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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116화 (116/212)

116화 절정급과의 정면 승부 (1)

깊은 숲속.

아틸리온 마력탐측술로 주위를 확인한 뒤, 나는 근처 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여기까지 오면 괜찮겠지. 너도 어디 앉아서 쉬어.”

“…….”

내 말을 듣고도, 베리스리제는 우두커니 서서 머뭇거릴 뿐이었다.

딱히 도망치려는 기색은 없었다.

“에르나스, 대체 어쩔 생각이지?”

“뭐가?”

“나를 납치해서 어떻게 할 건데?”

베리스리제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버지를 협박하기라도 할 생각이야? 그런 건 통하지 않아. 아버지한테 나는…….”

“그런 건 알고 있어.”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클라우비체에게 너는 그냥 이용 대상일 뿐이지. 너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되는 상황이라면 바로 손절할 거야.”

“그, 그래…….”

베리스리제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그 정도로 냉혹한 사람이야. 나를 납치했다고 해서 눈 하나 까딱 하지 않을 거야. 현재 방침을 유지하면서 계속…….”

“현재 방침을 유지하면 슈라이에르 가문은 멸망하겠지.”

“……!”

내 말을 듣고 베리스리제가 눈을 크게 떴다.

“슈라이에르 가문이 멸망한다고?”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선제공격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승패는 정해지지 않았어.”

“이미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야.”

“에르나스!”

“네 아버지가 방침을 바꾸지 않는 한, 슈라이에르 가문은 멸망할 수밖에 없어.”

“큭……!”

베리스리제가 입술을 깨물며 나를 노려봤다.

“역시 아버지와 교섭하기 위해 나를 납치한 거구나. 나를 통해서 아버지가 방침을 바꾸도록 할 생각이야?”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나는 클라우비체와 교섭할 생각이 전혀 없어.”

“그럼 대체 어쩌려는 건데?”

“그걸 굳이 지금 너한테 알려 줄 필요는 없지.”

“큭…….”

쌀쌀맞게 쏘아붙이자, 베리스리제가 화난 표정을 지었다.

조금씩 평소와 비슷한 상태로 돌아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베리스리제를 클라우비체와의 교섭에 써먹을 수는 없지.’

방금 한 얘기대로, 베리스리제를 갖고 협박해 봤자 클라우비체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빈첸티오를 죽이고 베리스리제를 납치해 갔다는 사실은 슈라이에르 진영을 동요시킬 것이다.

이건 아카데미 측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클라우비체와의 싸움이 끝난 이후의 일이다.

사실 내가 베리스리제를 데려온 건 훗날의 일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클라우비체를 쓰러뜨린 뒤, 남부를 수습하려면 베리스리제가 필요하니까.’

클라우비체를 쓰러뜨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구심점을 잃은 슈라이에르 가문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슈라이에르 가문을 따르던 남부의 중소 가문들은… 가까이에 있는 아그리파 가문에 의지하게 된다.

브랜틀리 아그리파의 힘을 키워 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발트펠트 가문이 있던 북부하고는 사정이 다르지.’

이런 상황을 막으려면 슈라이에르 가문이 완전히 무너지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아카데미가 개입해서 슈라이에르 가문을 재편하고, 아그리파 가문을 견제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그 방법은… 베리스리제를 새로운 가주로 앉히는 것이다.

‘어차피 베리스리제는 슈라이에르 가문의 후계자였고.’

베리스리제 체제의 슈라이에르 가문은 아카데미에 종속되는 형태가 될 것이다.

어차피 베리스리제는 아직 그래듀에이트 하급이기 때문에, 가문을 안정시키려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카데미는 슈라이에르 가문을 통해 남부를 통제하고 아그리파 가문을 견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베리스리제의 얼굴을 살폈다.

‘결국 중요한 건 베리스리제의 의지야.’

내 계획은 베리스리제가 클라우비체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의지로 슈라이에르 가문의 미래를 개척하려 할 때만 성립된다.

