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질풍노도의 별동대 (1)
“발트펠트 가문이 아카데미 측에 서찰을 보내왔다.”
훈련장에 모인 측근들 앞에서, 나는 오늘 들은 얘기를 전달했다.
“테오도라 발트펠트 사망 사건을 조사한 사람들을 모조리 넘겨 달라고 하더군.”
“넘겨 달라고요?”
세리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기를 들어 보고 재조사를 하겠다는 건가요?”
“글쎄, 하지만 아카데미는 사람들을 보내지 않을 거야.”
“어째서죠?”
“미하일 손에 죽을 게 뻔하니까.”
“……!”
숨을 삼키는 세리느 옆에서,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하일 발트펠트는 잔혹한 성격으로 유명해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깨서 죽여 버린다고 하죠.”
“아니, 어떻게 그런 사람이 검술명가의 가주일 수가 있지?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둬도 되는 건가?”
“발트펠트 가문은 북부에서 절대적인 힘을 지녔으니까요.”
슈미츠의 의문에 답해 주면서, 클로에가 고개를 돌렸다.
“비올라 님은 북부 출신이니 잘 아실 거라 생각하는데요.”
“으음, 글쎄요. 저희 오리셔스 가문은 북부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있어서, 발트펠트 가문하고는 별로 교류가…….”
비올라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발트펠트 가문이 무섭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어요. 발트펠트 가문에게 대들었다가 한 명도 빠짐없이 몰살당한 가문이 있다는 얘기도 있었고.”
“내가 살던 남부 지역은 평화로운 편이었군…….”
슈미츠가 인상을 찡그리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북부에는 발트펠트 가문을 견제할 만한 세력이 없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거야.”
“아, 그렇군요.”
동부에는 이그니아스 가문과 란즈슈타인 가문 말고도 이름 있는 명문가가 많다.
남부에는 아그리파 가문과 슈라이에르 가문이 양립하고 있고, 이곳 서부에는 랭커스터 가문이 독보적이었지만 아카데미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북부에는 발트펠트 가문만이 독보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으며 폭군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발트펠트 가문의 폭력성은 북부 지역 안에서만 발휘되고 있었지. 다른 곳은 해당 지역의 검술명가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어.”
“하지만, 얼마 전에 서부의 랭커스터 가문이 몰락해 버렸으니…….”
“그래, 서부를 향해 폭력성을 휘두를 수 있게 된 것이지.”
다들 표정이 굳어졌다.
“노웨르트 산맥을 넘으면서, 발트펠트 가문은 앞길을 가로막았다는 이유로 오큘러스 가문을 피바다로 만들었어. 그 직후에는 콜러르 가문의 요청을 받아서 페스톨 가문을 유린했지.”
“요청을 받아서?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발트펠트 가문의 군세가 접근해 오는 걸 알고, 콜러르 가문은 일찌감치 달려가서 넙죽 엎드린 거야. 앞으로 발트펠트 가문에 충성을 바칠 테니, 예전부터 눈엣가시였던 옆동네 페스톨 가문을 손봐 달라고.”
“세상에…….”
슈미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북부 지역에서는 이처럼 자진해서 발트펠트 가문에 복종하는 가문들이 늘어나고 있어. 그들에게는 발트펠트 가문에 대항할 힘이 없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남들보다 먼저 발트펠트 가문한테 달려가서 앞잡이 역할을 하려는 거야.”
“어디서 들은 것 같은 얘기네요.”
클로에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 달라지겠죠.”
“그래, 아카데미도 발트펠트 가문의 태도를 확인했으니 슬슬 움직이겠지.”
아카데미와 발트펠트 가문을 비교하자면, 순수한 병력은 발트펠트 가문이 훨씬 많다. 머릿수만 따지자면 10분의 1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아카데미에는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가 여러 명 있기 때문에, 미하일 발트펠트 한 명만 있는 발트펠트 가문보다 유리한 점도 있다.
“발트펠트 가문은 아카데미가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펼칠 거라고는 예상 못 한 상태일 거야. 그 부분을 잘 파고들어서 한 번에 몰아 쳐야겠지.”
“그렇군요. 그러면 우리는…….”
세리느가 앞으로의 방향성을 물어보려 했을 때.
최근 우리 파벌에 들어온 학생이 기숙사 쪽에서 달려왔다.
“에르나스 님! 급한 소식입니다!”
“뭐지?”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숨을 헐떡이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고르트 발트펠트가 아카데미에서 사라졌습니다! 측근 몇 명을 데리고 도망친 것 같습니다!”
고르트가 도망쳤다.
그 얘기를 듣고 슈미츠가 인상을 찡그렸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손을 쓸걸.”
“슈미츠 님, 아직 발트펠트 가문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도 아닌데 고르트 님한테 그럴 수는 없어요. 그분도 아직 아카데미 학생이니까요.”
“흥, 그런 건…….”
슈미츠가 클로에에게 반박을 하기 전에, 내가 끼어들었다.
“슈미츠, 클로에 말이 맞아.”
“네?”
“지금 우리가 사적으로 고르트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잘못된 일이지. 클로에 말대로, 고르트는 아직 어엿한 아카데미 학생이니까.”
“으음, 그래도…….”
“하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무단으로 아카데미에서 탈주하면 얘기가 달라지지.”
“앗……!”
“역시… 에르나스는 고르트가 먼저 도망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군요.”
세리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가 없이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가는 건 교칙 위반이죠. 붙잡아서 감금해 놓아도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런 거지.”
아카데미는 명색이 교육기관이다.
명분 없이 학생을 감금하거나 인질로 써먹을 수 없다.
하지만 이번에 고르트가 먼저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다.
