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113화 (113/212)

113화 남부 정벌 (2)

“빌어먹을……!”

클라우비체는 집무실에서 홀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카데미와의 전면 전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 슈라이에르 가문은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게다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혼자서 남부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슈라이에르 가문의 배후를 유린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내 계획이……!”

원래 클라우비체는 슈라이에르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대규모 군단을 만들 계획이었다.

그 힘으로 제국을 장악할 생각이었는데, 제대로 군단을 만들기도 전에 가문 전체가 아카데미와 에르나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이렇게 슈라이에르 가문이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사이… 이그니아스 가문은 동부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고, 아그리파 가문은 착실히 내실을 다지고 있다.

어떻게든 아카데미를 격퇴한다고 해도, 큰 타격을 입은 슈라이에르 가문이 이그니아스 가문과 아그리파 가문을 꺾을 수 있을까.

‘어딘가에서 새로 전력을 끌어와야 하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흑천마교였다.

하지만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헨리 랭커스터가 마교의 힘을 빌리려 했다가 결국 랭커스터 가문이 멸망하지 않았는가.

‘혈검장로회만으로는 부족해. 어디선가 더 끌어올 만한 전력이…….’

어디에서 힘을 빌려와야 할까.

클라우비체는 지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가주님,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뭐냐.”

집무실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클라우비체는 짜증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

“베리스리제 아가씨가 귀환하셨습니다. 가주님께 인사를 올리고 싶다고…….”

“베리스리제가?”

클라우비체의 외동딸이자, 슈라이에르 가문의 후계자.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던 베리스리제가 이제야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됐다.”

“네?”

“굳이 그 녀석한테 시간을 쓸 이유가 없다. 나한테 전할 정보가 있다면 서면으로 제출하라고 해라.”

“아, 알겠습니다.”

베리스리제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약 1년 전이다.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외동딸인데, 클라우비체는 굳이 얼굴을 마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클라우비체에게 베리스리제는 그냥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그것도 이제는… 쓸모없는 도구였다.

‘무능한 것.’

베리스리제는 아카데미에서 에르나스를 한번도 꺾지 못했다.

최소한의 견제만 해 줬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아카데미에 남아서 간첩 노릇을 해 줬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 정도 판단도 못 하고 헐레벌떡 남부로 돌아오다니.’

지금 베리스리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시간 낭비였다.

‘지금 중요한 건 어디서 새로운 전력을 끌어올 수… 아니, 잠깐만.’

바로 그때.

클라우비체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베리스리제를 쓸모 있게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하나 떠오른 것이다.

* * *

“가주님은 지금 바쁘십니다, 베리스리제 님.”

“그렇군…….”

베리스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사를 올리고 현재 상황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얼굴을 보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다.

“루클레치아, 요새 아버지는 좀 어떠시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요새 심기가 별로 편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래, 역시 그런가.”

“굳이 만나 뵙지 않는 편이 나으실 겁니다.”

루클레치아는 클라우비체의 최측근이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로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버지한테 도움이 되어 드렸어야 하는데.”

“베리스리제 님은 최선을 다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에르나스를 한번도 꺾지 못했으니까.”

“…….”

“아버지도 실망하셨겠지.”

베리스리제는 아버지가 얼마나 냉혹한 인물인지 알고 있다.

친딸이라도 쓸모없는 인물이라 판단하면 가차 없는 태도를 취한다.

“아버지가 부르실 때까지 얌전히 대기하고 있을게.”

“베리스리제 님, 가주님은…….”

바로 그때.

클라우비체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리스리제, 기다려라.”

“……!”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베리스리제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버지, 그동안…….”

“인사는 됐다.”

베리스리제의 말을 끊으면서, 클라우비제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리스리제, 네가 맡아 줄 임무가 있다.”

“……!”

아버지의 말에 베리스리제는 흠칫 놀랐다.

“마, 맡겨 주세요, 아버지. 무슨 임무든 성실히 수행하겠습니다.”

“잘 됐군.”

