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6검 회의 (2)
6검 회의는 소설 속에서도 나왔던 중요한 이벤트다.
제국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검술명가의 가주들이 집결한 것이었지만,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갈등만 심화되었다.
결국 아카데미에서 건전한 경쟁을 통해 리히테나워 대공을 정한다는 구도가 무너지고, 검술명가끼리의 갈등이 피 튀기는 혈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
나는 탁자를 둘러싸고 앉은 다섯 명을 살펴봤다.
칼레온 이그니아스.
브랜틀리 아그리파.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
유스트 바스티안.
올레아나 클라리온.
공작위를 지닌 검술명가의 가주 세 명, 후작위를 지닌 명문가의 가주 두 명이다.
여기에 내가 참가하면서, 6검 회의가 성립하게 되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물론, 검술명가의 가주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것이다.
이건 단순히 가문의 위상이나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어째서 네가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군.”
브랜틀리가 칼데아스에게 시선을 향했다.
“칼데아스 사무관, 설명해 줬으면 좋겠소.”
“브랜틀리 님, 이건…….”
“혹시 궁내부는 이미 에르나스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내정한 것이오?”
브랜틀리가 대놓고 질문하자, 칼레온과 클라우비체도 심각한 표정으로 칼데아스를 노려봤다.
세 사람 모두 자신의 후계자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궁내부에서 이미 에르나스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내정했다면, 그들 모두 닭 쫓던 개 꼴이 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습니다, 브랜틀리 님.”
칼데아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재 궁내부에서는 리히테나워 대공 후보자들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황녀 전하를 보좌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누구일지 고민하고 있으니,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
브랜틀리가 입을 다문 채 칼데아스를 노려보자, 이번에는 칼레온이 입을 열었다.
“믿기 어렵소.”
“클라우비체 님…….”
“아까 말하지 않았소? 궁내부가 이번에 6검 회의를 소집한 건 에르나스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이미 내정한 게 아니라면, 어째서 궁내부가 에르나스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오?”
칼레온이 타오르는 눈으로 칼데아스를 노려봤다.
“만약 궁내부가 이미 에르나스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확정한 상태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소.”
“칼레온 님, 진정하십시오.”
“어떻게 진정하란 말이오? 이렇게 거짓말로 농락당하고 있는데!”
칼레온이 목소리를 높이자 칼데아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리히테나워 대공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저희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크흠……!”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소리를 듣고, 칼레온이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면 더 이상 추궁하기 어렵다.
“확정을 안 했을 뿐이겠지.”
하지만, 클라우비체는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았다.
“궁내부에서는 이미 에르나스를 지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 빨리 에르나스를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확정하고 싶을 텐데.”
“클라우비체 님, 그게 무슨…….”
“에르나스는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하고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여 황권을 강화할 생각이라고 하더군.”
클라우비체가 나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차기 황제 폐하의 권위를 걱정하는 궁내부 입장에서는, 에르나스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어 주는 게 좋겠지.”
“오해입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공정하게 아카데미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을…….”
“아카데미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을 뽑을 거라고?”
클라우비체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그렇게 공표해라, 칼데아스 사무관.”
“……!”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는데, 궁내부에서는 어떤 공식 발표도 없는 상태다. 리히테나워 대공을 부활시키겠다는 것도, 아카데미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을 선정하겠다는 것도, 전부 세상에 돌고 있는 비공식 정보일 뿐이지.”
이건 클라우비체의 말이 맞다.
아직까지도 리히테나워 대공 관련 방침은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이 없다.
“클라우비체 님, 이건 황제 폐하의 건강 문제, 황위 계승 문제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데, 그런 걸 신경 써야 하나?”
“저희 궁내부 입장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변명에 불과하지. 어떻게든 방법이 있었을 거다.”
클라우비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는 공정하게 리히테나워 대공을 선정할 생각이 없는 거다. 안 그런가?”
“크, 클라우비체 님…….”
브랜틀리는 냉정하게, 칼레온은 격렬하게, 클라우비체는 날카롭게 칼데아스를 몰아세웠다.
궁지에 몰린 칼데아스를 돕기 위해 입을 열려 했지만, 그 전에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허허, 그런 걸 따지고 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클라우비체 님.”
“바스티안 후작…….”
세리느의 아버지, 유스트 바스티안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공정하게 선정하면 베리스리제 양이 리히테나워 대공이 될 수 있다는 겁니까?”
“뭐라고?”
