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90화 (90/212)

90화 북쪽에서 내려오는 폭군 (2)

안겔라는 약속했던 대로 안겔라 클래스의 수료증을 줬다.

덕분에 나는 누구보다 빨리 3번째 수료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세리느 등 측근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나는 4번째 수료증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였다.

내가 문을 두드린 클래스는 바로… 발렌티아노 클래스였다.

“흥, 이제야 찾아오는 건가.”

클래스에 발을 들이자마자, 나는 지도 교수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발렌티아노 교수와 마주하게 되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마지막에 올 줄은 몰랐군.”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발렌티아노가 나한테 ‘발렌티아노 클래스로 오게.’라고 말한 건 2차 시험 직후였다.

벌써 몇 달이나 지났으니, 발렌티아노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네는 이미 그래듀에이트 중급에 도달했다고 들었네. 그렇다면 발렌티아노 클래스의 수련생용 컬리큘럼은 자네한테 별 의미 없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님.”

“뭐라고?”

“발렌티아노 클래스의 수련생용 컬리큘럼은 아주 잘 짜여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다시 배워 보고 싶습니다.”

“…….”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하면서, 기초를 보다 확실히 다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기초 단계를 사실상 생략하면서 성장해 왔다.

이미 어느 정도 높은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의 검술을 복사하여 사용해 온 탓이다.

그렇기에 그래듀에이트로서의 기초를 한번 제대로 짚고 넘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 깊이 있는 그래듀에이트가 되고 싶습니다.”

“에르나스, 자네…….”

“그러기 위해서는 발렌티아노 클래스에서 수련을 받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동부 검술의 대가로서, 아카데미의 그 어떤 교수보다 검술을 깊게 이해하고 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발렌티아노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크흠…….”

발렌티아노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뭘 모르는 것 같군. 우리 클래스의 수련생용 컬리큘럼은 조교수와 평교수들이 진행하는 거라, 내 가르침은 받을 수 없네.”

“아, 그렇습니까?”

“애초에… 자네한테 이제 막 그래듀에이트 초입에 도달한 녀석들하고 같은 교육을 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게 말하며 발렌티아노가 다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직접 차근차근 지도해 주고 싶은데, 어떤가?”

“영광입니다, 교수님.”

“크흠… 영광은 무슨.”

발렌티아노가 쑥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 * *

그 이후, 나는 발렌티아노 밑에서 동부 검술을 배웠다.

원래 발렌티아노 클래스에서는 수련생들에게 파르티잔 심판검술을 가르치지만, 발렌티아노는 그 상위 검술인 플라티노 기사검술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플라티노 기사검술은 그래듀에이트 중급 이상을 위한 동부 검술로, 파르티잔 심판검술의 상위 호환이라 할 수 있었다.

기본 자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중요시하며 방어에 강하다는 점이 파르티잔 심판검술과 같았다.

유스레흐트를 사용하지 않고 차근차근 배워 나갔는데… 예상외로 빠르게 검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어쩌면 파르티잔 심판검술을 사용했던 경험이 내 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발렌티아노는 그래듀에이트로서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비롯해 자신의 ‘검술 철학’도 많이 가르쳐 줬는데, 이것도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발렌티아노 클래스에서 수련을 받으면서, 나는 내 세력을 키워 나갔다.

2차 시험을 통과한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는데, 그들 중 쓸 만한 녀석들을 내 밑으로 받아들였다.

지난번처럼 호가호위를 하고 싶어서 나한테 붙으려는 놈들은 최대한 쳐냈다.

검술명가 위주의 봉건제를 철폐하고 국가 체제를 효율화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 사욕을 버리고 나를 따를 수 있는 사람만 붙으라고 한 것이다.

물론, 클로에처럼 중앙집권제 이후 리히테나워 대공에게 권력이 집중될 것을 기대하고 내 측근이 되는 걸 노리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자신의 가문을 번영시키겠다는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버릴 수 없었던 사람들은 결국 내 곁을 떠났다.

이렇게 세력을 키워 나가는 건 다른 검술명가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여서, 하인리히와 루퍼스, 베리스리제도 견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다만 좀처럼 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바로 발트펠트 가문의 고르트였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군, 고르트.”

