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남부 정벌 (3)
‘한발 늦었군.’
살바토레 검술 도장 안으로 들어서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살바토레가 부하들을 데리고 이미 출발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클라우비체가 살바토레를 끌어들이는 것에 성공한 건가.’
소설에서 클라우비체는 궁지에 몰리자 살바토레를 아군으로 끌어들인다.
살바토레는 남부의 중립 세력인데, 뛰어난 그래듀에이트를 많이 거느리고 있다.
특히 살바토레는 절정급의 경지에 도달한 검사이기 때문에 클라우비체에게는 마지막 희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클라우비체가 살바토레 측에 제공한 건…….’
넓은 연무장에 들어섰을 때.
연무장 반대편에서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한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
‘베리스리제…….’
클라우비체의 외동딸, 베리스리제.
그녀가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클라우비체는 베리스리제를 살바토레에게 넘겨준 건가.’
소설에서 클라우비체는 살바토레 측과의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살바토레의 아들이자 수석 제자인 빈첸티오에게 베리스리제를 시집보내려 한 것이다.
‘원래 베리스리제를 누구와 결혼시키느냐는 클라우비체에게 중요한 카드였어.’
클라우비체에게 베리스리제는 그냥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와 결혼시켜야 가장 이득이 될지 항상 고민해 왔다.
루퍼스나 하인리히, 심지어 에르나스와 결혼시키는 것도 고려했었고… 소설에서는 주인공 아칸델과 결혼시키는 것까지 검토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이니… 지금 당장 살바토레의 협력을 얻기 위해 빈첸티오와 결혼시키려는 거지.’
어쨌든 분위기를 살펴보니… 내가 한발 늦긴 했지만, 아주 늦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내 느낌이긴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부부가 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때 중년 남자가 나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정말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맞나?”
“그래, 맞다.”
“…….”
반말로 대꾸하는 내 얼굴을 보면서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살바토레 검술 도장의 수석 사범인 빈첸티오 아틸리온이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가르침을 받을까 해서.”
“가르침?”
“살바토레 검술 도장이 워낙 유명해서 말이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바토레 아틸리온이 창시한 아틸리온 신뢰검술(神雷劍術)… 남부 검술 중에서도 손꼽히는 속도를 자랑한다더군. 한 수 배우고 싶다.”
“웃기는군!”
빈첸티오가 한쪽 손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네가 남부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러 가문을 습격한 건 이미 알고 있다!”
“한 수 배우러 찾아갔던 것뿐이다만.”
“거짓말하지 마라! 슈라이에르 가문에 우호적인 가문들을 각개격파하고 있었던 것이지!”
이건 빈체티오의 말이 맞다.
그동안 나는 남부를 돌아다니며 슈라이에르 측에 도움을 줄 만한 중소 가문들을 차례차례 격파하고 다녔다.
여기 살바토레 검술 도장을 찾아온 것도, 이곳에 슈라이에르 가문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빈첸티오, 여기가 슈라이에르 가문에 우호적인 곳이었나?”
“뭐라고?”
“살바토레 검술 도장은 줄곧 중립을 유지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
“베리스리제가 있는 걸 보니, 최근에 우호 관계를 맺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그걸 알 수는 없지.”
빈첸티오가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베리스리제, 너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
처음으로 말을 걸자, 베리스리제가 몸을 움찔했다.
“아카데미에 있을 줄 알았는데… 남부로 돌아온 건가?”
“나, 나는…….”
베리스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지금은…….”
“…….”
“그러니까…….”
나를 향해, 베리스리제가 뭔가 설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겠군.”
“뭐, 뭐?”
“보나마나 네 아버지가 너를 팔아넘긴 거겠지.”
“……!”
내 직설적인 표현에 베리스리제가 눈을 크게 떴다.
“거기 있는 빈첸티오는 예전부터 너를 눈독 들여왔지. 네 아버지가 살바토레의 힘을 얻기 위해 너를 팔아넘긴 모양이군.”
“에, 에르나스, 이건…….”
“말이 너무 심하군,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빈첸티오가 목소리를 높이며 끼어들었다.
“팔아넘기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물건처럼 말하는가!”
그렇게 소리치며 빈첸티오가 베리스리제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베리스리제 양은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왔다! 스스로 내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팔아넘기느니 뭐니… 천박한 표현을 사용하지 마라!”
“천박한 건 그쪽이겠지, 빈첸티오.”
“뭐라고?!”
빈첸티오가 눈을 치켜떴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알기로 너는 나이가 40대 초반이다. 하지만 베리스리제는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지. 네 나이의 절반도 되지 않는 어린 여자에게 눈독 들이다니… 너무 음흉한 것 아닌가?”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 말을 듣고 빈첸티오가 다급히 반박했다.
“나는 베리스리제 양이 검술 대회에서 보여 준 당찬 모습에 매력을 느꼈을 뿐이다!”
“어린 후배에게 매력을 느꼈으면 선배로서 검술을 가르쳐 줄 생각을 해야지, 아내로 맞아들일 생각을 하나? 정신 상태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추잡한 놈.”
“뭣……!”
“물론, 나이의 벽을 넘어선 순애(純愛)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적어도 너는 그렇지 않지. 베리스리제의 마음을 무시하고 강제로 자기 아내로 삼으려 했으니 말이다.”
“뭐, 뭐가 강제라는 말이냐! 아까 말했듯이 베리스리제 양은 스스로 이곳에 왔다!”
“목줄을 채워서 억지로 끌고 와야만 강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렇게 쏘아붙이며, 나는 베리스리제를 쳐다봤다.
