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남부 정벌 (1)
‘지금쯤 아카데미에서 클라시온 요새를 공략하고 있겠지.’
작은 마을의 식당에서 허기를 해결하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슈라이에르 가문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 아카데미에서 선제공격을 해야 해.’
6검 회의에 참석하기 전, 나는 페르디난드와 세리느, 클로에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설명했다.
그리고 아카데미 상층부를 설득하여 슈라이에르 가문에게 선제공격을 개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클라우비체를 가장 먼저 쓰러뜨려야 하니까.’
클라우비체는 교활한 인물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골치 아픈 일이 많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클라우비체가 책략을 준비하기 전에 아카데미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
‘물론, 아카데미 단독으로 슈라이에르 가문을 무너뜨리는 건 쉽지 않겠지.’
서부에 쳐들어온 발트펠트 가문을 격퇴하는 것하고는 상황이 다르다.
이번에는 아카데미가 슈라이에르 가문의 본거지인 남부로 쳐들어가는 거니까.
‘그러니, 내가 움직인다.’
아카데미는 서쪽에서 남부 지역으로 진군하여 슈라이에르 가문을 압박한다.
그리고 나는 다른 루트로 우회하여 남부로 들어가… 슈라이에르 가문의 배후를 칠 것이다.
‘양쪽에서 슈라이에르 가문을 흔드는 거지.’
아카데미가 강하게 슈라이에르 가문을 압박할수록, 내가 파고들 빈틈이 생긴다.
반대로 내가 슈라이에르 가문의 후방을 날카롭게 찌르면 아카데미가 진군하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클라우비체는 절대로 나를 무시하지 못해. 내 움직임에 휘둘리게 되겠지.’
클라우비체의 야망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나를 제거해야 한다.
궁내부가 나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지정해 버리면 일이 꼬이게 되니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손에 넣기 위해 가장 걸림돌이 되는 존재가 나였다.
‘그렇게 남부를 휘젓고 다니면서… 클라우비체를 몰아세우면 되는 거야.’
물론, 남부에는 슈라이에르 가문뿐만 아니라 아그리파 가문도 있다.
하지만 아그리파 가문은 일단 상황을 지켜볼 것이다.
브랜틀리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카데미와 슈라이에르 가문의 싸움을 일단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슈라이에르 가문은 남서부, 아그리파 가문은 남동부이기도 하고…….’
브랜틀리는 동부의 이그니아스 가문을 더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슈라이에르 가문과는 달리, 이그니아스 가문은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으며 세력을 크게 확장해 나갈 테니까.
‘그러고 보니 하인리히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루퍼스는 이미 아버지와 합류하기 위해 아카데미를 떠났을 거고, 베리스리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하인리히가 아카데미를 떠나 아그리파 가문으로 돌아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녀석은 아직도 아카데미에서 나를 꺾고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어떻게 보면 하인리히가 가장 순수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아카데미에서 공정하게 경쟁하여 자력으로 리히테나워 대공을 쟁취하겠다는 꿈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으니까.
다른 녀석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판을 깨버리려 하는데, 하인리히만큼은 초심을 버리지 않고 계속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브랜틀리도 하인리히한테 돌아오라고 연락할 사람은 아니란 말이지…….’
왠지… 나는 하인리히가 끝까지 아카데미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제국 남서부, 클라시온 요새.
남부와 서부의 경계에 위치한 이 요새는 슈라이에르 가문의 주요 거점 중 하나다.
요새의 지휘관은 클라우비체의 사촌인 칼리스루페 슈라이에르.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한 인물로, 클라우비체에게 충성을 바치는 검사였다.
“베리스리제 아가씨는 이미 출발하셨나?”
“네, 잘 설득해서 보냈습니다.”
부하의 대답을 듣고, 칼리스루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가주님과 합류하셨으면 좋겠군.”
베리스리제는 얼마 전에 일부 측근들과 함께 아카데미에서 도망쳐 나왔다.
아카데미 상층부가 슈라이에르 가문과 적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칼루시온 요새에 도착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알려 준 덕분에, 칼리스루페도 상황을 더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솔직히 베리스리제 님이 알려 주신 정보를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그래, 아카데미는 완전히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에게 장악당한 것 같더군.”
