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래듀에이트 상급을 향해 (3)
비 내리는 밤.
홀로 나를 찾아온 브랜틀리는, 검을 뽑아 든 채 입을 열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네, 브랜틀리 님.”
“나는 내일 아침에 아르테클라스 대주교를 데리고 아카데미를 떠난다.”
“알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 떠나기 위해, 지금은 휴식을 취해야 되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랜틀리는 나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내 앞에서 검을 뽑았다.
“너하고 검을 겨뤄 보고 싶다.”
“…….”
그것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예상할 수 있었던 말이기도 했다.
“아그리파 가문의 가주,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그래듀에이트께서… 한낱 아카데미 학생과 검을 겨루시겠다는 겁니까?”
“한낱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다.”
브랜틀리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나는 더 이상 너를 한낱 아카데미 학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너하고 검을 겨뤄 보고 싶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재차 말하는 브랜틀리 앞에서,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나는 평소 습관대로 허리에 검을 차고 나온 상태였다.
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취하자, 브랜틀리도 자세를 갖췄다.
아그리파 절검술(絶劒術)의 자세였다.
‘그 위의 단계는 보여 주지 않는군.’
아그리파 가문의 검술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아그리파 속검술이다. 마력에 의존하지 않는 검술로, 하인리히가 예전에 주력으로 사용했다.
두 번째는 아그리파 절검술이다. 일정 경지에 도달해야 사용할 수 있는 그래듀에이트 전용 검술로, 지난 비무전에서 하인리히가 그래듀에이트 초입의 몸으로 사용했다가 자멸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아그리파 가문의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를 위한 검술이다.
‘아르테클라스 대주교와의 싸움에서도 보여 주지 않았지.’
함부로 세상에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검술이다.
남들 눈이 있는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도 굳이 나한테 보여 줄 생각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나를 죽일 생각이라고 해도, 굳이 그 검술을 사용하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과 동시에, 마력을 전신에 흘려 보냈다.
환골탈태를 거친 육체가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마력으로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가 볼까.’
파앗!
땅을 박차고 움직였다.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사용하여,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속도가 나왔다.
“…….”
브랜틀리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 변화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브랜틀리를 향해,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검을 휘둘렀다.
“……!”
쿠웅!
검기와 검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브랜틀리는 내 공격을 아주 손쉽게 막아 냈다.
나는 멈추지 않고 종횡무진 움직이면서 브랜틀리를 공격했다.
하지만 브랜틀리는 처음 위치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내 공격을 전부 막아냈다.
“그러면, 이쪽에서 간다.”
아무런 예고 없이 브랜틀리가 튀어나왔다.
아이오니아 신속검술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나를 쫓아와, 초고속의 찌르기를 펼쳤다.
“……!”
콰앙!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러, 찌르기가 빗나가게 만들었다.
칼끝이 내 몸에 닿지는 않았지만, 내 몸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용케 막아 냈군.”
짤막하게 중얼거리며, 브랜틀리가 계속해서 공격을 펼쳤다.
하나하나가 일격에 사람을 두 조각 낼 수 있는 공격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마력과 육체는 나에게 그 정도의 힘을 부여해 줬다.
‘하지만, 이대로 방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마력을 더더욱 끌어올렸다.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은 브랜틀리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안겔라의 성명절기인 베르틴스키 흑쇄검술이라면 통하겠지만, 그 하위 호환인 아이오니아 신속검술로는 상대가 안 된다.
하지만, 나에게는 브랜틀리에게 대적할 만한 검술이 있다.
절세 검술로 성장하게 될…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이다.
‘그동안 나는 소설 속의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재현해 왔어.’
제1식 낙뢰(落雷).
제2식 무뢰(舞雷).
제3식 자뢰(刺雷).
제4식 편뢰(鞭雷).
여기까지는 재현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어려웠다.
다음 단계인 제5식부터는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마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은 도전할 수 있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한 마력 그리고 환골탈태에 성공한 육체를 활용해야 한다.’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그 마력을 전신의 혈맥으로 순환시키면서, 육체의 능력도 극대화했다.
하지만, 이걸로도 부족하다.
‘그래, 아직 부족해.’
각성에는 계기가 필요하다.
내 마력과 육체가 조건을 만족시켰다고 해서, 소설 속의 깨달음을 다 알고 있다고 해서, 그냥 자동으로 다음 경지에 진입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나 자신을 스스로 위기로 몰아넣어야 한다.’
나는 공세에 나섰다.
방어만 하고 있어도 버거운데, 적극적으로 브랜틀리에게 덤벼들었다.
브랜틀리가 살짝 눈썹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브랜틀리, 너는 내가 무모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지금 브랜틀리는 전력을 다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섣불리 공세에 나서는 건 자살행위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브랜틀리가 공세를 늦추지는 않아.’
