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질풍노도의 별동대 (4)
‘이번에는 반드시 에르나스 이상의 공을 세우고 말겠다.’
굳게 닫혀 있는 성문을 올려다보며, 하인리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하인리히는 계속 노력해 왔지만, 에르나스와의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버지와 함께 아르테클라스 대주교를 토벌하기까지 했으니…….’
아버지인 브랜틀리가 옛날부터 아르테클라스 대주교를 쫓고 있었던 건 알고 있었다.
그때 아카데미에 있었다면 어떻게든 아버지를 따라가 아르테클라스 대주교 토벌을 도왔을 텐데, 그 역할을 에르나스한테 빼앗겨 버리다니… 생각할 때마다 속이 쓰렸다.
“하인리히 님, 슬슬 공격이 시작되겠군요.”
그때 옆에서 카밀로가 말을 걸어왔다.
청색 2반에서부터 계속 하인리히를 따라다니는 녀석으로, 하인리히 파벌은 사실상 카밀로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하인리히 님이 공을 세우실 수 있도록, 제가 최대한 돕겠습니다.”
“내가 알아서 한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카밀로를 내버려 둔 채, 하인리히는 성문을 다시 한번 살펴봤다.
이미 소실된 기술을 사용하여 특수한 강화 처리가 되어 있는 성문이다.
절정급 그래듀에이트의 검기로도 부수기 어렵다고 하니, 결국 성벽을 기어 올라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의 내 경신술이라면, 해자를 넘어 성벽을 뛰어오르는 것도 가능할 터.’
얼마 전, 하인리히는 그래듀에이트 중급에 도달했다.
그래듀에이트 중급의 마력을 활용하여 경신술을 펼친다면 성벽 위에 도달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성채를 지키고 있는 발트펠트 가문의 병사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만…….
‘누구보다 먼저 성벽 위로 올라간다.’
하인리히는 그렇게 자신만의 1차 목표를 정했다.
다른 교수나 조교수들보다 먼저 성벽 위로 올라간다.
요네스 발트펠트를 찾아서 쓰러뜨리는 건 그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
그런 생각을 하며, 선봉대를 지휘하는 아킬레온 교수의 호령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갑자기 앞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쿠르릉, 쿠르릉, 쿠쿵.
기관 장치가 움직이는 소리 같았다.
적들이 무슨 방어용 장치를 작동하는 걸까.
“하, 하인리히 님!”
그때 옆에서 카밀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성문이……!”
“……!”
쿠쿵!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하인리히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문이 열리면서 발트펠트 가문의 병력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성벽 위를 지키는 발트펠트 가문의 병사들도 당황하는 걸 보니, 누군가가 멋대로 성문을 연 것 같았다.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고 싶어서, 하인리히는 눈에 마력을 집중해 시력을 끌어올렸다.
“……!”
그리고 하인리히는 깨달았다.
천천히 열리는 성문 너머에, 은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서 있었다는 것을.
‘에, 에르나스?’
바로 그때,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녀석이 왼손을 들어 까닥였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손짓을 한 것이다.
“크윽……!”
“하, 하인리히 님?”
굴욕감에 신음 소리를 냈다.
옆에서 카밀로가 흠칫 놀라며 쳐다봤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에르나스, 네놈은 대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채, 하인리히는 즉각 몸을 날렸다.
마음만 같아서는 적들보다 에르나스한테 먼저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 * *
‘하인리히 녀석, 의욕이 넘치는군.’
하인리히가 경신술을 사용해 해자를 뛰어넘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성채로 돌입하려는 것 같은데, 대단한 의욕이다.
‘그러면 나는 슬슬 여기서 이동할까.’
내 주위에는 발트펠트 가문과 폴라이스 가문의 검사들이 잔뜩 쓰러져 있었다.
그들을 제압하고 개폐 장치를 작동했기에 문이 열린 것이다.
개폐 장치를 작동하기 위한 인장 반지는 폴라이스 가문의 가주인 어델트에게서 손에 넣었다.
