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그래듀에이트 상급을 향해 (2)
아르테클라스 대주교의 본거지는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시설은 모조리 불태웠고, 남아 있던 마교도들도 빠짐없이 처단했다.
우두머리인 아르테클라스는 양팔이 잘린 채 아카데미로 끌려가게 되었다.
헨리 랭커스터처럼 아카데미에서 일차 조사를 진행한 뒤, 중앙으로 이송될 것이다.
“이건 상당한 쾌거로군.”
알드바우트 총장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한동안 대주교급 거물을 잡은 적이 없었지. 아그리파 가문은 물론, 우리 아카데미로서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걸세.”
“맞는 말씀입니다.”
맞은편에 앉은 발렌티아노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수 정예만 데려간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정말로 아르테클라스 대주교를 붙잡았군요.”
“자네는 지난번처럼 놓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
“마교 놈들의 습성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것처럼, 이번에도 부하들을 미끼로 삼아 도망칠 거라 생각했죠.”
그렇게 말하며 발렌티아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듣자 하니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이 큰 공헌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더군. 자칫하면 큰 피해만 입고 아르테클라스를 놓칠 뻔했는데, 에르나스가 적극적으로 움직인 덕분에 전황이 바뀌었다지. 게다가 브랜틀리와 함께 힘을 합쳐 아르테클라스를 제압했다고 하고.”
알드바우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브랜틀리가 직접 에르나스의 공적이 컸다고 따로 언급한 게 의외였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럴 위인이 아닌데.”
“지난번에는 에르나스한테 별 관심이 없는 태도를 보이더니, 직접 눈으로 보니까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군.”
다만, 이건 에르나스 입장에서는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동안 브랜틀리는 에르나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제 에르나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직접 손을 쓸 수도 있다.
“그런데 발렌티아노 교수, 표정이 왜 그리 씁쓸한가?”
“별것 아닙니다. 에르나스가 아직까지도 저희 클래스에 수련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을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발렌티아노 클래스는 한 번도 찾지 않았군.”
발렌티아노 클래스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클래스다.
하지만 에르나스는 발렌티아노 클래스의 문을 두드린 적이 없었다.
욜스 클래스, 페르디난드 클래스, 안겔라 클래스에서 수련을 받았을 뿐이다.
“기다려 보게. 마지막으로 찾아올 수도 있지.”
“그건 그거대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만…….”
2차 시험을 통과한 수련생은 4개 이상의 클래스에서 수료증을 받으면 3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그러니 에르나스가 4번째 클래스로 발렌티아노 클래스를 선택할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에르나스가 발렌티아노 클래스를 선택하면… 다른 수련생들하고는 별도의 교육을 해야겠군요.”
“그래야겠지.”
알드바우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 녀석은 학생의 범주를 넘어섰으니 말일세.”
* * *
아카데미로 돌아온 나에게는 엘릭시르가 주어졌다.
예상했던 대로 황색 엘릭시르가 아니라 녹색 엘릭시르였다.
‘적색, 청색, 황색을 넘어… 네 번째 단계의 엘릭시르.’
원래 녹색 엘릭시르는 수련생 신분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나에게 녹색 엘릭시르가 주어졌다.
내가 이번 전투에서 얼마나 큰 공적을 세웠는지, 안겔라와 브랜틀리가 아카데미 측에 상세히 전달해 준 덕분이다.
‘사실 녹색 엘릭시르는 그래듀에이트 중급을 위한 영약이야.’
아카데미에서 나에게 녹색 엘릭시르를 줬다는 건, 아카데미 측에서도 내가 그래듀에이트 중급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는 의미다.
지금까지는 안겔라 등 일부 인물들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것이다.
‘다들 내가 그래듀에이트 중급에 도달했다는 것을 전제로 전략을 수정하겠지만… 이미 늦었지.’
나는 녹색 엘릭시르를 들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바깥에서 들었는데, 하인리히는 외부로 나갔다고 한다.
그 녀석도 나하고는 다른 곳에서 실적을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만간 하인리히도 그래듀에이트 중급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면…….’
문을 걸어 잠그고, 녹색 엘릭시르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품 안에 잘 숨겨 놓았던 뼛조각을 꺼냈다.
아르테클라스의 본거지에서 빼돌린 드래곤의 뼛조각… 용골이었다.
‘이것들을 조합해서 복용한다.’
원래 용골은 딱딱한 뼈여서 사람이 소화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가져온 건 아르테클라스가 소마의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가공한 상태였다.
이걸 녹색 엘릭시르에 녹여 내면, 예전에 흑영초를 복용했을 때처럼 내 안에 흡수할 수 있다.
“…….”
나는 뼛조각을 부스러뜨려서 엘릭시르 병에 넣었다.
그리고 가볍게 흔들어 주면서 엘릭시르 약액에 녹아들게 만들었다.
3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뼛조각은 부스러기 하나 남지 않고 용해되었다.
‘이걸로… 녹색 엘릭시르와 용골을 혼합한 영약이 완성된 거야.’
소설에서도 이런 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이 영약에는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하고도 남을 마력이 담겨 있다.
‘문제는, 이 마력을 제대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인데.’
영약에서 마력을 흡수했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카데미에서 엘릭시르를 복용하는 학생 중 대다수는 절반도 건지지 못한다.
연공법으로 마나 하트에 정착시킨 마력 외에는 전부 체외로 유출되기 때문이다.
‘나는 세리느에게서 동부식 마력연공법을 얻었고… 작가로서의 어드밴티지도 있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마력을 효율적으로 축적할 수 있었어.’