“아마 고르트는 바깥에서 더 많은 명분을 만들어 줄 거야. 그러면 아카데미가 움직이기 더 쉬워지지.”
예상대로 움직여 준 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고르트는 우리가 잡아 오도록 하자.”
* * *
“젠장……!”
와장창!
술잔이 여관방 벽에 부딪치면서 산산조각 났다.
고르트가 분을 못 이겨 집어 던졌기 때문이다.
“고, 고르트 님, 진정하십시오.”
“술도 그만 드시는 게…….”
“시끄러워!”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르트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병에 입을 대고 술을 들이마신 뒤,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뭐 이렇게 되냐고!”
“고르트 님…….”
“아카데미가 왜 개입을 하냔 말이야! 미친 자식들!”
고르트가 아카데미에서 다급히 도망쳐 나온 건, 아카데미가 발트펠트 가문에 맞서 군사 행동에 나서려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이미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아버지에게 알리기 위해 황급히 뛰쳐나온 것이다.
“아카데미는 교육기관 아니냐고! 왜 이런 일에 개입을 하는 건데!”
“하지만 고르트 님, 랭커스터 가문이 멸망할 때도 아카데미에서 교수들을 보냈…….”
“그건 랭커스터 가문에서 에르나스를 죽이려고 마교 놈들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지! 우리 발트펠트 가문은 그런 게 아니라고!”
“아…….”
“교육기관이 왜 우리 가문을 막기 위해 병력을 움직이냐고! 말이 안 되잖아!”
발트펠트 가문이 서부 지역으로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고르트는 상당히 흥분했었다.
서부를 장악하여 발트펠트 가문이 제국의 패권을 잡으면 아카데미에서의 고르트의 위상도 급상승할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아카데미가 발트펠트 가문에 적대한다면, 고르트는 아카데미에 계속 머무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고르트 님.”
측근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급 이상의 그래듀에이트는 아카데미가 더 많습니다만, 병력 자체는 그래듀에이트뿐만 아니라 일반병도 끌고 온 발트펠트 쪽이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수적 우세를 활용해서 작전을 잘 세우면 충분히 아카데미를 꺾을 수 있을 겁니다.”
“작전, 작전이라…….”
고르트가 머리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아카데미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야 작전을 세우지. 아버지는 아카데미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서부로 들어왔을 텐데.”
“그건…….”
“그래, 그러니까 내가 빨리 달려가서 상황을 알려 줘야 하는 거지…….”
술기운이 가득한 한숨을 뱉으며, 고르트는 탁자 위에 엎드렸다.
“아버지가 아카데미 놈들을 싹 쓸어버릴 수 있게… 에르나스 그놈을 죽여 버릴 수 있게, 내가 정보를 전달해 줘야 해…….”
“고르트 님…….”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이만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측근들이 고르트를 부축하여 침대 쪽으로 데려갔다.
중간에 고르트가 주먹을 휘둘러서 얼굴을 얻어맞은 사람도 있었지만,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편히 쉬십시오, 고르트 님.”
“…….”
문이 닫히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지저분한 여관 침대에 몸을 눕힌 채 고르트는 피로감을 느꼈다.
‘젠장,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고…….’
입학할 때만 해도, 고르트는 자신감이 넘쳤다.
아카데미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라이벌들을 차례차례 꺾어 정점에 오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 망가져 버렸다.
‘베리스리제하고 손을 잡고 흑색 6반을 밟아 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패배감에 젖어 있던 세리느의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 직후에 있었던 진지전에서 에르나스한테 철저하게 패배한 걸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다.
‘그 이후에 에르나스와 직접 대결한 적은 없었지만… 그 녀석의 행보 하나하나가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어.’
결국 모든 건 에르나스 때문이다.
에르나스만 없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다.
테오도라 숙모도 에르나스 때문에 죽은 것이다.
‘아니, 그래도 역전할 수는 있어!’
술기운에 휩싸인 채 고르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지한테 아카데미의 동향을 알려 주면 돼! 작전을 잘 짜서 아카데미를 쳐부수면 되는 거라고!”
어쨌든 머릿수는 이쪽이 더 많다.
작전을 잘 짜면 아카데미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전군을 여러 부대로 나눠서 서부 전역을 유린하게 하면, 머릿수가 부족한 아카데미로서는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해서 아카데미를 굴복시키고… 에르나스도 죽여 버리면 돼!’
에르나스를 죽인다.
그 생각을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술기운 탓인지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 자식을 단칼에 죽여 버려야지. 아니, 단칼에 죽이면 안 되나? 최대한 고통스럽게 만들어 준 뒤, 천천히…….’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면서, 고르트는 눈을 감은 채 히죽 웃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세리느를 강제로…….’
그렇게 고르트가 침대 위에서 망상에 빠져 있었을 때.
갑자기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싸구려 여관이니, 술주정뱅이가 난동을 피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에이 씨, 뭔…….”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좀 시키라고 측근들에게 목소리를 높이려 한 순간.
“……?!”
불쑥 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사람이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세리느 바스티안이었다.
“세, 세리느……?”
처음에는 술에 취해 꿈을 꾸고 있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문밖에 측근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상황을 파악했다.
“……!”
술기운이 싹 사라지는 걸 느끼며, 고르트는 다급히 몸을 날리려 했다.
반대쪽에 있는 창문으로 도망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컥?!”
창문 쪽 벽이 무너지면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고르트의 멱살을 붙잡았다.
고르트는 다급히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멱살을 잡은 장본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숨을 삼켰다.
“에, 에르나스……?!”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고르트.”
경악하는 고르트를 향해, 에르나스가 냉담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 녀석이 도망갈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