베리스리제가 전해 준 얘기에 따르면, 에르나스의 지도 교수와 측근들이 아카데미 상층부를 설득했다고 한다.
사전에 에르나스가 어떻게 움직여야할지 다 지시해 놨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정치적인 문제들은 가주님이 판단하시겠지.”
“그렇겠지요.”
“우리가 할 일은 이 요새를 지키는 것뿐이다.”
그렇게 말하며 칼리스루페는 성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카데미에서 몰려온 병력이 공성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역시 머릿수 자체는 많지 않군.”
“그래도 대부분 그래듀에이트일 겁니다.”
“그래, 절정급의 경지에 도달한 교수들도 있겠지.”
아카데미는 그래듀에이트 중심의 소수정예.
이쪽은 머릿수는 많지만 대부분 일반병이다.
요새를 지키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시간을 끈다. 그러면 가주님이 원군을 보내 주시겠지.”
“네, 최대한 버텨야 합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카데미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카데미의 그래듀에이트들은 공성 장비 같은 건 사용도 하지 않았다.
경신술을 사용하여 성벽을 뛰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듀에이트 중에서도 이 요새 위까지 올라올 수 있는 건 일부 고수들뿐이다! 침착하게 대처하면 막아 낼 수 있다!”
칼리스루페는 성벽 위를 뛰어다니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간혹 성벽 위까지 올라오는 놈이 있으면 직접 검을 휘둘러 처단하기도 했다.
“잘 하고 있다! 이대로 계속 버텨라!”
그렇게 소리치며 칼리스루페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을 때.
갑자기 성벽 아래에서 솟구치는 검은색 그림자가 있었다.
“당신은……!”
“오랜만이군, 칼리스루페.”
‘흑쇄검(黑鎖劍)’ 안겔라 베르틴스키.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 중 한 명이 성벽 위로 올라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안겔라 베르틴스키! 당신이 선봉장인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남부 출신이라 지리에도 밝고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안겔라가 검을 치켜들었다.
그 칼날에는 소름끼치는 검은색 검기가 전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 혼자서 온 건 아니다. 발렌티아노 교수와 페르디난드 교수, 욜스 교수… 현재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지도 교수들이 총출동했다. 알드바우트 총장만이 아카데미를 지키고 있지.”
“……!”
그렇다면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가 네 명이나 남부로 쳐들어왔다는 얘기가 된다.
가주인 클라우비체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교수들한테만 신경 쓰면 안 된다, 칼리스루페.”
“뭐라고?”
“학생들도 만만치 않거든.”
“……!”
그 순간.
칼리스루페는 배후에서 살기를 느꼈다.
다급히 대처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커헉!”
푸욱!
순식간에 접근해 온 푸른색 머리의 학생이, 날카로운 찌르기로 칼리스루페의 몸통을 꿰뚫었다.
“네, 네 녀석은……!”
그 얼굴을 확인하고 칼리스루페는 눈을 크게 떴다.
아그리파 가문의 후계자… 하인리히 아그리파가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채 칼리스루페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컥……!”
이어진 공격에 치명상을 입고, 칼리스루페는 성벽 위에 쓰러졌다.
설마 절정급의 교수들이 아니라 일개 학생에게 쓰러지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수고했다, 하인리히.”
“아닙니다.”
“하지만 꾸물거리지 마라. 저쪽에서는 욜스 클래스와 함께 세리느 바스티안이 맹활약하고 있으니 더 열심히 해야 할 거다.”
“걱정 마십시오. 에르나스도 아니고 세리느 따위에게 뒤처지지는 않습니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칼리스루페는 안겔라와 하인리히의 대화를 들었다.
그들은 칼리스루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가주님, 조심하십시오…….’
아카데미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했다.
이 사실을 클라우비체에게 직접 전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칼리스루페는 숨을 거뒀다.
* * *
“칼루시온 요새가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고?!”
클라우비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칼루시온 요새는 슈라이에르 가문의 주요 거점 중 하나다.
칼리스루페를 비롯해 실력 있는 그래듀에이트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수비 병력도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루 만에 함락된단 말인가.