‘어델트는 저항하다가 발을 헛디뎌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지…….’
서부의 전략적 요충지를 발트펠트 가문에게 공짜로 넘겨준 남자가 맞이한, 씁쓸하기 그지없는 최후였다.
“저쪽이다!”
“대체 누가 문을 연 거냐……!”
발트펠트 가문의 검사들이 뒤늦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사용해서 그들에게 급접근했다.
“헉……!”
“왜 이리 빠른… 커헉!”
촤악!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놈들을 내버려 둔 채, 나는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아직 살아 있는 놈들도 있지만, 그런 놈들은 하인리히와 다른 그래듀에이트들이 쓰러뜨려 줄 것이다.
“에르나스!”
그때 뒤에서 하인리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나를 쫓아오는 걸 우선한 모양이었다.
“네놈, 지금 대체 무슨 짓을……!”
“예전보다 더 빨라졌군. 혹시 그래듀에이트 중급에 도달한 건가?”
“내 질문에나 대답해라!”
하인리히가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어째서 네가 성채 안에 있던 거지? 문을 어떻게 연 거야?!”
“아카데미의 별동대 역할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벼, 별동대?”
“내 맘대로 움직이는 별동대지만.”
“……!”
고르트를 붙잡고 정찰 부대를 전멸시킨 뒤, 나는 폴라이스 가문의 성채 안으로 잠입했다.
하지만 세리느 등의 측근들은 바깥에서 대기하게 했다. 아무도 모르게 성채 안으로 잠입할 수 있는 건 나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부 상황을 파악한 뒤, 아카데미 측의 선봉대가 도착할 타이밍에 맞춰서 성채의 문을 연 것이다.
“하인리히, 다른 사람들은 대형을 갖추며 돌입하고 있는데 너 혼자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 저쪽에 네 측근인 카밀로도…….”
“참견하지 마라, 에르나스!”
이 녀석, 처음 만났을 때의 무심한 성격은 어디로 간 걸까.
“에르나스, 네놈은 정말……!”
“하인리히, 미안하지만 잡담은 이 정도만 하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느새 발트펠트 가문의 검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네놈들이 성문을 연 것이냐?!”
“잠깐, 이 녀석들 나이가 너무 어린데…….”
“설마… 에르나스 란즈슈타인과 하인리히 아그리파인가?!”
우리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말단 병사들이 우리 용모를 알고 있을 리 없고, 발트펠트 가문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있는 그래듀에이트일 것이다.
“하인리히, 잔챙이들은 맡기지.”
“명령하지 말…….”
하인리히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 않고, 움직였다.
순식간에 적들 사이를 지나쳐 거리를 좁히자, 나를 알아봤던 그래듀에이트가 다급히 검을 치켜들었다.
“윽!”
쿠웅!
검기와 검기가 충돌했다.
손에 전달되는 감각을 분석해 보니, 그래듀에이트 중급 정도인 것 같았다.
“네놈… 커헉!”
푸욱!
순간적으로 드러난 빈틈을 찔렀다.
호신기를 전개한 상태였지만,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한 내 검기로 충분히 뚫을 수 있었다.
“에르나스, 네놈……!”
뒤에서 다른 잔챙이들을 상대하던 하인리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인리히라면 내가 무엇을 했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설마, 그래듀에이트 중급조차 뛰어넘어…….”
“먼저 간다, 하인리히.”
“에르나스……!”
하인리히한테 잔챙이들을 맡긴 뒤, 혼자서 리히테나워 경신술을 사용해 자리를 떴다.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은 별동대다. 적들과의 정면 대결은 아카데미 본대에 맡기면 된다.
‘그래, 내가 해야 할 일은… 요소요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는 거지.’
굳게 닫혀 있던 성문도 열어 줬다.
폴라이스 가문의 가주도 처리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가며, 사방으로 마력을 발산했다.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사용해 주위의 그래듀에이트를 탐지하는 것이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했기 때문인지, 이제는 누가 어느 정도의 마력을 지녔는지도 대략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조금만 더 익숙해지면 숙련도를 올려서 영구 귀속으로 만들 수 있겠어.’
