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117화 (117/212)

117화 절정급과의 정면 승부 (2)

“에르나스, 왜 그러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베리스리제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봤다.

“베리스리제, 도망가려면 도망가도 좋다.”

“뭐?”

“네가 도망가도 쫓아가기 어려워졌으니까.”

“무, 무슨 소리야?”

당혹스러워하는 베리스리제를 향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냥 도망가지 않는 걸 추천한다.”

“그건 또 무슨…….”

“그 편이 너한테 도움이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나는 베리스리제에게 등을 돌렸다.

“네가 아직도 검사라면 말이다.”

“……!”

숨을 삼키는 베리스리제를 내버려 둔 채,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숲이 우거진 숲속을 벗어나 좀 더 넓은 장소로 이동했다.

“후우…….”

장애물이 없는 초원.

그곳에서 나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어디선가 날아온 마력이 계속해서 내 몸에 도달하고 있었다.

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틸리온 마력탐측술로 끊임없이 마력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마력의 느낌을 보니, 슬슬 가까이 온 것 같은데…….’

나도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했다.

그러자 서쪽에서 거대한 마력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슈라이에르 본성 쪽에서 바로 달려온 모양인데, 다가오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에르나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베리스리제는 도망치지 않고 나를 따라온 모양이다.

“대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1분만 기다려.”

“뭐?”

“아니, 정확히는 30초 정도인가.”

“……?”

그리고, 30초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치 유성처럼 날아온 존재가 초원에 착지했다.

착지할 때 쿵 하는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질 정도로 엄청난 기세였다.

“…….”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노인이었다.

피부에 윤기가 없고 주름살이 많았다. 살이 없고 뼈와 가죽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 노인이… 경이로운 경신술로 먼 거리를 날아와 초원에 착지한 것이다.

“……!”

등 뒤에서 베리스리제가 숨을 삼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도 이제 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해했을 것이다.

‘도망가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한 이유도, 이해했겠지.’

베리스리제가 아직도 검사라면… 나와 살바토레의 대결을 이렇게 가까이서 관전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살바토레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한 목소리였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맞느냐.”

“…….”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살바토레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어깨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베리스리제 슈라이에르.”

“……!”

“내 아들이 죽는 모습을 봤느냐.”

지목당한 베리스리제가 몸을 움찔했다.

“다시 묻겠다. 내 아들이 죽는 모습을 봤느냐.”

“봐, 봤습니다.”

“그때 뭘 하고 있었느냐.”

“네?”

“너는 내 아들의 아내였다. 목숨을 걸고 남편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니었나.”

“……!”

베리스리제가 숨을 삼키자, 살바토레는 다시 다그쳤다.

“뭘 하고 있었느냔 말이다.”

“저, 저는…….”

“혹시 에르나스와 내통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

“아,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이……!”

“지금도 너는 멀쩡한 모습으로 에르나스와 함께 있다. 밧줄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도망칠 수 있을 텐데…….”

살바토레의 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설마 에르나스가 너의 정인(情人)이었느냐.”

“아닙니다! 저는 에르나스하고는……!”

“듣기 싫다. 더러운 매춘부 같은 것.”

베리스리제의 해명을 중간에 끊으며, 살바토레가 계속 말했다.

“너는 목숨 걸고 네 남편을 지켜야했다. 네가 멀쩡히 살아 있는 채 에르나스 곁에 있는 것만 봐도, 네가 부정(不淨)한 계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살바토레.”

살바토레의 비난이 중간에 끊겼다.

이번에는 내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정정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베리스리제는 자신이 아직 결혼하지 않은 몸이라고 하더군. 그러니 베리스리제는 네 아들의 아내가 아니다.”

“…….”

살바토레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무슨 말장난을 하는 거냐.”

“말장난이 아니지, 살바토레.”

나는 살바토레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들한테 여자를 가져다주고 ‘이제부터 이 여자가 네 아내다.’라고 선언하면 결혼이 성립하는 줄 알았나?”

“…….”

“당사자가 결혼을 했다는 자각조차 없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그렇게 말한 뒤, 나는 베리스리제를 힐끔 쳐다봤다.