하지만 내가 9할 이상의 마력을 저장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엘릭시르 정규품일 때의 얘기다.
내가 따로 입수한 흑영초를 복용할 때는 그렇게 효율적이지 못했다.
용골에는 흑영초 이상의 마력이 담겨 있고, 그 성질도 맹렬하다.
제대로 내 마력으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해 보는 수밖에.’
나는 침대에 앉았다.
용골을 녹여 낸 녹색 엘릭시르를 조심스럽게 들이마신 뒤,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체내로 흘러 들어간 약액이 빠르게 흡수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지금은 비교적 평온한 편이군.’
혈맥을 통해 퍼져 나가는 기운을 느끼면서 정신을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그 직후.
“……!”
쿠웅!
전신의 혈맥을 일제히 망치로 때리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비현실적인 감각이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격렬한 충격이 전신의 혈맥에서 느껴졌다.
“윽……!”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스며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흑영초를 처음 복용했을 때도 괴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 감각은 그때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그때 흑영초의 기운은 내 혈맥을 휘젓고 돌아다녔지만… 용골의 기운은 내 혈맥을 안쪽에서 찢어발기려고 하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나는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이를 악물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 동부식 마력연공법으로는 안 된다.
아르테클라스에게서 얻어 낸, 흑천마교의 흑천마도연공법을 활용해야 한다.
‘흑천마도연공법은… 이런 맹렬한 기운을 강제로 찍어 누르는 연공법!’
일반적인 연공법은 새로 흡수한 기운을 육체와 조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기에 최대한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마력을 다룬다.
하지만 마교의 흑천마도연공법은 다르다.
새로 흡수한 기운을 철저하게 찍어 눌러, 완전히 굴복시키는 연공법이다.
“큭……!”
입에서 흘러나오려 하는 신음 소리를 억누르면서, 마나 하트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그래듀에이트 중급의 마력을 모조리 끌어내어, 전신의 혈맥에 퍼뜨렸다.
내 혈맥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려 하는 용골의 기운을 향해, 내 마력을 충돌시켰다.
그 순간, 강렬한 충격이 내 전신을 휩쓸었다.
“커헉!”
피를 토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내 마력을 최대한 활용해, 용골의 기운을 복속시키려 했다.
지금 내 혈맥에서는 무형의 기운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다!’
격심한 고통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내 흑천마도연공법은 마교의 대주교에게서 얻어 낸 것이다.
SS랭크라는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이니, 반드시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그렇게 확신하면서 나는 거침없이 마력을 순환시켰다.
“크윽…….”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피를 토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래, 이것은…….’
이것은 내 목숨을 위협하는 현상이 아니다.
나를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 주는 변화였다.
“……!”
어느 순간부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눈물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밝은 곳에서 보면 시커먼 색일지도 모른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나는 이미 감을 잡은 상태였다.
‘내 안의 노폐물과 독기를 배출하고 있는 거야.’
혈맥 안에서 용골의 기운과 내 마력이 격전을 벌인 덕분에, 막혀 있던 부분들이 모조리 뚫려 버렸다.
체내에 고여 있던 것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의 육체가… 정화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로 미친 듯이 싸워 대던 기운들이 내 혈맥을 따라 조화롭게 흐르고 있다.
그래도 조용히 평온하게 흐르는 건 아니었다.
무서운 기세로 흐르는 대하(大河)의 강물 같았다.
그리고 그 강물이 도착해야 하는 넓은 바다가… 바로 내 마나 하트였다.
“…….”
눈을 감은 채, 막대한 강물을 받아들였다.
내 마나 하트는 이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대한 바다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완수한 순간, 에르나스 란즈슈타인은 완전히 새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 * *
천천히 눈을 떴다.
내가 앉아 있던 침대는 온통 지저분해진 상태였다.
하인리히가 돌아오기 전에 깨끗이 해 놔야 할 것 같았다.
“…….”
하지만, 지금 당장 할 일은 아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었다.
바깥은 어두웠고,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고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후우…….”
쏟아지는 비가 내 몸을 개운하게 해 주었다.
몸에 묻어 있던 온갖 노폐물이 씻겨 나가는 걸 느끼며, 나는 천천히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의 골격이 변화한 것을 확인했다.
‘손가락뿐만이 아니야.’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들보다 빈약한 편이었던 에르나스의 근골이 건장해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고르트처럼 우람해진 것은 아니고, 완벽한 밸런스를 갖춘 날렵한 육체였다.
‘이게 바로… 환골탈태다.’
환골탈태.
이 세계에서는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도달했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충분한 마력과 깨달음을 얻게 되면 육체가 저절로 반응하여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그 결과, 그래듀에이트로서 최적화된 육체를 갖게 된다.
‘선천적인 약골이었던 에르나스의 육체가, 완전히 달라졌어.’
에르나스의 육체 능력은 남들보다 못했다.
그걸 커버하기 위해 나는 매번 마력을 활용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환골탈태를 통해 그래듀에이트로서 최적화된 육체를 손에 넣게 되었으니까.
‘이것이… 그래듀에이트 상급의 육체.’
직접 몸을 움직여서 더 자세히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한밤중에 혼자서 뛰어다닐 생각은 없었다.
“…….”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틸리온 마력탐측술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빗속을 뚫고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브랜틀리 님.”
브랜틀리 아그리파.
그는 내일 아침이 되면 아르테클라스 대주교를 데리고 아카데미를 떠나기로 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 한밤중에 나를 찾아왔다.
“…….”
브랜틀리가 입을 다문 채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어둠 속에서 그가 뽑아 든 검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황제가 내려 준 ‘청월검(靑月劍)’의 이름에 어울리는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