클라우비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살바토레 아틸리온의 이름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베리스리제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가문에도 소속되지 않은,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죠.”

남부를 대표하는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라고 하면, 슈라이에르 가문의 클라우비체와 아그리파 가문의 브랜틀리가 꼽힌다.

하지만 남부에는 절정급의 경지에 도달한 검사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살바토레 아틸리온였다.

“60여 년 전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독자적인 검술 도장을 세운… ‘마에스트로’라 불리는 검사죠.”

“그래, 우리 가문에서도 여러 번 영입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지. 아그리파 가문하고도 줄곧 거리를 두고 있는, 남부의 중립 세력이다.”

살바토레 검술 도장은 세계 각지에서 여러 검사들이 몰려온다.

짧게 검술을 배우고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아예 눌러앉아 살바토레의 충실한 부하가 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카데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독립 세력으로서 상당한 존재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살바토레 측에서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어떤 것이었죠?”

“베리스리제, 너와의 혼담이었지.”

“……!”

베리스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버지, 살바토레는 여든이 넘은 노인이라 들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

클라우비체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 상대는 살바토레의 친아들이자 수석 제자인 빈첸티오다. 2년 전에 있었던 검술대회에서 네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었다더군.”

“아, 빈첸티오 사범이라면…….”

베리스리제는 기억을 되새겼다.

심사위원이었던 건장한 중년 남자가 자신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넸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도, 빈첸티오 사범도 나이가 마흔을 넘었…….”

“베리스리제.”

나이가 두 배나 되는 중년과의 혼담에 난색을 표하자, 클라우비체가 바로 말을 끊었다.

“당시 나는 혼담을 일시 보류했었다. 네 혼처를 어떻게 할지 정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아, 아버지…….”

“나중에 하인리히나 루퍼스, 혹은 에르나스와 결혼시키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네? 에르나스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베리스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저하고 에르나스를 결혼시킬 생각이 있으셨다고요?”

“당시 에르나스는 세리느와 약혼하고 있었지만, 세리느가 에르나스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약혼이 파기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

“아, 아버지, 그러면…….”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에르나스는 물론이고 다른 가문의 후계자들하고도 가능성이 없어졌다. 다른 혼처를 찾아야지.”

“…….”

침묵하는 베리스리제 앞에서, 클라우비체가 계속 말했다.

“네가 빈첸티오의 아내가 된다면, 살바토레 검술 도장이 슈라이에르 가문의 아군이 된다. 살바토레는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이고, 빈첸티오도 절정급에 가까운 상급이지. 그들의 협력을 얻으면 지금의 불리한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아버지, 하지만…….”

“베리스리제.”

클라우비체가 매서운 눈빛으로 베리스리제를 쏘아봤다.

“가문을 위해, 명령을 수행해라.”

“…….”

아버지의 절대적인 명령 앞에서, 베리스리제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 *

사흘 뒤.

베리스리제는 살바토레 검술 도장에 도착했다.

루클레치아를 비롯한 클라우비체의 심복들과 함께였다.

“이렇게 와주셔서 기쁩니다, 베리스리제 양.”

“아, 네, 빈첸티오 사범…….”

자리에 앉아있는 중년의 남성 앞에서 베리스리제는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빈첸티오는 건장한 체격과 호남형 얼굴을 지닌 남자다.

다만 나이가 마흔이 넘고… 베리스리제로서는 전혀 끌리지 않는 상대라는 점이 문제였다.

“이제 살바토레 검술 도장과 슈라이에르 가문은 한몸이 된 것입니다, 마에스트로.”

그런 베리스리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클레치아는 가장 상석에 앉은 노인을 향해 열심히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그렇게 자꾸 치근대지 않아도 된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마른 노인에게서, 갈라지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슈라이에르 가문의 현재 상황은 알고 있다. 클라우비체도 내 도움이 필요해서 지난날에 무시했던 혼담을 재추진하는 거겠지.”

“마에스트로, 그건…….”

