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 아카데미에 천재가 있었다-89화 (89/212)

89화 북쪽에서 내려오는 폭군 (1)

콰쾅!

시끄러운 천둥소리와 함께, 내 검이 브랜틀리의 기술을 파훼했다.

아그리파 절검술의 ‘더 크럭스’는 초고속으로 절묘한 4연격을 펼치는 기술이다.

견고하기 그지없는 검강으로 한가운데를 파고들면, 연속 공격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다.

검기와 검강이 부딪치면 검기 쪽이 튕겨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검은 거침없이 뻗어 나갔고, 칼끝은 마침내 브랜틀리의 가슴에 닿았다.

하지만 내 검이 브랜틀리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일은 없었다.

브랜틀리의 호신기가 워낙 두터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검이… 부서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투툭.

마치 오래된 물건이 부스러지듯이, 칼날이 부서져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본래 제대로 된 검강이라면 브랜틀리의 호신기조차 뚫을 수 있지만, 이렇게 검 자체가 부서지고 있으면 아무 상처도 입힐 수 없다.

결국 나는 마력을 회수하면서 검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졌군요.”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짤막하게 말했다.

“무기를 잃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 에르나스.”

브랜틀리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검은 슈페르트 공방(工房)의 1급 장인(匠人)이 만든 명검이다. 한편 네 검은 아카데미 학생에게 주어지는 평범한 검이지.”

“…….”

“서로 검을 바꿔 들고 있는 상태였다면, 네 검이 내 가슴을 꿰뚫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브랜틀리는 검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네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습니다, 브랜틀리 님.”

나는 브랜틀리의 말을 부정했다.

“브랜틀리 님은 전력을 다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한편 저는 죽을힘을 다해 브랜틀리 님에게 맞섰죠.”

“살기가 느껴지더군.”

브랜틀리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나도 너를 향해 목숨을 해칠 수 있는 기술을 펼쳤다.”

“제가 받아 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계셨기 때문 아닙니까?”

“서로 마찬가지겠지.”

맞는 말이었다.

나도 내 공격으로 브랜틀리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정 그렇다면, 무승부였다는 것으로 하지.”

“무승부…….”

“불만인가?”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브랜틀리 님과 무승부라니, 영광이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그렇게 말하며 브랜틀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씁쓸한 미소였기는 하나, 브랜틀리가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어땠더라…….

“에르나스.”

“네, 브랜틀리 님.”

다시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온 브랜틀리가, 나를 향해 불쑥 질문을 던졌다.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하려 한다는 게 정말인가.”

“…….”

나는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렇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브랜틀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존의 검술명가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

“랭커스터 가문을 봐라. 경쟁에서 탈락하게 될 것 같으니 판을 뒤집어엎으려고 온갖 추태를 보였다.”

브랜틀리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랭커스터 가문뿐만이 아니다. 다른 가문들도 다를 게 없다. 공작의 작위를 지닌 검술명가들뿐만 아니라, 그 아래 서열의 가문들도 마찬가지다.”

“…….”

“기존의 낡은 봉건사회를 개혁하고, 보다 합리적인 체제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다.”

봉건제를 개혁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브랜틀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권위가 필요하다.”

“…….”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에 오르면 다른 검술명가들보다 서열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차기 황제 폐하가 리히테나워 대공에게 최대한 힘을 실어 준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브랜틀리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에르나스, 너는 자신이 있나?”

“…….”

“다른 가문들이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고 네 명령에 복종할 만큼… 위대한 검사가 될 자신이 있냔 말이다.”

브랜틀리의 질문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제가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지금 명확한 대답을 드리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브랜틀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제가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이 누구든 반드시 꺾을 생각입니다.”

6대 검술명가든, 흑천마교든… 그 누구든 상관없다.

내가 가는 길을 위협하는 자들이 있다면, 내 힘으로 꺾을 생각이다.

이 세상에서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이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렇군.”

브랜틀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네가 그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훗날 우리는 다시 충돌하게 되겠군.”

“꼭 충돌해야 합니까?”

“네가 6대 검술명가를 해체하려 한다면, 필연적이겠지.”

그렇게 말하며, 브랜틀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주로서 아그리파 가문을 지킬 의무가 있다.”

“…….”

“그러니… 일단 네가 리히테나워 대공이 되는 것부터 막아야겠지. 리히테나워 대공의 자리는 하인리히가 차지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하인리히는 외부에 나가서 실적을 쌓고 있다.

지금은 내가 앞서 나가고 있는 상태지만, 하인리히도 얼마든지 역전할 기회가 있다.

“앞으로 아그리파 가문은 하인리히를 본격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그렇군요.”

“너는 현재 란즈슈타인 가문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다.”

소설에서 에르나스가 가주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건, 란즈슈타인 가문이 외부 활동에 나설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금 나도 란즈슈타인 가문과는 별도의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너 혼자서 이겨 내는 건 쉽지 않을 거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알겠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딱히 각오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소설 속에서 브랜틀리가 하인리히를 본격적으로 지원해 주는 것도 이쯤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가겠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쉬어라.”

“네,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브랜틀리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나에게 건넸다.

“부서진 검 대신 사용해라.”

“네?”

“내가 요청한 대련에서 부서졌으니까.”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어서, 조금 당황했다.

“제 검은 아카데미에서 학생에게 나눠 준 평범한 검이었습니다. 그런데 슈페르트 공방의 1급 장인이 만든 명검을 주시면…….”

“이런 검은 본가에 가면 많이 있다.”

“…….”

잠시 고민한 뒤, 검을 받아 들었다.

사실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걸맞은 새 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쓰도록 해라.”

그 말을 남긴 뒤, 브랜틀리는 바로 자리를 떴다.