브랜틀리는 주저 없이 계속 공격을 펼쳤다.
나를 배려해서 공세를 늦춰 줄 성격이 아니니까.
내가 브랜틀리에게 덤벼들면 덤벼들수록, 위험천만한 상황이 자꾸 발생했다.
하지만 나는 두려움 없이 계속 공격을 펼쳤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목숨을 잃을 공세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 이 급박한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
상대는 브랜틀리 아그리파.
남부 최강의 절정급 검사.
그를 상대로, 자칫하면 목이 날아갈 수 있는 대결을 펼치고 있는 중.
다음 경지에 돌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황이다.
“……!”
거침없이 파고들어 오는 나를 보며, 브랜틀리가 눈을 크게 떴다.
목숨이 아깝지도 않느냐, 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내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계속 파고들어 오는 걸 보면서, 그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온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브랜틀리가 한 단계 높은 경지를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무슨 기술이 펼쳐질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더 크럭스……!’
아그리파 절검술을 대표하는 초고속의 4연격, 더 크럭스.
지난 비무전에서 하인리히가 나를 상대로 사용했던 기술이다.
마력도 부족했고 숙련도도 부족했던 하인리히와는 달리, 브랜틀리는 제대로 된 더 크럭스를 보여 줄 것이다.
지금 당장 전력을 다해 방어한다고 해도… 나한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순간.
세상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극한의 집중이 내 의식(意識)에 영향을 끼친 탓이다.
더 크럭스가 나를 향해 펼쳐지는 모습을 응시하면서, 나는 한계를 뛰어넘었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 제5식…….’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마력.
환골탈태를 마친 육체.
브랜틀리라는 절대 강자.
생과 사의 갈림길.
소설 속에 적어 놨던, 모든 깨달음.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지면서, 내가 한계를 돌파할 수 있게 해 준다.
‘창뢰검강(蒼雷劍剛).’
내 칼날을 휘감는 푸른 번개.
막대한 마력이 칼날에 깃드는 것을 느끼며, 팔을 뻗는다.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펼쳐진 내 공격이, 더 크럭스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 * *
소설 속에서 욜스 칼레시우스는 학생들을 위해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을 개발했다.
학생들이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에 맞설 수 있도록, 공격의 위력을 일시적으로 극대화하는 검술을 추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검기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아무래도 마력의 절대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검기를 강화하려면 마력을 특별한 방식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었다.
욜스가 처음 생각한 건 마력이 칼날 위에서 초고속으로 순환하는 것이었다.
이걸 통해 검기의 절삭력과 파괴력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마력을 빠르게 순환시키다 보니 에너지 효율 자체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욜스는 주인공 아칸델과 함께 새로운 방식을 연구했다.
‘하지만, 욜스 본인은 새로운 방식을 완성하지 못했지.’
욜스는 도중에 목숨을 잃는다.
머지않아 발생할, 커다란 동란(動亂)에 휩쓸려서.
그 죽음을 딛고 일어서, 주인공 아칸델이 욜스가 추구하던 방식을 완성한다.
진정한 검술 천재 아칸델에 의해,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이 궁극의 절세 검술로 진화한 것이다.
‘그 방법은… 마력을 견고하게 고정하는 것.’
검기는 마력의 흐름이다.
칼날 위에서 계속 마력이 흐르고 있고, 그걸 공격에 활용한다.
하지만 새로운 방식에서는 마력을 흐르게 하지 않는다.
마력을 철저하게 압축한 뒤, 칼날 위에서 견고하게 고정한다.
말하자면 검기는 물이고, 새로운 방식은 얼음이다.
‘세상 그 어떤 검보다 날카롭게 그리고 단단하게.’
얼음처럼 견고하게 고정된 마력이 푸른색 빛을 발생시켰다.
밀도가 너무 높은 탓에 가끔 미세한 에너지가 흘러나오며 번개 같은 스파크가 발생했다.
얼핏 보기에는 기존의 칼레시우스 창뢰검술과 큰 차이가 없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상태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B랭크)의 이해도가 일정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B랭크)의 성장과 함께 영구 귀속이 진행됩니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A랭크)의 영구 귀속이 완료되었습니다.]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내 전신전령(全身全靈)을 다해, 브랜틀리가 펼치는 더 크럭스에 도전한다.
“……!”
검강(劍剛).
지금 이 세계에서는 오로지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궁극의 검.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검사들조차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경지.
소설에서 주인공 아칸델은 이것을 무기 삼아 절정급의 그래듀에이트들과 맞섰다.
‘그래, 그렇기에…….’
나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천부적인 검술 천재와 같은 영역에 있다.
그렇기에…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그래듀에이트하고도, 맞서 싸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다.’
하늘에서 커다란 천둥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전광석화처럼 뻗어 나간 검강이 더 크럭스 한가운데를 꿰뚫고, 브랜틀리의 가슴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