“됐다. 나는 내 아들이자 수석 제자의 희망을 이루어 주고 싶었을 뿐이니, 불만은 없다.”

그렇게 말하며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직접 클라우비체를 만나서 앞으로의 사항을 의논하겠다. 슈라이에르 가문은 현재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이니, 하루 빨리 재정비하는 게 낫겠지.”

“가, 감사합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죽어 가는 늙은이다.

하지만 저 노인이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모든 이를 단숨에 몰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대단한 검사가 ‘마에스트로’ 살바토레였다.

“그러면 아버지,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됐다.”

“네?”

“번잡한 곳에 따라올 필요 없다. 너는 아내 될 사람과 함께 여기에 있어라.”

살바토레가 빈첸티오와 베리스리제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이 시국에 결혼식을 올리는 건 어렵겠지만, 부부의 연을 맺는 건 가능하겠지.”

“……!”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베리스리제는 숨을 삼켰다.

도움을 요청하는 심정으로 루클레치아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시키는 대로 하라는 듯이 눈짓을 할 뿐이었다.

결국 루클레치아는 살바토레와 부하들을 안내하기 위해 도장을 떠났고… 베리스리제는 도장에 남겨지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슈라이에르 가문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두 배인 중년 남자하고 갑자기 동침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줄이야.

‘지금쯤 세리느 바스티안은 아카데미의 쟁쟁한 그래듀에이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싸우고 있을 텐데, 나는…….’

룸메이트인 세리느를 떠올리며, 베리스리제가 눈물을 참고 있었을 때.

빈첸티오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리스리제 양,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워낙 고집이 센 분이라.”

“아, 네…….”

“아버지는 나름대로 저희를 생각해 주셔서 하신 말씀이실 테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빈첸티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베리스리제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베리스리제 양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빈첸티오 사범…….”

“일단 서로를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하죠.”

그렇게 말하며, 빈첸티오는 베리스리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베리스리제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윽……!’

빈첸티오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잠시 방심했었다.

하지만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빈첸티오의 내면에 숨겨진 시커먼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아무리 신사적인 척 해도…….’

베리스리제는 빈첸티오의 눈을 살폈다.

빈첸티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베리스리제를 쳐다보는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음흉한 빛이 숨겨져 있었다.

아무리 신사적인 척 해도, 이 사람은 자신의 절반도 안 되는 나이의 소녀를 아내로 요구하는 남자인 것이다.

“일단 도장 내부부터 안내해 드리지요.”

“앗…….”

빈첸티오가 베리스리제의 어깨를 안은 채 끌어당겼다.

저항하지 못한 채 끌려가면서, 베리스리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결국 나는, 이렇게…….’

세리느에 이어 에르나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지켜봤던 에르나스의 행적은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주체적이었다.

지금도 에르나스는 변함없이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며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베리스리제는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해, 나이가 두 배 차이 나는 중년 남자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에르나스, 나는…….’

과거를 떠올렸다.

어렸을 적, 처음 참여한 무도회에서 에르나스의 관심을 받아 들떴던 날을.

그때 결국 에르나스에게 바람맞은 뒤, 계속해서 에르나스를 적대시해 왔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결국 자신은 에르나스에게 인정받는 것을 바랐던 것 같다.

그게 어떤 의미에서든, 에르나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계속 에르나스를 꺾어 보려고 발버둥 쳤던 거지만…….

‘이제 두 번 다시 너에게 인정받을 일은 없겠구나.’

어쩔 수 없다.

슈라이에르 가문의 모든 인간은 가주인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의 도구니까.

베리스리제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체념하면서, 베리스리제는 눈물을 삼키며 빈첸티오를 따랐다.

하지만, 바로 그때.

“빈첸티오 사범, 잠시 나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갑자기 정문 앞에 나타난 사람이 있는데…….”

검술 도장의 검사 중 한 명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빈첸티오에게 말했다

“본인이…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라고 합니다.”

“……!”

방금 전까지 베리스리제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사람.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가 지금 여기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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