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110화 (110/212)

110화 6검 회의 (4)

혈검십자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르페시온 장로를 추종하는 8명의 암살자가 상관의 명령을 따라 어둠 속을 달렸다.

표적은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오늘 밤에 반드시 해치우라는 명령이다.

하르페시온 장로 입장에서도 최대한 빠르게 해치우는 편이 좋았다.

이미 에르나스는 혈검십자회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눈치챈 상황이니까.

6검 회의가 열리는 장소를 떠나 혼자서 이동하고 있을 때가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 * *

클라우비체가 떠나면서, 6검 회의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건 브랜틀리였다.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겠지.”

“브랜틀리 님.”

“여기서 어떤 합의를 하든, 클라우비체가 없는 상태라면 의미가 없다. 네 말대로 클라우비체를 제국의 공적으로 지정해 다 함께 토벌하기로 결의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

여기서 그렇게까지 진행될 가능성은 없다.

무엇보다 브랜틀리와 칼레온이 호응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클라우비체가 어떤 행동에 나설지 예측하기 어렵다. 나는 바로 영지로 돌아가 클라우비체의 움직임에 대비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브랜틀리는 칼레온을 쳐다봤다.

“칼레온, 너도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것이 좋을 거다.”

“브랜틀리…….”

“여기서 방향성을 잘못 잡는다면, 이그니아스 가문은 순식간에 몰락할 테니까.”

“……!”

숨을 삼키는 칼레온을 내버려 둔 채, 브랜틀리가 회의장을 떠났다.

“젠장……!”

칼레온이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에르나스, 한 가지만 묻겠다.”

“네, 칼레온 님.”

“네가 정말로 란즈슈타인 가문의 가주 역할을 할 수 있는 거라면… 동부에 남아 있는 란즈슈타인 가문의 그래듀에이트들도 움직일 수 있는 거냐?”

그 질문을 듣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란즈슈타인 가문의 주요 그래듀에이트들은 아버지와 함께 영묘로 들어갔습니다. 란즈슈타인 가문을 지지하던 동부 가문들의 병력을 끌어오는 건 가능하겠지만… 현실적인 얘기는 아니겠죠.”

“그렇군…….”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란즈슈타인 가문은 그냥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내 말을 듣고 칼레온이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뜻이냐?”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

칼레온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칼레온의 이그니아스 가문은 란즈슈타인 가문과 마찬가지로 동부 지역이 본거지다.

지금 칼레온은 동부 지역의 중소 가문들을 굴복시켜 세력을 확대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란즈슈타인 가문이 병력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라면, 동부 지역에서 이그니아스 가문을 제지할 만한 세력이 없으니까.’

칼레온이 동부를 접수하여 이그니아스 가문의 몸집을 불린다면, 순식간에 최대 세력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

문제는 칼레온이 직접 동부로 가서 진두지휘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아카데미를 떠나야 한다.

‘만약 칼레온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아들인 루퍼스도 아카데미를 떠나겠지.’

어차피 루퍼스가 아카데미에서 정점에 올라 리히테나워 대공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루퍼스도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칼데아스 사무관.”

칼레온이 칼데아스에게 시선을 향했다.

“궁내부에서는 아직 리히테나워 대공을 어떻게 선정할지 정식으로 공표한 적이 없소. 내 말이 맞소?”

“네,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선정 기준이 바뀌어도 문제는 없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결국 차기 황제가 되실 황녀 전하를 보좌할 수 있는 사람이면 되는 것 아니오?”

“……!”

칼레온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칼데아스도 알아차렸다.

굳이 아카데미에서 정점에 오른 인물을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가장 강한 힘을 지닌 가문에서 리히테나워 대공을 맡아 황녀에게 힘을 실어 주면 되는 것 아니냐.

지금 칼레온이 하는 말은 이것이었다.

‘클라우비체도 지금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그동안 6대 검술명가는 아카데미에서 리히테나워 대공을 선정한다는 것에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건 6대 검술명가가 서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랭커스터 가문과 발트펠트 가문이 무너지면서 팽팽한 균형이 무너져 내렸다.

