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발트펠트 가문의 폭군 (5)
미하일 발트펠트가 죽음을 맞이한 뒤.
발트펠트 진영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폴라이스 가문의 성채에서 요네스 발트펠트가 사망했을 때하고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북부의 검사들에게 미하일이 얼마나 커다란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결국 남아 있던 중진들이 백기를 들었고, 발트펠트 측의 병사들은 모조리 포로가 되었다.
아카데미 측의 피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처음에 미하일에게 도전한 아킬레온 교수가 목숨을 잃긴 하였으나… 발트펠트 측과 비교하면 희생자는 매우 적은 편이었다.
이건 그래듀에이트만으로 조직된 소수 정예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은 제국 전체에 두 가지 의미에서 큰 충격을 줬다.
첫 번째는 교육기관에 불과한 아카데미가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발트펠트 가문을 공격하여 제압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아카데미가 외부 활동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몬스터나 마교 관련 사건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발트펠트 가문의 서부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아카데미가 6대 검술명가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세력으로 급부상한다면, 제국의 세력 구도는 크게 요동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아카데미의 향후 동향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미하일 발트펠트를 쓰러뜨렸다는 점이다.
에르나스는 한낱 학생에 지나지 않으며, 미하일은 절정급의 경지에 도달한 북부 최강의 그래듀에이트다.
욜스 칼레시우스와 함께 싸웠다고는 하나, 에르나스가 미하일에게 치명상을 입힌 건 사실이다.
에르나스는 그래듀에이트 중급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그 정도로는 결코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의 숨통을 끊을 수 없다.
과연 에르나스의 진정한 힘은 어느 정도인가.
차기 황제를 보좌할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도 걸려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에르나스에게 한층 더 주목하게 되었다.
* * *
“여러모로 소란스러운 것 같네요, 에르나스.”
기숙사 옆 야외 훈련장에서, 세리느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제국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는 걸 이곳 아카데미 안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야.”
“급변하는 정세의 중심에 있는 장본인이면서,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군요.”
세리느가 한숨을 내쉬었다.
“고르트 소식은 들었어요?”
“고르트?”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포로로 잡아서 아카데미에 보내 놓긴 했는데…….
“징벌동에 갇혀 있는 거 아닌가?”
“네, 그런데 사고가 났어요.”
“사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위험한 곳에서 추락한 모양이에요.”
“…….”
혹시 비밀 수련장으로 가는 통로에 떨어진 걸까.
“지금 치료를 하고 있지만, 발견이 늦어져서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라고 하더라고요. 목숨을 건져도, 앞으로 검을 휘두를 수 있을지는…….”
문득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고르트는 탈출하려다가 추락한 게 아니라, 스스로 구멍 밑으로 몸을 던진 것이 아닐까.
그 녀석 성격을 생각하면, 지금 상황에 절망해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굴욕을 참으면서 묵묵히 가문을 재건하는 건… 그 녀석한테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지.’
앞으로 고르트와 직접 마주할 일도 없을 테고,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고르트 발트펠트는 이제 리히테나워 대공 쟁탈전에서 완전히 탈락하게 되었다.
‘레스터 랭커스터에 이어서, 두 번째 탈락자군.’
이제 남아 있는 6대 검술명가의 후계자는 나와 하인리히, 루퍼스 그리고 베리스리제뿐이다.
세리느처럼 6대 검술명가 출신이 아닌 사람까지 포함하면 후보자는 더 늘어나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탈락자가 나오고 있다.
“어쨌든, 이번 공적으로 에르나스가 리히테나워 대공에 더 가까워졌네요. 황실에서도 에르나스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글쎄, 아직 모르는 일이지.”
“겸손해할 필요는 없어요. 현 시점에서 에르나스가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다른 사람한테도 아직 가능성이 있어.”
“하인리히나 다른 사람한테 역전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니, 내가 ‘탈락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
“……!”
그렇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하인리히나 루퍼스, 베리스리제가 나를 따라잡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내가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어 경쟁에서 탈락하는 게 더 가능성이 있다.
