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발트펠트 가문의 폭군 (1)
폴라이스 가문의 성채가 함락된 뒤.
나는 세리느 등 측근들과 다시 합류하여 이동했다.
“우리는 콜러르 가문을 친다.”
“콜러르 가문?”
“발트펠트 가문에게 가장 먼저 복종한 백작 가문이지.”
측근들 앞에서 설명을 해 줬다.
“발트펠트 가문이 노웨르트 산맥을 넘어 서부로 진입하려 할 때, 오큘러스 가문이 제지하려고 하다가 괴멸당했어. 그 모습을 지켜본 콜러르 가문은 재빨리 발트펠트 가문에 접근하여 충성을 맹세했지.”
발트펠트 가문은 곧장 보답을 해 줬다.
예전부터 콜러르 가문과 앙숙이었던 페스톨 가문을 손봐 준 것이다.
“콜러르 가문은 현재 발트펠트 가문의 군량을 책임지고 있어. 원래 콜러르 가문은 넓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어서 북부 지역으로 곡물을 수출하던 곳이거든.”
“아, 그렇다면…….”
“그래, 콜러르 가문의 식량 창고를 털면 발트펠트 본진은 식량난에 처하게 되지.”
발트펠트 가문은 서부로 넘어오면서 군량을 많이 들고 오지 않았다
서부 현지에서 조달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해치우자.”
“발트펠트 가문의 병사들은 허기를 참은 채 결전에 나서게 되겠군요!”
나는 발 빠른 녀석들을 데리고 콜러르 가문의 영지로 출발했다.
이것만 처리하면, 다음에는 발트펠트 가문과의 결전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 * *
“폴라이스 가문의 성채를 함락한 아카데미의 그래듀에이트들이 빠르게 북진하고 있습니다.”
“별일 없으면 일주일 안에는 도착할 것 같군. 곤란하게 되었어.”
“상대는 발렌티아노, 욜스, 아킬레온…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
발트펠트 가문의 본진에서는 작전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여러 중진이 지도를 앞에 두고 의견을 교환하는 중이었다.
다만… 별로 어두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카데미가 이렇게 나온다면… 확실히 짓밟아 주는 수밖에 없겠지.”
“그래, 발트펠트 가문의 힘으로 말이야.”
“그러면 놈들도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겠죠.”
발렌티아노, 욜스, 아킬레온이라는 절정급 검사 세 명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들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이건… 가주인 미하일 발트펠트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하일 님이 발렌티아노와 욜스, 아킬레온 세 명을 동시에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모르겠군. 두 명 정도는 확실히 가능할 텐데.”
“놈들도 자존심이 있지, 셋이서 동시에 덤벼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면 미하일 님이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죠.”
북부 최강의 그래듀에이트, 미하일 발트펠트.
마검 ‘발트슬라이프’와 독문 검술 ‘발트펠트 금강검술’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전장을 유린하는 절대 강자.
그런 미하일이라면 아카데미의 절정급 교수들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카데미와 전면 전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참모 중 한 명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놈들을 괴멸한 뒤, 아카데미 본부와 교섭을 해야죠. 이쯤에서 손을 떼라고 말입니다.”
“놈들도 피해가 커지는 건 원치 않겠지.”
“자기들이 교육기관이라는 걸 자각해야지. 멍청한 놈들.”
어차피 발트펠트 가문이 제국의 패권을 손에 넣으면, 아카데미도 발트펠트 가문 아래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니 서로 한쪽이 멸망할 때까지 총력전을 펼칠 필요는 없다.
“물론… 미하일 님의 결정에 달렸지만 말이다.”
“…….”
다들 침묵했다.
여기서 어떤 의견이 나오든, 결국 미하일의 뜻에 따라 방침이 정해질 것이다.
미하일이 아카데미를 완전히 멸망시키겠다고 하면, 발트펠트 가문은 미하일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미하일 님은 여전히 천막 안에 계신 건가?”
“그렇습니다. 그 승려와 함께…….”
“좀 수상하군.”
“네? 아니, 딱히 그 여자와 동침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
“그런 얘기가 아니고, 그 여자가 미하일 님한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신경 쓰여서 말이다.”
“아…….”
애초에 미하일이 서부 침공을 결심한 것도 그 승려의 영향인 것 같았다.
중진들 입장에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 여자가 미하일 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든, 우리야 미하일 님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렇지요…….”
가주에게 절대복종하는 것이 발트펠트 가문이다.
가주가 가문을 멸망의 길로 몰아넣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이럴 때 요네스 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말이다.”