“큭…….”

기숙사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르트는 내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예전에는 항상 황색 3반 출신의 측근들을 거느리고 다녔지만, 오늘 고르트는 혼자였다.

“평소 함께 다니던 녀석들은 어디 갔지?”

“네가 알 바 아니야. 신경 꺼라.”

측근들이 다 고르트를 떠난 건 아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고르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지는 않는다.

이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고르트가 아카데미에서 별다른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고르트 자신의 실력이 정체 중이기 때문이다.

“요새 수련은 잘돼 가나? 아킬레온 클래스에서 수련을 받고 있다고 들었는데.”

“네가 알 바 아니라니까!”

고르트가 짜증을 내면서 나를 밀치려 했다.

하지만 내가 꿈쩍도 하지 않는 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 자식…….”

“여전히 거칠군, 고르트.”

고르트는 남들보다 뛰어난 신체 조건을 지닌 녀석이었다.

약골이었던 에르나스 따위는 한번 밀치면 뒤로 넘어져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환골탈태를 거친 상태.

마력을 쓰지 않아도, 고르트보다 힘이 강하다.

“너, 뭐야? 어떻게 된…….”

내 근골이 달라진 걸 눈치채고 고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내가 환골탈태를 했다는 것까지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벌써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까.

“고르트,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고르트를 쳐다보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님은 잘 계시나?”

“뭐?”

“미하일 발트펠트 님 말이다. 요새 소식을 듣기 어려워서.”

“…….”

미하일 발트펠트.

발트펠트 가문의 가주로, 북부 최강의 그래듀에이트다.

북부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으로 유명하다.

“지난번에 듣기로, 테오도라 님의 죽음을 알고 크게 상심하셨다고 하던데. 이제는 좀 괜찮으신가?”

“용케 그런 말을 하는군, 에르나스.”

고르트가 무서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네가 테오도라 숙모님을 죽인 거 아닌가?”

“글쎄, 아카데미 측의 조사로는 몬스터에게 당한 걸로 결론이 나왔는데.”

“그건 네가 테오도라 숙모님을 죽인 뒤에 위장한 거겠지!”

“이봐, 고르트… 테오도라 님은 그래듀에이트 상급이셨어.”

나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분을 죽였다면, 그래듀에이트 상급조차 죽일 수 있다는 실력을 지녔다는 얘기가 되는데.”

“……!”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면서 말하자, 고르트가 움찔하며 뒷걸음쳤다.

“네, 네가 무슨 함정을 팠을 수도 있지! 비겁한 수를 써서 말이야!”

“그럴 수도 있긴 하지. 하지만…….”

나는 고르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카데미에서는 테오도라 님이 먼저 나를 해치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어. 증거 없이 추측만으로 얘기한다면, 그 부분부터 더 추궁해야지.”

“……!”

“그리고 고르트, 지금 나는 그 일을 따지려고 하는 게 아니야. 순전히 네 아버지의 안부가 걱정될 뿐이니까.”

내 말을 듣고 고르트가 눈을 깜박였다.

“내 아버지가 왜…….”

“미하일 님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북부의 패왕이지만,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는 분으로도 유명하지. 친동생이 처참하게 죽었다는 걸 알면 마음의 상처가 클 거야.”

소설 속에서도 미하일은 테오도라의 장례식 이후 두문불출하고 슬픔에 젖어 있었다.

문제는… 미하일의 슬픔을 이용하는 놈이 나온다는 점이다.

“고르트, 네가 북부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면 어떨까.”

“뭐, 뭐라고?”

“아무래도 친아들인 네가 위로해 드리는 게 가장 확실할 텐데.”

“…….”

고르트가 눈썹을 찌푸리며 내 얼굴을 노려봤다.

“이 자식… 무슨 꿍꿍이지?”

“특별한 꿍꿍이는 없어. 순수하게 미하일 님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일 뿐이야.”

“그런 말에 속을 것 같아? 내가 아카데미를 비운 사이에 무슨 짓을 하려고?”

“네가 있든 말든 아카데미는 달라질 게 없을 텐데.”

“이 자식이……!”