또한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의 독주 상태가 지속되면서, 기존의 규칙을 뒤집어엎고 싶다는 심리가 생기게 되었다.

‘어차피 루퍼스도 베리스리제도 아카데미에서는 희망이 없어. 그러니 판을 엎어 버리고 싶어진 거지.’

칼레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하고 자리를 떴다.

이걸로 검술명가의 가주들이 전원 퇴장하게 되었다.

남아 있는 건 나와 칼데아스, 그리고 유스트 바스티안과 올레아나 클라리온뿐이다.

“이것 참… 일이 커졌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유스트와 올레아나가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들은 딱히 당황한 표정은 아니었다.

유스트도 나름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고, 올레아나도 나이에 걸맞게 노련하다.

지금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칼데아스 님, 좀 여쭤보겠습니다.”

“아, 네, 말씀해 주시죠, 유스트 님.”

“만약 검술명가들이 사적으로 싸움을 벌일 경우… 황실에서 개입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

유스트의 직접적인 질문에 칼데아스가 잠시 침묵했다.

“발트펠트 가문이 서부를 침공했을 때도, 황실에서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랬지요.”

“그때 사례를 감안해서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원래 황실은 가문들의 다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현재 황제가 병석에 누워 있는 중이라, 바깥 상황에 신경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도 하다.

“물론, 황궁이 있는 중부 지역을 위협하면 얘기가 다르겠습니다만.”

발트펠트 가문이 서부로 쳐들어왔을 때, 칼레온이 이그니아스 가문의 병력을 끌고 오지 못한 이유가 이것이다.

동부에서 서부로 빠르게 달려오려면 중부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황궁 근처를 지나쳐야 한다.

이건 황권을 위협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반역과 다름없다.

“알겠습니다.”

유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쳐다봤다.

“에르나스 님, 이미 다 고려하고 계시겠지만… 앞으로 검술명가들은 제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본격적인 행보에 나설 겁니다.”

“네, 그렇겠죠.”

“아카데미 안에서는 승산이 없으니, 아카데미 바깥에서 승부를 내려는 것이죠.”

그렇게 말하고 유스트가 칼데아스를 힐끔 쳐다봤다.

“궁내부로서도, 만약 특정 가문이 압도적인 존재가 되어 군림하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

칼데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궁내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차기 황제의 황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나을지 마지막까지 고민한 뒤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런 여지를 남겨 두기 위해, 지금까지 리히테나워 대공과 관련된 사항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에르나스 님.”

유스트가 나를 쳐다보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카데미의 정점에 오르시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검술명가까지 모조리 꺾어 버리셔서, 본인이야말로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에 걸맞은 인물이라는 걸 증명하셔야 합니다.”

나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유스트의 분석이 아주 정확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까 말씀하셨듯이 에르나스 님은 란즈슈타인 가문의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우신 상황입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르나스 님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없는 건 아니죠.”

유스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에르나스 님은 일부러 칼레온 님을 자극하신 것 아닙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칼레온 님이 아카데미를 떠나 동부로 돌아가면, 에르나스 님이 아카데미를 장악하기 쉬워지지 않습니까.”

나는 말없이 미소로 대답했다.

내 반응을 확인하고 유스트도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에게는 아카데미가 있지.’

아카데미는 이제 더 이상 평범한 교육기관이 아니다.

발트펠트 가문의 서부 침공을 격퇴한 것처럼, 강대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아카데미를 내 뜻대로 움직이려면 칼레온 이그니아스가 걸림돌이었다.

칼레온은 평범한 교수가 아니라 칼레온 클래스를 이끄는 지도 교수이며, 아카데미에서도 손꼽히는 발언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칼레온이 자진해서 동부로 가 준다면… 내가 아카데미를 장악하기 쉬워진다.

“다 알고 계시는 것 같으니, 제가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러면 저는 동부로 돌아가서 이그니아스 가문의 동향을 주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유스트는 나에게 줄을 서기로 마음을 먹었고, 앞으로 내 아군으로서 활동해 줄 것이다.