“에르나스, 혹시… 다른 검술명가에서 에르나스한테 자객을 보낼 가능성이 있을까요?”
“가능성이야 충분히 있지.”
실제로 랭커스터 가문과 발트펠트 가문이 나한테 암살자를 보낸 적이 있다.
랭커스터 가문은 자기 측근을 보냈고, 발트펠트 가문은 혈검장로회의 전문 암살자를 고용했다.
“이그니아스 가문이나 아그리파 가문이 그런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러면 슈라이에르 가문이……?”
슈라이에르 가문.
남부에서 아그리파 가문과 공존하고 있는 검술명가로, 베리스리제가 이곳 출신이다.
“너도 알고 있잖아. 슈라이에르 가문의 가주가 어떤 사람인지.”
“여러 가지 소문을 듣긴 했는데요…….”
세리느가 살짝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베리스리제의 아버지가… 정말로 그런 사람인가요?”
“글쎄, 그건 이제 곧 확인되겠지.”
“네?”
“슬슬 슈라이에르 가문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테니 말이야.”
“……?”
발트펠트 가문이 패배하고, 미하일 발트펠트가 사망했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고,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커다란 공적을 세우며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에 더 가까워진 상황.
이제 슬슬… 슈라이에르 가문의 가주가 움직일 때가 되었다.
* * *
제국 남부를 흐르는 거대한 강.
그 강 위에 있는 하중도(河中島)에 아름다운 성이 세워져 있었다.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슈라이에르 가문의 본거지, 슈라이에르 본성이었다.
성의 심층부에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골동품으로 장식된 방이 있었다.
이곳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인,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의 집무실이었다.
“죄송합니다, 클라우비체 님.”
집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흑의(黑衣)의 여성이 사죄했다.
“발트펠트 가문을 조종하여 아카데미와 공멸시키는 임무, 제대로 완수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렇다.
미하일 발트펠트에게 접근하여 서부에 침공하도록 현혹한 여승려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사람을 현혹하는 고대의 비술(秘術)에 정통한 ‘마법사’로, 친동생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미하일의 마음에 쉽게 파고들 수 있었다.
“루클레치아, 한 가지만 물어보지.”
냉정한 목소리로 말한 건, 의자에 앉아 있던 장발의 남자였다.
“정체를 들키지는 않았겠지?”
“무, 물론입니다!”
루클레치아라 불린 여성이 고개를 치켜들며 대답했다.
“흑천마교를 의심한다면 몰라도, 슈라이에르 가문을 의심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 그러면 됐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성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쨌든 미하일 발트펠트를 해치우는 건 성공했고, 아카데미 측의 전력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아…….”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어느 정도인지도 파악했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가, 감사합니다, 클라우비체 님!”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
남부를 대표하는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의 검사이자, 슈라이에르 가문의 가주.
그가 냉정한 눈빛으로 루클레치아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루클레치아, 그러면 다음 임무를 맡기겠다.”
“네, 어떤 임무든지 맡겨 주십시오!”
“혈검장로회의 최고 장로를 만나고 와라.”
“……!”
제국 최고의 암살자 단체, 혈검장로회.
그 지도자를 만나고 오라는 지시에 루클레치아는 숨을 삼켰다.
“클라우비체 님, 혈검장로회는…….”
“이미 사전 조율은 마쳐 놓은 상태다. 네가 가서 최종 교섭만 하고 오면 된다.”
“아, 그러면…….”
“슬슬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확실히 죽여 놓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다.”
“……!”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죽인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미하일 발트펠트까지 쓰러뜨린 에르나스를 죽이려면… 평범한 암살자로는 안 된다.
“이미 혈검장로회에서 ‘장로급’ 암살자를 파견해 주기로 얘기가 되어 있는 상태다.”
“……!”
장로급 암살자.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고용할 수 없는, 혈검장로회의 최고 전력.
그들은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조차 암살할 수 있다고 한다.
만약 그들을 움직이는 것에 성공했다면… 정말로 에르나스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걱정 마라, 루클레치아.”