“결혼 안 하길 잘 했다. 저런 시아버지를 모시면 골치 아프지.”

“에, 에르나스, 넌 대체…….”

베리스리제는 상당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내가 살바토레를 상대로 이렇게 독설을 퍼붓는 것이 이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녀석이구나,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살바토레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무슨 배짱으로 내 아들을 죽인 건지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놈이었던 것 같군.”

그렇게 말하며 살바토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나에게 빈첸티오는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그런 것 같더군.”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다. 비록 나보다는 느린 속도로 성장했지만, 그래도 우수한 녀석이었다. 몇 년 안에 신검합일(身劍合一)의 이치를 깨달아 절정의 경지에 도달할 걸로 보였지.”

살바토레의 입에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소중한 아들을… 네가 죽였다.”

“살바토레.”

나는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당신의 아들을 부당하게 살해한 것처럼 몰아가고 싶은 모양인데, 그런 수작은 통하지 않는다.”

“무슨…….”

“먼저 검을 뽑고 나를 죽이려 한 건 빈첸티오 쪽이다. 빈첸티오가 나에게 살의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나도 빈첸티오를 해치는 일은 없었겠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살바토레를 노려봤다.

“살바토레, 방금 전에도 너는 베리스리제를 죄인 취급했지. 베리스리제는 아무런 잘못한 게 없는데, 너는 일방적으로 다그치면서 베리스리제를 몰아 세웠다.”

“…….”

“그리고 지금은 나를 몰아 세우려 했지. 늙은 아비에게서 사랑하는 아들을 빼앗아 간 극악무도한 살인범 취급을 하려고 했던 거다.”

만약 내가 중간에 끊지 않았다면, 온갖 논리를 끝도 없이 늘어놓으면서 나를 비난했을 것이다.

“그게 당신 성격이다. 항상 자신만 옳고, 남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네놈,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알 만큼 아니까 하는 얘기다.”

소설에서 살바토레는 꽤 오랫동안 등장하는 악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바토레의 본성은 잘 알고 있었다.

“살바토레, 아들의 복수를 하러 온 거라면 응해 주마. 아버지로서 그런 권리 정도는 있겠지.”

“…….”

“하지만 본인이 부당한 일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굴지 마라. 지금 당신이 하려는 건, 그냥 사적인 보복일 뿐이니까.”

살바토레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계속 침묵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말을 섞을 가치가 없는 놈이구나.”

그렇게 중얼거린 뒤, 살바토레가 허리에 손을 댔다.

“됐다. 사죄의 말은 네 팔다리를 자른 뒤에 듣기로 하지.”

스륵.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시커먼 검이 뽑혀 나왔다.

칼날을 검게 칠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검은색을 지닌 금속으로 만든 것이다.

‘진철검(眞鐵劍)이군.’

진철은 ‘아다만트’라고도 불리는 검은색 금속이다.

‘미스릴’ 진은처럼 마력에 잘 반응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의 검기로 후려쳐도 진철검은 부러지지 않는다고 한다고 한다.

“벌레처럼 바닥을 꿈틀거리게 되면,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겠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살바토레.”

나는 진은검을 뽑아 들었다.

시커먼 진철검과는 반대로, 진은검의 칼날은 은백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

우리는 서로를 잠시 노려봤다.

내가 살바토레를 냉정히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바토레도 차가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들의 원수 앞에서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군.’

원래 잔챙이들은 조금만 도발해도 버럭 화를 내며 달려드는 법이다.

살바토레의 아들인 빈첸티오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살바토레는 내 도발에도 불구하고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일 없이, 냉정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어렵겠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달려드는 성격이었다면, 보다 상대하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살바토레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아무리 분노를 불태우고 있어도… 검사로서 한없이 냉정해질 수 있는 인물이다.

“……!”

아무런 징조도 없이, 살바토레가 움직였다.

빈첸티오와 똑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속도는 살바토레가 훨씬 빨랐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살바토레의 칼날이 내 목을 노렸다.

‘하지만……!’

쿵!

푸른색 검강이 전개된 진은검이 살바토레의 진철검을 튕겨 냈다.