만약 베리스리제가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그녀는 소설과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었던, 소설과 똑같은 결말을.

* * *

‘에르나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채, 베리스리제는 복잡한 심정에 휩싸였다.

지금 베리스리제는 에르나스에게 납치당한 상태다. 하지만 에르나스는 베리스리제에게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베리스리제가 알아서 자기를 따라와 줄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내가 도망치면…….’

그렇게 생각하다가, 베리스리제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에르나스는 금방 나를 따라잡겠지.’

도망쳐 봤자 소용없다.

그렇다면 괜한 시도는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괜히 도망치려 했다가, 에르나스의 태도가 차가워지면…….’

베리스리제는 조금 두려워졌다.

언제부터인가 베리스리제는 에르나스의 눈치를 보게 된 상태였다.

“베리스리제.”

그때 갑자기 에르나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한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뭐?”

“하루아침에 미망인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야.”

“미, 미망인?”

“빈첸티오와 결혼한 것 아니었나?”

“……!”

베리스리제가 흠칫 놀랐다.

“아, 아니야! 결혼식도 안 했고, 아직 아무것도…….”

“아, 그런가.”

“그래…….”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베리스리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어.’

에르나스는 베리스리제가 결혼할 사람을 살해했다.

그것도 평범한 결혼이 아니라 슈라이에르 가문을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하지만 베리스리제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빈첸티오가 에르나스의 칼날에 쓰러질 때, 베리스리제는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쁨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내가 어떻게 된 걸까.’

슈라이에르 가문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이 많은 남자와의 결혼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베리스리제는 빈첸티오가 죽는 모습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은 에르나스에게 반항도 하지 않고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문득, 에르나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에르나스는 베리스리제가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여 빈첸티오의 정략결혼에 응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감을 느낀 듯했다.

줄곧 에르나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베리스리제 입장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얘기였다.

‘무엇이 옳은 걸까.’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로서.

슈라이에르 가문의 후계자로서.

무엇보다… 한 사람의 검사로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걸까.

베리스리제는 고민에 빠졌다.

“베리스리제.”

그때, 에르나스가 베리스리제를 불렀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의 휴식은 어려울 것 같다.”

“……?”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된다는 얘기는 아닌 듯했다.

에르나스는 이미 검을 뽑고 있었다.

“혈검장로회 놈들이 우리를 포착한 것 같다.”

“……!”

어두운 숲속에서, 악의가 담긴 칼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정기적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도망치는 건 어렵겠군.’

멀리서 꽤 많은 인원이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숫자가… 최소 50명은 되는 것 같았다.

‘대부분 그래듀에이트 하급인 것 같지만 말이야.’

혈검장로회도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애송이 하나 잡지 못해서 장로급 암살자가 연달아 죽어 나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인원을 평소보다 많이 투입한 모양이다.

‘이래서는 전혀 암살이 아니군.’

쓴웃음이 나왔다.

암살자는 암살을 해야 제 실력을 발휘하는데 말이다.

‘혈검장로회도 완전히 궁지에 몰린 상태야.’

클라우비체 못지않게 혈검장로회도 곤경에 처한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악수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왔군.’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검은색 옷을 입은 암살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리 없이 달려드는 암살자들을 확인하면서,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윽!”

“컥……!”

칼레시우스 창뢰검술 제4식 편뢰가 펼쳐졌다.

채찍처럼 꿈틀거리는 검기가 잔챙이들을 한꺼번에 쓸어 버렸다.

이어서 조금 더 실력이 뛰어난 암살자들이 덤벼들었지만,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사용해 위치를 바꿨다.

“……!”

파파팟!

종횡무진 움직이면서 검을 휘둘렀다.

차례차례 쓰러지는 암살자들의 시체 사이를 질주하며, 나는 다시 한번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했다.

‘이제야 오는군.’

그리고, 마침내 내 배후에서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암살자가 나타났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장로급 암살자일 것이다.

내가 잔챙이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팔린 틈을 노리려는 것 같았다.

‘소용없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 제2식 무뢰를 펼쳤다.

