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6검 회의 (5)
후덕한 인상이었던 암살자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하르페시온 장로인가.’
소설에서는 다른 장면에서 등장했던 인물이다.
혈검장로회에 비슷한 스타일의 장로가 한 명 더 있는 게 아니라면, 하르페시온 장로가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듀에이트 상급이겠군.’
흑천마교와 마찬가지로, 혈검장로회도 독자적인 영약이 있다.
흑천마교처럼 인명을 희생시켜서 만드는 건 아니지만, 수명이 짧아지는 등의 부작용이 있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이 사용하는 혈검장로회의 암살검술이라.’
하르페시온은 두 손에 하나씩 단검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품 안에는 더 많은 단검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방금 특이한 편검기를 쓰더군.”
하르페시온이 나를 노려보면서 말을 건넸다.
“편검기답지 않게 상당한 위력이었다. 안겔라 베르틴스키의 베르틴스키 흑쇄검술을 참고한 건가?”
베르틴스키 흑쇄검술은 검은색 검기를 사방으로 뻗으면서 적들을 유린하는 안겔라의 검술이다.
내가 안겔라에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기 때문에, 하르페시온의 안목은 제법 날카롭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검기가 푸른색이군. 미하일 발트펠트를 쓰러뜨릴 때도 푸른색의 검기를 사용했다고 하던데.”
“역시 혈검장로회는 정보력이 대단하군.”
그렇게 대꾸하면서 나는 하르페시온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긴, 혈검장로회도 앞으로 벌어질 혼란에 대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겠지. 안 그런가, 하르페시온 장로?”
“…….”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하르페시온이 맞았던 모양이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챘지?”
“내 정보력도 대단한가 보지.”
그렇게 대꾸하면서 나는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하르페시온이 경계하면서 마력을 끌어올리는 걸 알 수 있었다.
“……!”
어둠 속에서 하르페시온이 좌측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쪽 방향에 있던 나무를 발로 차며 내 측면을 노렸다.
‘날카로운 움직임이다.’
파앗!
하지만 그 공격은 나에게 닿지 못했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 제4식 편뢰(鞭雷)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윽……!”
채찍처럼 꿈틀거리는 검기가 내 측면을 보호했다.
하르페시온은 단검으로 파고들기 어렵다는 걸 깨닫고 뒤로 물러섰다.
“…….”
나는 검기의 채찍으로 내 몸을 지켰다.
아르테클라스 대주교가 사용하던 사복검술을 떠올리면서.
꿈틀거리는 검기의 궤적이 마치 보호막처럼 나를 방어해 줬다.
“대단하군.”
짧게 중얼거린 뒤, 하르페시온이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맴돈다고 해도 속도는 매우 빠르다.
혈검장로회의 암살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하르페시온도 재빠른 움직임을 특기로 하는 그래듀에이트였다.
‘어떻게든 내 빈틈을 찾아서 파고들 생각이겠지.’
이윽고 하르페시온이 달려들어 왔다.
오른손의 단검으로 내 검기를 쳐내고, 왼손의 단검으로 빈 공간을 파고 들어오는 움직임이다.
양손의 검기가 각자 다른 형태로 변화한 상태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기술도 훌륭하군.’
상대는 혈검장로회의 ‘장로’까지 된 베테랑 암살자.
그 공격은 매우 날카로울 것이다.
‘하지만.’
하르페시온이 접근하는 것에 맞춰, 나는 검기를 전환했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이 아니라, 발트펠트 금강검술의 검기로 바꾼 것이다.
꿈틀거리던 푸른 검기가 견고한 금색 검기로 바뀌자, 하르페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
발트펠트 금강검술의 육중한 일격이 하르페시온을 덮쳤다.
하르페시온은 채찍 같은 검기를 파훼하기 위해 전력으로 달려들던 중이라 몸을 피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단검을 움직여 금색 검기를 막아 냈을 뿐이다.
“윽……!”
검기와 검기가 충돌한 순간, 하르페시온의 단검에서 마력이 튀었다.
발트펠트 가문이 자랑하던 금색 검기가 하르페시온의 검기를 분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하르페시온은 어떻게든 내 검을 튕겨 내고 거리를 벌리려 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한 단계 출력을 올린다.
‘파천검강.’
꽈앙!
금색 검기가 검강이 되면서, 하르페시온의 검기와 함께 단검까지 분쇄해 버렸다.
숨을 삼키며 경악하는 하르페시온의 가슴을, 금색 검강이 훑고 지나갔다.
“크윽……!”
촤악!
피가 뿜어져 나왔다.
다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하르페시온이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힌 탓이다.
불안정한 자세로 하르페시온이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새로운 단검을 잡고 자세를 바로 하는 건 너무 늦다.