이제 더 이상 나하고 나눌 말은 없다는 듯이,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

멀어져 가는 브랜틀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새로 받은 검을 살펴봤다.

시험 삼아 마력을 흘려 보내니 확실히 지금까지 쓰던 검보다 훨씬 좋았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군.’

이번 브랜틀리와의 대결은 매우 유익했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힘을 시험할 수 있었고,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한 단계 발전시켜 검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새로운 무기까지 손에 넣었으니… 내 입장에서는 아주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브랜틀리에게서 새로운 검술을 얻어 낼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아르테클라스에게서 흑천마도연공법을 얻어 낼 때 발생한 12일 페널티가 끝나지 않은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브랜틀리에게서 검술을 얻어 낼 수는 없었다.

‘어쨌든 이걸로… 준비가 다 끝난 건가.’

나는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제 머지않아 대규모 사건이 벌어질 것이다.

서부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상당한 희생자가 발생하는 사건이다.

이번에 내가 획득한 힘으로 그 사건에 대처해야 한다.

* * *

제국 북부.

기후가 한랭하고, 대형 몬스터가 자주 출몰하는 가혹한 땅.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건 6대 검술명가 중 하나인 발트펠트 가문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발트펠트 가문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가주의 동생이자 가문의 2인자였던 테오도라 발트펠트가 서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미하일 형님은 요즘도 탑에 틀어박혀 계신가?”

“네, 사람을 멀리하고 계십니다.”

“쯧, 내가 원정을 끝마치고 오면 나오실 줄 알았는데.”

가신의 대답을 듣고, 요네스 발트펠트는 혀를 찼다.

요네스는 가주인 미하일 발트펠트의 사촌 동생으로,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한 실력자였다.

“테오도라 누님의 죽음이 정말로 충격적이셨나 보군.”

“무척 신뢰하고 계셨으니까요. 고르트 도련님을 지원해 주는 것도 테오도라 님에게 전적으로 일임하셨을 정도니…….”

이미 장례식이 끝난 지도 한참 시간이 지났다.

가주가 저렇게 은둔하고 있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안 되겠군. 내가 좀 말씀을 드려야겠어.”

“하지만, 가주님은 누구와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정말로 누구와도 만나지 않으시는 건가?”

“네, 얼마 전부터 탑에 머무르고 있는 승려를 제외하면…….”

“승려라니?”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테오도라 님의 장례식에서 가주님을 위로해 주셨다고 합니다.”

“……?”

요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하일은 딱히 종교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혹시 승려의 설법(說法)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걸까.

“좀 마음에 걸리는군. 역시 내가 직접 말씀을 드려야겠어.”

“요네스 님, 하지만…….”

“괜찮아. 미하일 형님도 내 대가리를 깨 버리지는 않으시겠지.”

미하일은 북부의 폭군(暴君)이다.

환경 탓에 북부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거친 성향이 있지만, 미하일은 아주 극단적이었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바로 칼을 뽑아 사람의 머리를 깨 버리는 게 미하일이라는 남자였다.

“일단 내가 탑으로 들어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아, 요네스 님……!”

요네스는 성 한가운데에 높이 솟아 있는 탑으로 다가갔다.

미하일은 탑 꼭대기에서 조용히 은둔하고 있을 것이다.

“폐관수련(閉關修鍊)을 하는 중이라면 모를까, 슬슬 밖으로 나오셔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요네스는 탑의 출입문을 열려 했다.

하지만, 요네스가 손을 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

흠칫 놀란 요네스가 뒷걸음치자, 안에서 나이 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자처럼 뻗은 갈색 머리카락.

떡 벌어진 어깨와 두꺼운 가슴 근육.

사냥감을 노리는 야수 같은 눈빛.

요네스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 그대로의 미하일 발트펠트였다.

‘다행이군.’

요네스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의 죽음 때문에 미하일이 수척해졌을까 봐 내심 걱정했었기 때문이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미하일은 발트펠트 최강의 남자다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형님,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

미하일의 커다란 눈동자가 요네스의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을 리가 있나.”

“……!”

요네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사촌 형의 목소리에 명백한 분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미하일이 저런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주위 사람들 머리가 여러 개 깨져 나가곤 했다.

“테오도라의 원수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괜찮을 리가 없지.”

“혀,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머리를 방어할 준비를 하면서, 요네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테오도라 누님은 서부 대미궁에서 몬스터에게 당하신 게…….”

“그럴 리가 있나.”

“네?”

“테오도라는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에게 당한 것이다.”

“……!”

테오도라의 죽음에 에르나스가 연관되어 있다는 건 요네스도 들었다.

하지만 에르나스가 테오도라를 죽였을 가능성은 없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간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학생이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테오도라를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형님, 아카데미의 자체 조사에서도 몬스터에게 당해 죽은 걸로 결론이…….”

“그걸 믿느냐?”

“네?”

“아카데미도 다 한통속이다.”

“……!”

요네스는 당혹스러웠다.

미하일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새로운 증거라도 확보한 것일까.

‘대체 어떻게 된…….’

그때 미하일의 어깨 너머로 한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로브 형태의 수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저 여자가, 미하일 형님을 위로했다는 승려……?’

요네스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미하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요네스, 나는 서부로 갈 것이다.”

“서부에 가신다고요? 혹시 서부 대미궁에…….”

“아니, 아카데미로 향할 것이다.”

“아카데미에?”

“내 동생 테오도라의 사인(死因)을 조작한 죄를 묻고…….”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면서 요네스는 침을 삼켰다.

“내 발트펠트 금강검술(金鋼劍術)로, 직접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을 처단할 것이다.”

무서운 살기를 드러내는 미하일 뒤에서 흑의의 여성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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