성벽 위에 있는 그래듀에이트만 해도 수십 명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뚜렷하고 강렬한 마력을 찾아냈다.
‘저기 있군.’
사실 눈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급히 주위에 지시를 내리는 거구의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 색깔이 고르트나 테오도라와 똑같았다.
‘미하일 발트펠트의 사촌 동생… 요네스 발트펠트!’
휘익!
바람을 가르며 몸을 날렸다.
걸리적거리는 그래듀에이트들을 아이오니아 신속검술로 베어 버리면서, 빠르게 접근했다.
“네놈은……!”
뒤늦게 내 접근을 파악한 요네스가 눈을 크게 떴다.
곁에 있던 호위 검사들도 다급히 검을 치켜들었다.
“웬 놈이냐!”
“멈춰라!”
그들이 나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쓸모없는 짓이었다.
내 검기가 번뜩이자 그들은 목에서 피를 뿜으며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네놈, 설마…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냐?”
“알아봐 줘서 고맙군, 요네스 발트펠트.”
“큭…….”
요네스가 나를 노려보며 검을 고쳐 잡았다.
발트펠트 패검술의 자세였다.
“혹시 이 사태는 네가 불러일으킨 거냐? 성문도 네가 열었고?”
“눈치가 빨라서 좋군. 역시 발트펠트 가문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남자다워.”
고르트도 그렇고, 미하일도 그렇고… 발트펠트 가문의 남자들은 좀 단순한 측면이 있다.
요네스는 그중에서 그나마 두뇌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도, 발트펠트 가문에서 머리가 좋아 봤자 별 의미가 없지.”
“뭐라고?”
“정체불명의 승려한테 현혹당해 군사를 일으키는 돌대가리가 가주인데, 너 하나가 머리가 좋아서 무슨 소용이냐.”
“……!”
내 말을 듣고 요네스가 숨을 삼켰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지?”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자, 잠깐만, 설마 네가 관여한 거냐? 그 여자를 미하일 형님한테 보내서 일부러 이런…….”
뭔가 이상한 상상을 한 모양이다.
미하일을 꼬드긴 여자 승려과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그 승려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그냥 내가 소설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걸 지금 따져 봤자 무슨 소용이냐, 요네스 발트펠트.”
나는 굳이 해명하지 않고 요네스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네 목숨이나 걱정하는 편이 좋을 텐데.”
“……!”
요네스가 눈을 치켜뜨는 모습이 보였다.
“네놈, 아카데미에 들어간 지 1년도 안 된 애송이 주제에 감히……!”
목소리를 높이며 요네스가 달려들었다.
그 검에는 발트펠트 패검술의 금색 검기가 전개되어 있었다.
‘역시 테오도라와 동급이군.’
발트펠트 가문의 2인자는 테오도라였지만, 실력 자체는 요네스도 뒤지지 않는다.
테오도라가 미하일의 여동생이라 서열이 더 높았을 뿐이다.
‘내가 테오도라와 싸웠을 때는… 테오도라를 잔뜩 동요시킨 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과 발트펠트 패검술을 조합해서 겨우 쓰러뜨렸지.’
그때 나는 테오도라보다 한참 실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온갖 작전을 써 가면서 테오도라에게 빈틈을 만들고, 칼레시우스 창뢰검술과 발트펠트 패검술의 조합으로 테오도라의 검기를 깨뜨려 겨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정면 대결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이기에, 지혜를 써서 이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지금 그래듀에이트 상급.
눈앞에 있는 요네스와 동급이다.
물론, 그래듀에이트로서의 실전 경험은 요네스가 까마득하게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면 대결로, 내가 이길 수 있다.’
나는 주저 없이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는 금색 검기를 향해, 내 검을 휘둘렀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의 제5식이 펼쳐지며, 창뢰검강이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