아무리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빈첸티오와 움직임이 똑같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빈첸티오 상대로 꽤 오래 연습을 했으니까.’

내가 빈첸티오와 싸울 때, 전력을 다하지 않고 시간을 끈 이유가 이것이다.

빈첸티오는 살바토레가 모든 것을 전수한 수제자이기 때문에, 살바토레의 아틸리온 신뢰검술을 상당한 수준으로 재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살바토레와 싸우기 전에 사전 연습을 하기 딱 좋은 상대였던 것이다.

‘빈첸티오에게서 아틸리온 신뢰검술을 얻어 낼 수 있었다면 더 확실했겠지만… 능력 재현을 시도해 봤자 이해도가 부족해서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지.’

쿠웅!

다시 한번 진은검과 진철검이 격돌했다.

내가 공격을 또다시 막아 내자, 살바토레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곧바로 아틸리온 신뢰검술의 다른 기술을 사용했지만, 나는 그것도 꿰뚫어 봤다.

‘여기다.’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뒤, 역공을 가했다.

살바토레도 피하긴 했지만, 내심 놀랐는지 바로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사용해 살바토레를 추격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정면으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옆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검을 휘둘렀다.

“음……!”

쿠웅!

살바토레는 내 공격을 잘 막아 냈지만,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나는 창뢰검강을 전개한 상태였으니까.

‘진철검이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검기까지 단단하게 해 주지는 못 하지.’

창뢰검강이 격돌한 순간, 살바토레의 검기에 흠집이 생겼다.

내 검강이 살바토레의 검기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훨씬 더 견고했기 때문이다.

“……!”

놀라워하는 살바토레를 상대로, 창뢰검강을 사용하며 연속해서 공격을 펼쳤다.

검강과 검기가 부딪히면서 여러 번 굉음이 발생했다.

살바토레의 속도는 나보다 빨랐지만, 나는 살바토레의 움직임을 예측하면서 창뢰검강으로 계속해서 살바토레를 몰아세웠다.

“그렇군. 대충 알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살바토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빈첸티오와 싸우면서 아틸리온 신뢰검술을 상대하는 방법을 연습한 건가.”

“…….”

“그리고… 마력을 칼날 위에 고정시켜 날카롭고 견고하게 만들었군.”

그렇게 간파해 낸 뒤.

살바토레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훌륭하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

“전부 다 네가 생각한 거라면, 너는 정말로 대단한 녀석이다. 내 아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지.”

살바토레의 목소리는 지금까지하고는 살짝 달랐다.

아마 살바토레의 또 다른 측면인… 검술 도장을 이끄는 ‘스승’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직선적으로 움직이던 살바토레의 진철검이, 갑자기 뱀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 나를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아틸리온 신뢰검술의 정석에서 벗어난, 변칙적인 공격.

마치 서부 검술처럼 변화무쌍한 궤도로 살바토레의 칼끝이 파고 들어왔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살바토레는 초고속의 연속 공격으로 나를 몰아세웠다.

“검기를 강화하는 네 수법은 확실히 대단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대응할 수 있지.”

살바토레의 검기는 언제부터인가 더 견고해진 상태였다.

마력을 더 많이 불어넣어 강도를 올린 것이다.

마나 하트의 마력이 나보다 더 많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착각하지 마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쾅, 쾅, 콰앙!

뒷걸음치는 나를 향해 연속적인 공격을 펼치면서, 살바토레가 말했다.

“그 정도 준비만으로는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를 꺾을 수 없다.”

콰아앙!

내가 한쪽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면서, 살바토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한테 마무리를 하기 위해, 살바토레가 초고속의 일격을 펼쳤다.

하지만, 그 순간.

“착각하지 마라, 살바토레 아틸리온.”

“……!”

쿠웅!

진철검이 밀려나가고, 살바토레의 팔뚝에서 피가 튀었다.

살바토레는 이미 내 실력을 다 간파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다.

그 착각 덕분에… 비로소 내가 파고 들 만한 빈틈이 생겼다.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를 꺾을 준비는, 이미 다 마쳐 놓은 상태다.”

파천검강이 눈부시게 빛났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