미하일에게 의견을 말할 수 있었던 요네스는 얼마 전에 전사했다.
테오도라는 이미 몇 달 전에 죽었고, 고르트는 소식을 알 수 없다.
결국 미하일이 천막 밖으로 나와 명령을 내리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지. 우리는 일단 가장 가까운 제8부대부터 불러들여서…….”
바로 그때.
막사 안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레오폴 님, 무슨 일이시오?”
그는 콜러르 가문의 가주인 레오폴 콜러르였다.
능숙한 상인이기도 한 그는 언제나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다급해 보였다.
“여, 여러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
“그게, 그러니까…….”
“좀 진정하고 차분히 말해 보시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레오폴 콜러르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절박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곡물 창고가… 모조리 불타 버렸습니다.”
“뭐, 뭐라고?”
“게다가 본진 쪽으로 식량을 실어 나르던 수레까지 습격을 받아서… 모조리…….”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군량이 중요하다는 건 발트펠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따로 병력을 파견해서 창고 및 보급로를 지키게 하고 있었다.
“설마 아카데미 측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거요?!”
“말도 안 돼! 놈들이 여기까지 진격해 왔으면 우리가 눈치 못 챌 리가 없어!”
“놈들이 도착하려면 일주일은 걸린단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칼을 뽑아 들 듯이 거칠게 화를 내는 중진들 앞에서, 레오폴 콜러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때 막사 안에 들려온 목소리가 있었다.
“경신술에 능한 그래듀에이트 몇 명을 침투시킨 거겠지. 그런 거라면 우리 쪽 정찰병들이 눈치 못 챌 수도 있다.”
“……!”
위엄 있는 목소리를 듣고, 모든 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색 머리카락의 거한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미, 미하일 님……!”
“나오셨군요……!”
미하일 발트펠트.
그가 부하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폴라이스 가문의 성채도 갑자기 문이 저절로 열렸다고 한다. 아카데미는 소수 정예의 공작 부대를 운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
“남부의 슈라이에르나 할 짓을 하다니, 아카데미에 교활한 책사가 있는 모양이군.”
미하일은 레오폴에게 냉정한 시선을 향했다.
“레오폴 콜러르, 남아 있는 식량은 어느 정도인가.”
“주, 주위에서 최대한 끌어모은다면…….”
“남아 있는 식량이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앗, 사, 사나흘 정도 버틸 수 있습니다!”
사나흘 정도밖에 버틸 수 없다.
그 얘기를 듣고 다른 사람들이 동요했지만, 미하일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렇군.”
“미, 미하일 님, 일단 병사들에게 배급하는 양을 줄이면 어떻겠습니까? 금방 다른 곳에서 식량을 끌어올 수 있습니다! 정 안 되면 제 영지에서 징발을…….”
“멍청한 놈.”
“……!”
미하일의 차가운 목소리에 레오폴은 몸을 움츠렸다.
“중요한 결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병사들이 허기를 느끼게 해서 되겠나.”
“앗…….”
“정상적으로 배급을 해라. 그리고…….”
미하일이 주위의 중진들을 향해 말했다.
“남쪽으로 내려간다. 여기서 기다리면 일주일 뒤 결전이지만, 우리가 놈들을 맞이하러 가면 사나흘 뒤에 결전을 치르게 되겠지.”
“……!”
“군량 문제는 승리를 거둔 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미하일의 판단에 여러 사람이 감탄했다.
“여, 역시 미하일 님……!”
“미하일 님의 작전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미하일은 예전처럼 결단력 있는 가주의 모습을 보여 줬다.
눈빛과 목소리도 냉정해서, 정체불명의 여자 승려에게 홀려서 잘못된 판단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카데미 놈들이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 셋을 동시에 투입했다고 하더군.”
“아, 네……!”
“좋은 기회다.”
미하일이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마검 ‘발트슬라이프’의 칼자루에 손을 대며, 미하일이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을 모조리 쳐 죽여서, 아카데미가 분수를 깨닫게 해 주겠다.”
발트펠트 가문의 폭군.
그가 마침내 검을 뽑아 들었다.
* * *
발트펠트 가문이 진군을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금방 아카데미 측에 포착되었다.
발렌티아노와 욜스, 아킬레온은 논의 끝에 이대로 계속 전진하기로 했다.
그 결과, 양군은 중간 지점이었던 황야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숫자는… 역시 저쪽이 더 많군.”
발렌티아노가 발트펠트 진영을 살펴보며 말했다.