자신을 무시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였는지, 고르트가 화를 내면서 내 멱살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손목을 낚아채서 오히려 고르트를 넘어뜨렸다.

“윽!”

쿵!

고르트가 바닥에 쓰러져서 신음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르트, 솔직히 말해서 너는 나한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아. 너를 견제하려고 계략을 꾸밀 이유가 없단 말이다.”

“에르나스… 이 개자식!”

“나는 선의로 충고를 한 거다. 그런데 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분통을 터뜨리는 고르트를 내버려 둔 채, 나는 자리를 떴다.

뒤에서 고르트가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경고를 했다, 고르트.’

지금 미하일은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 하고 있다.

하지만 북부의 폭군인 미하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이 친아들인 고르트인데, 고르트가 저런 태도면 어쩔 수 없다.

‘그러면 이걸로…….’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기숙사 복도를 걸었다.

‘발트펠트 가문도 멸망의 길을 걷게 되겠군.’

* * *

칼레온 클래스의 지도 교수실.

그곳에서 루퍼스는 아버지인 ‘염옥검’ 칼레온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루퍼스, 요새 좀 어떠냐.”

“순조롭습니다. 이번에 들어간 아킬레온 클래스에서도 교수님들의 평가가 좋습니다.”

루퍼스의 자신만만한 대답을 듣고, 칼레온이 미소를 지었다.

“아킬레온 교수는 북부 출신인데, 너를 견제하거나 하지는 않나?”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긴, 북부 발트펠트 가문이 그렇게 위축되었으니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겠지.”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발트펠트 가문은 요새 아카데미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2차 시험에서 발생한 문제 때문에 발트펠트 가문과 연결되어 있던 교관들이 축출되고, 아카데미 바깥에서 지원해 주던 테오도라까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탓이다.

후계자인 고르트가 아카데미에서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2차 시험을 단번에 통과하지 못하는 등 추태만 보였다.

“고르트가 아카데미의 정점에 올라 리히테나워 대공이 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발트펠트 가문에서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지.”

“아버지, 그러면 우리 쪽에서 발트펠트 가문에 접촉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발트펠트 가문에?”

“어차피 고르트에는 희망이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저희한테 힘을 실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그 대신 나중에 지분을 약속해 주는 거고요.”

“흐음…….”

발트펠트 가문과 동맹을 맺는다.

루퍼스의 제안에 칼레온은 턱을 쓰다듬었다.

“발트펠트 가문과 손을 잡자는 얘기를 하다니… 너도 달라졌구나, 루퍼스.”

“에르나스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니까요.”

“그래, 맞는 말이다.”

에르나스는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면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할 생각이다.

검술명가 이그니아스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칼레온과 루퍼스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부 아그리파 가문의 브랜틀리는 굳이 다른 가문과 손을 잡으려 하지 않겠지. 슈라이에르 가문 쪽은… 연대하기가 영 꺼림칙하다.”

“네, 손을 잡기에는 발트펠트 가문이 가장 낫습니다.”

후계자인 하인리히의 성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그리파 가문은 오만하기 그지없다.

자력으로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동맹을 제안하더라도 거절할 것이다.

한편 슈라이에르 가문은… 가주의 성격을 생각할 때, 별로 신용할 수 없다.

“좋다. 그 방향으로 진행해 보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칼레온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의견까지 낼 수 있다니, 너도 많이 성장했구나.”

“아카데미에서 여러 일을 경험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에르나스나 하인리히한테 패배의 쓴맛도 맛봤고요.”

루퍼스는 의욕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건 이 루퍼스 이그니아스가 될 겁니다.”

“네가 그렇게 의욕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니 나도 믿음이 간다.”

칼레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면 발트펠트 가문 쪽으로는 내가 연락을 해 보겠다. 고르트를 경유할 필요 없이, 북쪽으로 직접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네, 부탁드리겠…….”

바로 그때, 교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 칼레온 교수님! 긴급 상황입니다!”

“무슨 일이냐?”

“북쪽에서 발트펠트 가문이……!”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측근 교수가, 절박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가주인 미하일 발트펠트의 지휘하에 이쪽 서부 지역으로 진군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전쟁이라도 벌일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듣고, 칼레온과 루퍼스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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