“놈들이 절정급의 교수들을 다수 파견한 건가?”
“발렌티아노, 안겔라, 페르디난드, 욜스… 이렇게 네 명이 왔다고 합니다.”
“알드바우트 총장을 제외하고 전부 다 우리를 치기 위해 움직였다는 건가……!”
원래 아카데미에는 알드바우트 총장을 제외하고 여섯 명의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이 있었다.
아킬레온이 미하일 발트펠트에게 살해당하고 이번에 칼레온도 이탈했으니, 이제는 네 명만 남아 있다.
그 네 명이 전부 남부로 쳐들어온 것이다.
“미하일 발트펠트가 서부로 쳐들어왔을 때도 세 명밖에 나서지 않았는데, 남부에 네 명이나 보내다니…….”
속전속결로 끝내려는 걸까.
클라우비체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어지는 상황이었다.
“가주님, 동부로 병력을 보내서 비어 있는 아카데미 본진을 치면 어떻겠습니까?”
“아카데미 측에 교섭을 제안하면서 시간을 끄는 방법도…….”
참모들이 각자 의견을 말했지만,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클라우비체가 지도를 노려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을 때,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다.
“가주님, 오틀란트 가문에서 방금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오틀란트?”
오틀란트는 이곳에서 북쪽, 그러니까 중부 지역에 가까운 곳에 영지가 있는 백작 가문이다.
대대로 슈라이에르 가문에게 충성을 바쳐 온 집안이기도 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나타나서 사로잡으려고 했는데… 큰 피해만 입고 놓쳐 버렸다고 합니다.”
“……!”
“남쪽으로 향했는데, 슈라이에르 가문을 칠 거라고 공공연하게 얘기했다는 것 같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클라우비체는 이를 갈았다.
그동안 에르나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 6검 회의가 끝난 뒤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건가.
“혈검장로회에 정보를 전달해라! 놈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서쪽에서는 아카데미의 절정급 교수들이, 북쪽에서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내려오고 있다.
두 방향에서 다가오는 적들의 움직임에, 클라우비체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 *
휘익!
바람을 가르며 숲길을 통과했다.
오틀란트 백작의 추격대는 이미 따돌린 뒤 오래였다.
‘다음은 유발리스 자작의 영지로 쳐들어가야겠군.’
유발리스 자작도 슈라이에르 가문을 지지하는 귀족이다.
가만 내버려 두면 슈라이에르 가문에 원군을 보내 줄 테니, 내가 한번씩 방문해 주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놔야 한다.
이렇게 몇몇 가문을 손봐주면 다른 가문들도 내 습격을 두려워해 함부로 병력을 외부로 내보내지 못할 테고… 결국 클라우비체는 원하던 규모의 군단을 구성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슈라이에르 가문의 거점들을 공략하면서 조금씩 클라우비체에게 접근하면 된다.
“…….”
문득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해 주위를 살피자, 무서운 속도로 나에게 접근해 오는 자들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혈검장로회인가.’
하르페시온 장로가 죽은 뒤 새롭게 투입된 암살자들일 것이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이 두 명이나 있군.’
좌측과 우측에 커다란 마력을 지닌 놈이 한 명씩 있다.
장로급 암살자를 두 명 투입한 것 같았다.
“…….”
나는 주저 없이 우측으로 움직였다.
바람을 가르고 일직선으로 움직여, 숲 속에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던 암살자를 덮쳤다.
“……?!”
다급히 몸을 날려 내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칼레시우스 제4식 편뢰(鞭雷)를 날려 그 움직임을 막은 뒤, 곧장 거리를 좁혀 창뢰검강을 먹여 줬다.
“컥……!”
촤악!
목에서 피를 뿜으며 암살자가 쓰러졌다.
혈검장로회의 장로급 암살자일 테지만, 딱히 이름도 궁금하지 않았다.
“……!”
함께 움직이던 잔챙이 암살자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주춤했다.
좌측에서 접근하던 장로급 암살자도 움직임을 멈춘 상태였다.
나는 칼날에 검강을 유지한 채로 차갑게 내뱉었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덤벼라.”
그들 누구도, 내 상대는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