“본진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력을 전부 다 투입한 걸로 보이는군.”
“미하일 발트펠트는 이 황야에서 결전을 치르려는 것 같습니다.”
욜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면에서 우리를 꺾을 자신이 있는 모양입니다.”
“거참,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군요.”
아킬레온이 피식 웃었다.
“그야 머릿수는 저쪽이 더 많겠죠. 하지만 그래듀에이트만 따지자면 이쪽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절정급이 세 명이나 있는데, 대체 뭔 자신감인지.”
“아킬레온 교수, 방심하지 말게.”
발렌티아노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쪽에 미하일 발트펠트가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미하일 발트펠트가 얼마나 강한 인물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북부 출신이니까요.”
아킬레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미하일도 늙었습니다. 게다가 얼마 전에 포로에게서 얻어 낸 정보에 의하면, 웬 여자 승려에게 홀딱 빠져서 매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하더군요.”
“으음, 그건…….”
“듣자 하니 이번 침공도 그 여자가 꼬드긴 탓이라고 합니다. 예전의 미하일이 아닌 겁니다.”
과연 어떨까.
미하일은 아직도 전성기 시절의 힘을 유지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퇴물이 되어 버렸을까.
“제가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미하일은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아킬레온 교수님, 혹시 미하일과 일대일로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그러면 여러 명이서 한꺼번에 덤벼듭니까?”
욜스의 질문에 아킬레온이 피식 웃었다.
“그런 수치스러운 짓을 어떻게 합니까. 명색이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 아카데미 클래스를 담당하고 있는 지도 교수인데.”
“흠… 이건 아킬레온 교수의 말이 맞군.”
발렌티아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헨리 랭커스터를 잡을 때도, 욜스와 안겔라가 곁에 있었지만 칼레온이 혼자서 싸웠다.
“하지만 아킬레온 교수, 만약에…….”
“걱정 마십시오. 저도 목숨은 아까우니까.”
아킬레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되겠다 싶으면 물러설 테니, 그 이후는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네.”
발렌티아노나 욜스가 대신 싸우거나… 정 안 되면 여러 명이서 협공할 수도 있다.
“여러분, 미하일 발트펠트가 앞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
발트펠트의 그래듀에이트들 사이에서, 커다란 흑마(黑馬)를 탄 미하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서 황야 한가운데로 나온 미하일은 이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저 남자…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선봉전을 하자는 건가?”
“선봉전에 가주가 직접 나오다니…….”
본래 선봉전은 양쪽 진영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유망주가 나서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가주가 직접 나서서 선봉전을 하려고 하다니, 전대미문이었다.
“발렌티아노 교수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응하지 않는 건 명예롭지 못한 일이지.”
발렌티아노는 기사의 전통을 이어받은 동부 검사다.
상대방의 지휘관이 나섰다면, 이쪽도 가장 서열이 높은 발렌티아노가 나서는 게 맞다.
다만 아까 아킬레온이 먼저 말을 꺼냈기 때문에 우선권은 아킬레온에게 있었다.
“아킬레온 교수, 어떻게 하겠나?”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가 나가겠습니다.”
아킬레온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아킬레온 교수님.”
“걱정 마십시오.”
욜스에게 대꾸하면서, 아킬레온은 말을 몰고 미하일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군요, 미하일 님.”
“…….”
“당신을 꺾고 북부 검술의 1인자가 되는 게 제 꿈이었습니다. 그날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오게 되었군요.”
아킬레온은 상당히 이른 나이에 그래듀에이트 절정급이 되었다.
지금도 아카데미의 지도 교수들 중에서는 나이가 젊은 축에 속하며, 젊은 패기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면…….”
대꾸하지 않는 미하일을 보면서, 아킬레온은 검을 뽑았다.
아킬레온도 미하일과 마찬가지로 말 위에서 휘두를 수 있는 대검을 사용한다.
“한 수 가르쳐 주시길 바랍…….”
아킬레온은 말을 잇지 못했다.
검을 뽑은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은 속도로 날아온 미하일의 검이 아킬레온의 정수리를 내리쳤기 때문이다.
“……!”
아킬레온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낙마했다.
황야가 아킬레온의 피로 물드는 모습에 아카데미의 모든 그래듀에이트가 경악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북부 최강의 그래듀에이트인 미하일 발트펠트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강해졌다는 것을.
“죽여라……!”
대검을 치켜들며 포효하는 미하일의 명령을 받들어, 북부의 거친 검사들이 돌격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