품에서 단검을 꺼내자마자 나한테 집어 던질 것이다.
‘장로급 암살자의 단검 투척은 충분히 위협적이지.’
하지만 소용없다.
나는 이미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펼치는 중이었으니까.
바람처럼 움직여 단검을 피하면서, 하르페시온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컥……!”
엄청난 피를 쏟아내며 하르페시온이 무릎을 꿇었다.
치명상이었다.
‘진은검을 손에 넣으면서, 검강을 펼치는 게 더 쉬워졌어.’
나는 은색 칼날을 응시했다.
진은검은 검기에 잘 반응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검기뿐만 아니라 검강에도 잘 반응한다.
덕분에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의 푸른 검기에서 발트펠트 패검술의 금색 검기로 전환하는 것도, 그걸 또 파천검강으로 승화시키는 것도 매우 수월해졌다.
‘발트펠트 가문의 금색 검기는 전개할 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단점이었는데, 그것조차 보완되었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마력을 뻗어 주위를 살폈다.
아까 중간에도 확인했던 거지만, 근처에는 더 이상 마력을 지닌 인물이 없었다.
다른 암살자도, 슈라이에르 가문 쪽 사람도 주위에 없는 것 같았다.
“이,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그때 하르페시온이 바닥에 쓰러진 채 말했다.
“혈검장로회는 내가 당했다는 걸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면 곧바로 다른 장로들을 보내서 너를 말살하려 할…….”
“그런 건 나도 다 알고 있으니,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나는 하르페시온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혈검장로회 상층부는 나를 죽이기 위해 전력을 많이 투입하겠지. 이미 너희들은 슈라이에르 가문에 줄을 댄 상태니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을 거다.”
“……!”
“이그니아스 가문이나 아그리파 가문은 암살자들하고는 상종하지 않을 테고, 모략을 좋아하는 슈라이에르 가문과 손을 잡아야 훗날 지분을 얻을 수 있지.”
혼란스러운 정세를 틈타 야심을 불태우고 있는 건 혈검장로회도 마찬가지다.
슈라이에르 가문이 제국을 장악하면, 자신들이 제국의 음지(陰地)를 지배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아. 클라우비체는 제국을 장악해도 너희 같은 암살자들을 계속 중용할 테고 말이야.”
“…….”
“문제는 클라우비체가 제국을 장악할 일이 없다는 것이지.”
하르페시온에게서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잠시 뒤 하르페시온은 완전히 축 늘어졌다.
숨이 끊어졌다는 걸 확인하고 나는 자리를 떴다.
‘클라우비체도 하르페시온이 실패했다는 걸 금방 눈치채겠지.’
클라우비체는 혈검장로회에게 에르나스 말살을 재촉하면서, 동시에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할 것이다.
에르나스를 죽이는 것과 다른 가문들을 제압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클라우비체의 계획이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클라우비체가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듯이.
나 또한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 * *
“칼레온 클래스의 교수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고?”
“평교수들, 조교수들… 심지어 조교들까지 거의 대부분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알드바우트 총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학생이 아닌 교직원은 외부로 자유롭게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대량으로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칼레온 교수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며칠 전에 바깥으로 나갔지. 관계가 있는 건가?”
“글쎄요. 그렇다면 칼레온 교수와 같은 날에 나가지 않았겠습니까?”
“흐음…….”
갑작스러운 교수들의 대량 이탈.
이건 무슨 의미일까.
“아무래도 에르나스의 말대로 된 것 같군요.”
“페르디난드 교수?”
총장실 안으로 페르디난드가 들어왔다.
고고학 연구에만 매진하는 이 교수가 총장실을 찾아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에르나스의 말대로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중부 지역으로 떠나기 전에, 에르나스가 저한테 얘기를 해두고 갔습니다.”
“중부 지역? 에르나스는 근처에 있는 고대 유적을 탐사하러 가지 않았나?”
“그건 제가 서류를 조작한 겁니다.”
“……!”
태연하게 말하는 페르디난드의 태도에 알드바우트가 눈을 크게 떴다.
“에르나스는 6검 회의에 참석하러 간 겁니다. 칼레온 교수도 마찬가지였고요.”
“6검 회의……!”
“에르나스가 말하더군요. 6검 회의가 열리면 검술명가들 사이의 갈등이 더 심해져, 본격적인 무력 충돌이 시작될 거라고 말입니다.”
페르디난드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칼레온 교수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칼레온 클래스에 있던 이그니아스 가문의 추종자들도 칼레온 교수를 따라 동부로 떠났겠죠.”
“무슨 뜻인지 알겠군…….”