“아, 에르나스 님.”

“네?”

“세리느하고는 잘 지내고 계십니까?”

“세리느는 제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입니다.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죠.”

“흐음…….”

내 대답을 듣고, 유스트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로 세리느에게서 마음이 떠나신 것 같군요, 에르나스 님.”

“…….”

“그래도, 언제든지 마음이 변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세리느한테 잘 얘기해 둘 테니.”

그 말을 남기고 유스트는 자리를 떴다.

그러고 보니… 유스트는 세리느를 강제로 에르나스와 약혼시킨 장본인이었다.

“유스트 님은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에르나스 님이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시면 황녀 전하의 약혼자가 되시는 거고, 세리느 님하고는…….”

“그냥 하시는 말씀이시겠죠. 별것 아닐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칼데아스 님.”

유스트는 내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된 뒤에도 황녀와 결혼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눈치챈 상태다.

어쩌면 유스트는 나중에 나하고 세리느를 재약혼시키는 것까지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후후, 그러면 저도 동부로 돌아가서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지요.”

“먼 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레아나 님.”

올레아나도 돌아가려는 것 같아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에르나스 님, 아마 페르펙티오 님도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파악하고 계실 겁니다.”

“…그렇겠죠.”

“페르펙티오 님이 계속 영묘 안에서 조용히 계신다는 건, 에르나스 님의 행보를 인정하고 계신다는 뜻일 겁니다.”

올레아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건투를 빌겠습니다, 에르나스 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올레아나 님.”

그렇게 올레아나도 자리를 떴고, 나와 칼데아스만 남게 되었다.

“에르나스 님, 이 모든 걸 의도하셨다면… 정말 대단하신 분이군요.”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데아스 님.”

“아닙니다. 저희 궁내부로서는 역시 에르나스 님을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선정하고 싶으니까요.”

쓴웃음을 지으면서 칼데아스가 말했다.

“하지만 에르나스 님, 아까 얘기가 나왔듯이… 특정 가문이 압도적인 힘으로 군림하게 되면 저희도 다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에르나스 님을 믿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칼데아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에르나스 님… 이제 아카데미로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요, 아카데미로는 편지만 보낼 겁니다.”

“네? 그러면 대체 어디로…….”

“남부로 갈 겁니다.”

“……!”

흠칫 놀라는 칼데아스 앞에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으니까요.”

* * *

혈검장로회의 암살자들은 당혹감을 느꼈다.

6검 회의가 열리던 곳에서 빠져나온 에르나스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로 귀환하려면 여기서 서쪽으로 가야 한다.

왜 남쪽으로 향하는 것일까.

‘고민할 필요 없다. 명령대로 에르나스를 죽이기만 하면 된다.’

눈짓으로 의견을 교환한 뒤, 암살자들은 에르나스를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에르나스가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통과할 때 일제히 습격하기로 했다.

‘지금이다!’

8명의 암살자가 어둠 속에서 뛰쳐나왔다.

무방비한 모습으로 지나가던 에르나스를 사방에서 덮치려 했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 못 했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에르나스에게서 채찍 같은 검기가 뻗어 나와 주위를 휩쓴 것이다.

‘편검기(鞭劍氣)?!’

본래 편검기는 실용성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에르나스가 펼친 채찍 같은 검기는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순식간에 주위를 휩쓸어 버리고, 8명 전부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잔챙이들은 다 정리했다.”

암살자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숲속에서, 에르나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나와라, 장로.”

그 말을 듣고.

하르페시온 장로가 입술을 깨물며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부하들이 싸우는 도중에 에르나스의 빈틈을 찌를 생각이었지만… 에르나스가 이미 다 눈치채고 있다면 기습도 의미가 없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혈검장로회의 장로급 암살자 상대로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오히려 네 자신감이 대단한 거겠지.”

에르나스가 검을 치켜들었다.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덤벼 봐라.”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검기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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