“베리스리제,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에, 에르나스…….”
“너는 정말로 네 의지로 이곳에 있는 건가?”
“나는…….”
베리스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슈라이에르 가문의 후계자로서, 그 의무를…….”
말꼬리를 흐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베리스리제, 나는 네가 꽤 괜찮은 녀석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뭐……?”
“루퍼스나 고르트 같은 녀석들은 언제부터인가 나와의 경쟁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나하고 맞먹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정면에서 나와 부딪히는 것 자체를 피하게 되었지.”
“…….”
“하지만 너는 달랐다. 최근까지도 너는 나를 꺾고야 말겠다고 내 앞에서 전의를 불태우곤 했지.”
루퍼스가 나를 두려워해 뒷걸음칠 때도, 베리스리제는 내 앞길을 가로막으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네 그런 부분을 인정하고 있었다.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다운 자존심이 있는 녀석이라고 말이다.”
“에, 에르나스…….”
“그러니, 솔직히 안타깝다.”
나는 베리스리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의 명령대로 중년 남자에게 안기는 것이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네 모습이, 정말로 안타깝다.”
“……!”
“베리스리제, 지금 네 모습이 슈라이에르 가문의 후계자로서 바람직한 모습일까?”
눈을 크게 뜨는 베리스리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네가 꿈꾸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 텐데? 한 사람의 검사로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당당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이 네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모습 아닌가?”
“…….”
“착각하지 마라, 베리스리제. 너는 슈라이에르 가문의 후계자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네 아버지인 클라우비체의 도구로서, 일방적으로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베리스리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자 빈첸티오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이상한 소리로 베리스리제 양을 현혹시키지 마라, 에르나스!”
“딱히 현혹시키는 게 아니다. 함께 아카데미에서 경쟁하던 동기로서, 현실을 지적해 줬을 뿐이지.”
나는 빈첸티오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아까 너한테 했던 말도, 단순히 사실을 지적했던 것에 지나지 않다.”
“뭐, 뭐라고?”
“네가 어린 여자에게 눈독 들이는 음흉한 색골이라는 사실 말이다.”
“……!”
마침내 빈첸티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베리스리제를 내버려 둔 채, 연무장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다가왔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네가 정말로 죽고 싶은가 보구나!”
스륵!
빈첸티오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좋다! 그렇게 죽는 걸 바란다면 내가 몸소 죽여 주마! 네가 원하던 대로, 아틸리온 신뢰검술을 사용해서!”
“…….”
“어서 검을 뽑아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나는 빈첸티오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그 대신 원래 자리에서 몸을 떨며 서 있는 베리스리제에게 시선을 향했다.
“베리스리제, 너도 봤겠지?”
“뭐……?”
“빈첸티오가 먼저 검을 뽑았고, 나를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러니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정당방위라 할 수 있다.”
“……!”
나는 한 수 가르쳐 달라고 도장에 찾아왔을 뿐이다.
빈첸티오가 먼저 검을 뽑고 나를 죽이겠다고 소리치니, 어쩔 수 없이 반격하는 것이다.
사실… 내가 지금까지 남부의 여러 중소 가문들을 격파할 때도 매번 비슷했다.
“그러니, 베리스리제.”
“에, 에르나스…….”
“만약 네 남편이 죽어서 네가 하루아침에 미망인이 되더라도… 내 책임이 아니라 네 남편 책임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
베리스리제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뒤, 나는 다시 빈첸티오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분노가 극에 달한 목소리로, 빈첸티오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거냐? 너처럼 무례한 놈은 처음 본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빈첸티오.”
나는 빈첸티오와 눈을 마주치며 대꾸했다.
“너한테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
“거짓말하지 마라……!”
“사실이다, 빈첸티오.”
방금 전까지 빈첸티오에게 내뱉은 독설들은, 그냥 소설 속의 평가를 되풀이했을 뿐이다.
내가 지금 빈첸티오를 향해 검을 뽑는 건 순전히 전략적인 판단 때문이다.
저래 뵈도 빈첸티오는 절정급에 가까운 그래듀에이트 상급이다.
빈첸티오를 내버려 두면 슈라이에르 가문에 합류할 테고, 아버지인 살바토레와 호흡을 맞추며 아카데미에 큰 피해를 입힐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혼자 있을 때 해치워둬야 한다.
‘그리고… 베리스리제를 확보하는 것도 필요하니까.’
슈라이에르 가문과의 싸움이 끝난 뒤를 대비해… 베리스리제를 확보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러니 방해가 되는 빈첸티오를 여기서 제거해 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빈첸티오.”
검을 들고 자세를 잡으면서, 나는 비웃는 목소리를 던졌다.
“아틸리온 신뢰검술로 나를 죽인다고 했으면서,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거지? 아틸리온 신뢰검술은 그렇게 느릿느릿한 검술인가?”
“네놈……!”
빈첸티오가 연무장 바닥을 박차고 나한테 달려들었다.
“아버지가 만든 아틸리온 신뢰검술을 욕보이지 마라……!”
허공을 가르고 초고속으로 검이 날아왔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니, 아틸리온 신뢰검술을 욕보이는 건 내가 아니다.”
“……!”
콰앙!
푸른색 검강으로 빈첸티오의 검을 막아 내면서 차갑게 쏘아붙였다.
“오늘 여기서 패배하면서, 네 스스로 아틸리온 신뢰검술을 욕보이게 하는 거지.”
경악하는 빈첸티오를 향해 창뢰검강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