알드바우트는 페르디난드의 짧은 설명만 듣고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눈치챘다.
“그렇다면, 루퍼스 이그니아스도 이미 아카데미를 떠났겠군.”
“네, 칼레온 클래스의 교수들이 데려갔겠죠.”
칼레온이 아카데미를 이탈했다면, 그 아들인 루퍼스도 더 이상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어차피 루퍼스가 아카데미의 정점에 올라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니까.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들이 아카데미에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여, 가장 우수한 학생이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등극한다… 이걸 더 이상 존중해 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가문 쪽 사람들도 이탈할 가능성이 있군.”
“네, 각 가문들은 지지 세력을 모아 패권을 다툴 생각인 것 같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아카데미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방관했을 것이다.
하지만 발트펠트 가문의 서부 침공 이후, 아카데미는 더 이상 방관자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에르나스의 말에 의하면, 검술명가들은 결국 아카데미도 제압하려 할 거라고 합니다.”
“그렇겠지.”
검술명가들의 목표는 무력으로 제국을 장악하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아카데미 같은 강력한 세력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곤란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검술명가들이 아카데미로 쳐들어오는 걸 대비해야 하는 건가.”
알드바우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페르디난드가 고개를 저었다.
“에르나스는 우리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선제공격? 대체 무슨 명분으로?”
발트펠트 가문 때는 그쪽이 먼저 서부로 침공해 왔다.
하지만 지금 선제 공격을 한다면 아카데미가 다른 지역으로 침공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페르디난드가 고개를 돌렸다.
“저 학생들이, 에르나스를 대신해서 설명해 드릴 겁니다.”
“……!”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학생이 총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얼굴을 확인한 알드바우트가 눈을 크게 떴다.
“너희들은…….”
“실례하겠습니다, 총장님.”
앞장 선 갈색 머리카락의 여학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뒤를 따르던 하늘색 머리카락의 여학생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세리느 바스티안과 클로에 유스부르크입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저희한테 맡기고 간 작전 계획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의 작전 계획.
그것은… 아카데미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조리 지시하는 것이었다.
* * *
“하르페시온 장로는 아직도 연락이 없나?
“네, 전혀 연락이 없습니다.”
“…….”
클라우비체는 집무실 의자에 앉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연락이 없는 걸 보면, 하르페시온이 에르나스를 죽이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하르페시온이 에르나스한테 당했나 보군. 혈검장로회에 연락해서 하르페시온을 대신할 장로급 암살자를 보내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이미 보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얘기는 해둬야겠지.”
그렇게 지시를 내린 뒤, 클라우비체는 벽에 걸려 있는 지도를 응시했다.
지도에는 클라우비체가 움직일 수 있는 병력들이 복잡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슈라이에르 가문 직속의 병력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들의 병력까지 모조리 동원해 강력한 군단을 구성해야 한다.’
클라우비체의 계산대로라면, 서부를 침공했던 발트펠트 가문 이상의 대규모 군단을 만들 수 있다.
그 군단을 움직여 클라우비체는 제국을 장악할 생각이었다.
‘슈라이에르 가문이 다른 검술명가들을 꺾고, 에르나스까지 제거해 버리면… 차기 황제도 슈라이에르 가문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게 되지.’
아직 어린 황녀가 차기 황제로 등극하기 전에, 모든 걸 완수해야 한다.
클라우비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좋아. 그러면 일단 처음에는…….’
클라우비체가 지도를 보면서 군단을 어떻게 움직일지 구상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집무실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라우비체 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다급히 집무실로 뛰어 들어온 가신이, 클라우비체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잊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카데미에서 출발한 병력이 서부 황야를 가로질러 클라시온 요새로 접근하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클라시온 요새는 서부 지역과 남부 지역의 경계에 위치한 요새로, 슈라이에르 가문의 주요 거점 중 하나다.
아카데미가 클라시온 요새로 접근하고 있다는 건, 슈라이에르 가문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카데미가 왜 벌써 움직여?”
아직 슈라이에르 가문도 본격적으로 군사를 움직이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어떻게 아카데미가 가장 먼저 움직인단 말인가.
“아카데미 측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는 건가?”
“아닙니다. 명분을 내세우고 있는 상태입니다만, 그것이…….”
“말해봐라.”
클라우비체의 재촉에, 그가 우물쭈물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게… 얼마 전에 서부를 침공한 발트펠트 가문의 배후에 슈라이에르 가문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데다가…….”
“……!”
“거기에 그치지 않고 대규모 군단을 조성해 황실을 위협하려 하고 있으니, 황실 직속의 기관으로서 역적을 토벌하러 나선다고 합니다……!”
콰앙!
클라우비체가 휘두른 주먹에 집무실 책상이 박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