유스트의 말에 클라우비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차피 이미 결과는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런 걸 따지고 들면, 그냥 궁내부 상대로 시비를 거는 것에 불과하지요.”
“누구 마음대로 결과가 정해졌다는 건지 모르겠군, 바스티안 후작.”
“아니, 그러면 베리스리제 양이 에르나스 님을 꺾고 리히테나워 대공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현실 인식이 좀…….”
모범생 세리느의 아버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스트는 능글능글하게 독설을 퍼붓는 인물이었다.
사실 세리느를 강제로 에르나스와 약혼시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정치적인 계산을 중시하는 귀족이다.
내가 리히테나워 대공에 가까워졌다는 걸 알고, 나에게 힘을 실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발언이오!”
옆에서 칼레온이 끼어들었다.
“마치 에르나스가 절대적인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설마 딸인 세리느가 에르나스의 측근이라고 그러는 것이오?”
“그런 사적인 관계 때문에 에르나스 님을 지원해 준다고요? 그러면 세리느가 에르나스 님의 약혼자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지원해 줬겠지요.”
유스트가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냉정하게 얘기합시다. 루퍼스 군도, 하인리히 군도, 베리스리제 양도… 에르나스 님을 따라잡는 건 이제 불가능합니다. 공정하게 평가하든 말든, 이미 에르나스 님이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확정된 것과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무슨……!”
“납득할 수 없소.”
가만히 지켜보던 브랜틀리도 반발했다.
그는 아직도 하인리히가 역전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을 것이다.
“그건 우리들이 판단할 것이 아니오.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이 공정한 경쟁을 하면서 결정될 문제지.”
“그 공정한 경쟁이 이미…….”
“유스트 님.”
얘기가 너무 과열되는 것 같아서, 내가 입을 열어 유스트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이 얘기를 더 이상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제와도 관계가 없는 내용이고요.”
“어이쿠, 알겠습니다.”
유스트가 넉살 좋게 대답했다.
그는 이미 내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사전에 연락을 취해, 6검 회의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서로의 입장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유스트는 6대 검술명가를 중심으로 한 봉건제가 해체되더라도, 딸인 세리느가 내 최측근인 이상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칼레온 님, 브랜틀리 님, 클라우비체 님.”
나는 검술명가의 가주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리히테나워 대공 후보로 이 자리에 참석한 게 아닙니다. 란즈슈타인 가문의 가주 대리로서 참석한 겁니다.”
“에르나스, 그게 무슨 소리지?”
칼레온이 의문을 제기했다.
“아버지와 연락을 취한 건가? 네가 가주 대리 역할을 맡게 해 달라고?”
“그럴 리가 없다.”
브랜틀리도 입을 열었다.
“너도 네 아버지하고는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네,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즈슈타인 가문의 가주…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은 현재 영묘(靈廟)에서 철혈검제 폐하의 위령제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영묘.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죽은 자를 기리는 사당 역할을 하는 건축물이다.
다만 제국에서 영묘라고 하면, 제국의 시조인 철혈검제가 묻혀 있는 무덤을 가리킨다.
동쪽 바다의 외딴섬에 존재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지하 시설이다.
에르나스의 아버지인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은 1년 전부터 영묘에 틀어박혀 있다.
병석에 누워 있는 현(現) 황제의 명령으로, 철혈검제 사후 1천 년을 기리는 위령제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소설 후반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지만… 지금은 그냥 에르나스가 단독으로 움직이는 이유에 불과하지.’
제국 시조의 위령제, 그것도 1천 년 주기의 행사다.
1년 전부터 란즈슈타인 가문의 주요 인물들은 전부 여기에 동원된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에르나스는 란즈슈타인 가문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개인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철혈검제 폐하의 위령제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한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저도 아버지한테 연락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 그러니…….”
“하지만 말입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아버지가… 영묘로 들어가시기 전에, 이미 저한테 가주 대리의 역할을 맡겼다면 어떻겠습니까?”
“……!”
누구나 숨을 삼켰다.
“에르나스, 그렇다면… 이미 예전부터 가주 대리로서의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건가?”
“네, 맞습니다.”
“어째서 지금까지는 그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지?”
“마땅히 써먹을 일이 없었으니까요. 아카데미에서 이 권한을 뭐에 씁니까?”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금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쓰려고 아껴 두고 있었던 겁니다.”
“……!”
이건 소설에도 등장하는 반전 요소다.
다들 에르나스가 몰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에르나스는 이 권한을 활용해 화려하게 재부상한다.