몸을 회전시키면서 휘두른 칼날이 잔챙이의 목을 베었고, 동시에 배후에서 덤벼들던 장로급 암살자의 검을 막아 냈다.

“……!”

암살자의 눈이 커졌다.

그래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빠르게 파고들며 나를 공격하려 했다.

양손에 든 단검이 번뜩이며 내 급소를 노렸다. 나는 푸른 검기를 유지하면서 그 공격을 모조리 튕겨 냈다.

암살자의 단검술은 충분히 날카롭고 위협적이었지만, 이미 나한테는 대응할 능력이 있었다.

“커헉!”

측면에서 달려든 잔챙이 암살자의 팔을 날려 버린 뒤, 창뢰검강을 펼쳤다.

혈검장로회의 암살검술은 빠르고 날카롭지만 무게감이 없다. 파천검강이 아니라 창뢰검강으로도 충분히 파훼할 수 있었다.

“……!”

파팍!

오른손의 단검은 튕겨져 나갔고, 왼손의 단검은 부러졌다.

암살자가 다급히 뒤로 물러서며 품에 손을 넣었지만 이미 늦었다.

“윽……!”

촤악!

피를 뿜으며 장로급 암살자가 쓰러졌다.

근처에서 주춤거리고 있던 잔챙이 암살자까지 해치우니, 주위가 조용해졌다.

지금 숲속에서 멀쩡히 살아 있는 건 나하고… 베리스리제뿐이었다.

“도망치지 않았군.”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쳤지.”

구석에 서있던 베리스리제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지금 네 실력이면 내가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붙잡을 수 있을 텐데.”

“그건 그렇지.”

“빈첸티오와의 싸움을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너, 정말로 어마어마하게 강해졌구나.”

베리스리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듀에이트 상급 중에서도 너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이제 너를 쓰러뜨리면 절정급이 나서야겠지.”

“나 하나 잡겠다고 절정급이 나서면 좀 모양새가 이상하지.”

“그래, 혈검장로회에도 절정급의 암살자가 있다고 하지만, 너 하나를 잡기 위해…….”

“베리스리제, 잠시만.”

나는 베리스리제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왜 그래?”

“…….”

입을 다문 채 정신을 집중했다.

어디선가… 미약한 마력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건…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이다.’

누군가가 마력을 날려서 주위를 탐색하고 있다.

그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나도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유효 범위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건… 저쪽의 유효 범위가 더 넓다는 뜻이지.’

내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유스레흐트로 확인해 보면 S랭크로 나온다.

이것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한 사람은… 한 명뿐이다.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의 창시자… 그 노검사(老劍士)만이 가능하지.’

살바토레 아틸리온.

방금 베리스리제가 말한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가,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역시 이쪽으로 움직인 건가.’

클라우비체는 살바토레를 아카데미와의 싸움에 투입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카데미의 절정급 교수들을 막으려면 살바토레가 필요하니까.

그런데 살바토레가 아들의 원수를 갚겠다고 이쪽으로 달려왔으니, 클라우비체의 작전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걸로 클라우비체는 궁지에 몰리겠군.’

아카데미는 파죽지세로 진격할 테고, 머지않아 슈라이에르 본성까지 도달할 것이다.

그러면 클라우비체와의 결전이 시작된다.

나도 늦지 않게 그쪽까지 가야할 것이다.

‘문제는… 나한테 살바토레가 접근하고 있다는 거지.’

이미 살바토레는 내 위치를 확인했다.

살바토레의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은 유효범위가 어마어마하게 넓으니,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서 살바토레와 싸워야 한다.’

아르테클라스 대주교나 미하일 발트펠트 때와는 다르다.

나 혼자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에 맞서야 한다.

‘절정급과의 일대일 대결…….’

문득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무렵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고심하는 무력한 약골에 불과했다.

세리느와의 첫 대결에서도 패배를 각오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

나는 말없이 검을 쥐었다.

내가 단순히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의 정점에 도전할 힘이 있는지, 확인할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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