국 먼저 잠들어 버렸다.
‘그러면…….’
나는 페르디난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모포 바깥으로 빠져나와 있는 페르디난드의 손… 정확히 말하자면 손등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
곤히 잠들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안심하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인물 ‘페르디난드 호르나스’에 대한 ‘능력 재현’을 시도합니다.]
[인물 ‘페르디난드 호르나스’에 대한 이해도가 80%입니다.]
[판정: 성공]
[인물 ‘페르디난드 호르나스’의 주요 능력을 획득합니다.]
[케르베스트 백화검술(SS랭크)의 획득에 성공하였으나, 이미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 많습니다.]
[유폴리안 토벌검술(S랭크)의 획득에 성공하였으나, 이미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 많습니다.]
[아그타스 결전검술(S랭크)의 획득에 성공하였으나, 이미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 많습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 많기 때문에 1개의 능력만 획득할 수 있습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능력을 삭제하고 새로운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능력 재현이 성공하여, 페르디난드의 검술을 터득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하나뿐이기 때문에, 기존 능력을 삭제하지 않고 딱 하나의 검술만 터득하기로 했다.
[케르베스트 백화검술(SS랭크)의 획득에 성공하였습니다.]
완료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는 페르디난드에게서 손을 땠다.
그리고 유스레흐트를 만져 현재 보유 능력을 확인했다.
== 잠정 획득 ==
[케르베스트 백화검술(SS랭크)]
[발트펠트 금강검술(SS랭크)]
[아이오니아 신속검술(S랭크)]
[리히테나워 경신술(A랭크)]
[흑천마도연공법(SS랭크)]
== 영구 귀속 ==
[칼레시우스 창뢰검술(S랭크)]
[아틸리온 마력탐측술(S랭크)]
[동부식 마력연공법(A랭크)]
비어 있던 자리에 새로운 SS랭크 검술이 추가되었다.
페르디난드의 케르베스트 백화검술(白華劍術)을 마침내 손에 넣은 것이다.
‘교수가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 내 멋대로 가져가는 수밖에 없지.’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은 딱 한 사람만 전수받을 수 있는 일인전승의 검술이다.
하지만 페르디난드가 제자 육성에 전혀 뜻이 없는 게 문제였다.
소설 속에서도 남한테 가르쳐 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페르디난드가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명맥이 끊기게 될 것이다.
‘페르디난드에게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을 가르쳐 준 스승도, 설마 페르디난드가 이렇게 남을 가르치는 것에 흥미가 없는 인물일 줄은 예상 못 했겠지.’
어쨌든, 이걸로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은 나에게 전수되었다.
페르디난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쿨쿨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면…….’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침번을 서고 있던 조교수가 나를 힐끔 쳐다봤지만, 별다른 관심을 드러내지 않으며 하품을 했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나는 근처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해 주위에 마력을 뻗었다.
야영지에 몰려 있는 페르디난드 클래스의 교수들과는 별개로, 어둠 속에 숨어 나에게 접근해 오는 마력이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일지, 나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혈검장로회하고 마무리를 내지 못했지.’
클라우비체를 쓰러뜨리긴 했지만, 클라우비체에게서 암살 의뢰를 받은 혈검장로회하고는 아직 결판을 내지 못했다.
소설 설정대로라면, 혈검장로회는 의뢰자가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 의뢰를 수행하려 할 것이다.
‘마침 잘됐어.’
이건 좋은 기회다.
페르디난드에게서 손에 넣은 케르베스트 백화검술을 바로 시험해 볼 수 있으니까.
나는 혈검장로회의 암살자를 깊은 숲속으로 유인했다.
손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려 하는, 서늘한 백색 기운을 제어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