의자에 앉은 채, 클라우비체 슈라이에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를 차지하여 제국을 지배하는 건, 우리 슈라이에르 가문이 될 것이다.”
* * *
‘슬슬 클라우비체도 나를 죽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겠지.’
발트펠트 가문을 조종해 서부로 침공하게 만든 건, 슈라이에르 가문의 가주인 클라우비체다.
고대의 비술에 능통한 ‘마법사’ 루클레치아를 보내서 미하일을 현혹한 것이다.
이 세계에는 소위 ‘전투용 마법’은 존재하지 않지만, 행정이나 통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마법이 사용되고 있다.
루클레치아는 그중에서도 공작 활동에 특화된 마법을 사용하는 인물이었다.
‘클라우비체는 이런 식으로 온갖 계략을 꾸미는 걸 선호하지. 6대 검술명가의 가주들 중에서 가장 교활한 인물이야.’
소설에서 묘사했던 내용들을 떠올렸다.
아카데미 안에서 가장 교활한 사람이 에르나스라면, 아카데미 바깥에서 가장 교활한 사람은 클라우비체였다.
‘에르나스는 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클라우비체는 슈라이에르 가문의 힘으로 제국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책사였지.’
이번에도 클라우비체는 직접 움직이지 않았다.
루클레치아를 북부로 파견하여, 몇 달에 거쳐 미하일을 현혹했다.
그 결과 미하일은 발트펠트 가문을 이끌고 서부로 쳐들어왔고, 아카데미와의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다.
그동안 클라우비체는 자신의 저택 안에 앉아서 느긋하게 구경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미하일이나 브랜틀리, 칼레온 등보다 더 골치 아픈 적이지.’
예를 들어 미하일은 직접 마주하고 쓰러뜨리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클라우비체와의 싸움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클라우비체가 준비한 체스말들하고 피 튀기는 싸움을 하는 동안, 클라우비체는 안전한 곳에서 느긋하게 구경만 하고 있으니까.
소설 속의 주인공들도 클라우비체의 온갖 음모에 꽤 오래 고생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클라우비체에게 주도권을 내줄 필요가 없다.
소설 주인공들처럼 눈앞에 없는 적과 싸우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이미 나는 계획을 짜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만졌다.
그러자 곧바로 내가 보유하고 있는 능력이 표시되었다.
[현재 ‘능력 재현’으로 획득한 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잠정 획득 ==
[발트펠트 금강검술(SS랭크)]
[아이오니아 신속검술(S랭크)]
[리히테나워 경신술(A랭크)]
[아틸리온 마력탐측술(A랭크)]
[흑천마도연공법(SS랭크)]
== 영구 귀속 ==
[칼레시우스 창뢰검술(A랭크)]
[동부식 마력연공법(A랭크)]
발트펠트 금강검술.
견고한 금색 검기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발트펠트 가문의 독문 검술.
이 최강의 북부 검술이 나한테 전승된 상태였다.
그것도 SS랭크라는 최고 랭크의 숙련도로.
‘원래 고르트가 이어받아야 하는 검술이지만… 고르트가 그렇게 되었으니, 이제 나만 사용할 수 있는 검술이 되겠군.’
미하일 발트펠트가 사망하기 직전, 나는 유스레흐트의 능력 재현으로 이 검술을 얻어 냈다.
기존에 갖고 있던 S랭크의 발트펠트 패검술을 삭제한 뒤 그 자리에 넣은 것이다.
어차피 발트펠트 금강검술은 발트펠트 패검술의 상위 호환이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마력이 부족하니 미하일 수준의 위력을 내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SS랭크의 발트펠트 금강검술을 잘 활용한다면…….’
나는 검을 집어 들었다.
발트펠트 금강검술의 방식으로 검기를 발현하자 칼날이 금색으로 물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미하일의 검기에 비교하자면 보잘것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의 창뢰검강이 있지.’
발트펠트 금강검술에, 내 창뢰검강을 조합한다.
이걸 통해 이 세상 누구도 보지 못한 경지에 도달한다면…….
‘클라우비체도 쓰러뜨릴 수 있어.’
남부를 대표하는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나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