“믿을 수 없군.”
그때 클라우비체가 무서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증거를 보여 봐라.”
“증거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페르펙티오 란즈슈타인은 아무 말도 없었는데 네가 가주 대리를 사칭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클라우비체의 말에 칼레온이 흠칫 놀랐다.
“그, 그렇군! 클라우비체의 말이 맞다!”
“증거를 보여라, 에르나스.”
클라우비체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보여 줄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말이다.”
“좋습니다. 보여 드리죠.”
나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손가락의 반지… 유스레흐트를 보여 줬다.
“그게 뭐냐?”
“그건 네가 평소 끼고 다니던 반지 아니냐?”
칼레온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게 뭐라고?”
“역시 모르시는 것 같군요.”
칼레온뿐만 아니라 클라우비체, 브랜틀리도 알아보지 못했다.
여기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구석에 앉아 있던 나이 든 여성뿐이다.
“정말로 저 반지를 에르나스 님이 갖고 계셨군요.”
“올레아나 님?”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또 한 명의 후작… 올레아나 클라리온이 입을 열었다.
“저게 뭔지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지요.”
칼레온의 질문에 올레아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대(先代) 란즈슈타인 공작이 돌아가실 때 페르펙티오 님이 물려받으신 물건입니다. 란즈슈타인 가문에서는 저 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가주 역할을 하지요.”
“……!”
유스레흐트는 엄청난 아티팩트다.
그걸 한낱 학생에 불과한 에르나스가 갖고 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페르펙티오가 위령제를 위해 영묘로 들어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에르나스가 가주 역할을 하라고 유스레흐트를 넘겨준 것이다.
“페르펙티오 님이 에르나스 님에게 가주 대리를 맡기려고 반지를 넘겨주신 것으로 보입니다.”
“으음……!”
내가 올레아나를 6검 회의에 참석시킨 건, 이렇게 올레아나가 증언을 해 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레아나는 란즈슈타인 가문과 가까이 지내 온 사람이라 유스레흐트에 그런 의미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증명이 되었을 듯하군요.”
“큭…….”
클라우비체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보였다.
“제가 여기서 란즈슈타인 가문의 가주 역할을 해도 된다는 걸, 여러분 모두 납득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
칼레온도, 브랜틀리도, 클라우비체도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했다.
여기서 반박을 하려면 올레아나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주장해야 하는데,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서론이 너무 길었군요. 그러면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론은 매우 짧습니다. 제 설명을 들으시고, 함께 다수결로 의결하면 그대로 끝나는 얘기입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클라우비체가 눈썹을 찌푸린 채 나를 노려봤다.
“이렇게까지 해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지? 본인을 리히테나워 대공으로 정식 지명 해 달라는 건가? 아니면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하자는 것에 동의해 달라고?”
“클라우비체 님.”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에르나스.”
클라우비체는 주위를 둘러봤다.
“6검 회의는 6명으로 진행한다. 네가 바스티안 후작과 클라리온 후작을 포섭했다고 해 봤자, 너를 포함해 세 명밖에 되지 않는다. 다수결로 네 뜻을 관철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말에 칼레온과 브랜틀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며 갈등하는 사이다.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돋보이면 돋보일수록 그들은 서로 손을 잡게 된다.
‘최근 아카데미에서도 루퍼스가 하인리히, 베리스리제를 포섭하여 동맹을 맺으려 했지.’
사실 이그니아스 가문, 아그리파 가문, 슈라이에르 가문이 연합하면 골치 아파진다.
내가 아무리 강해져도 세 가문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세 가문이 서로 연합하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손을 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6검 회의를 개최한 이유였다.
“그러면 에르나스, 슬슬 말해 봐라. 그 본론이라는 놈을 들어 보자.”
“그러시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클라우비체 님.”
세 가문의 연합을 원천봉쇄 하기 위해.
나는 클라우비체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폭로했다.
“당신이 미하일 발트펠트를 현혹해 발트펠트 가문의 서부 침공을 유도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뭣……!”
“그리고 당신이 혈검장로회를 고용해 제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마 당신은 6검 회의의 정보를 넘겨주기로 혈검장로회와 약속한 상태겠죠.”
클라우비체의 눈동자가 커지는 모습이 보였다.
허를 찌르는 것에 성공했다는 걸 확인하면서,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제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려 하는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를 제국의 공적(公敵)으로 지정할 것을 제안드립니다.”
콰앙!
분노한 클라우비체가 주먹을 내리쳐 탁자를 깨부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