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대주교를 토벌하라 (4)
브랜틀리 아그리파는 에르나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당돌한 놈이다.’
산사태가 발생했을 때, 브랜틀리는 상황을 파악하는 걸 우선해야 했다.
하지만 에르나스는 산사태가 발생하자마자 곧바로 전방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선봉대가 있는 곳까지 순식간에 올라가, 마교도들의 공격을 막아 냈다.
결국 에르나스의 신속한 행동 덕분에 선봉대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었다.
‘이게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1년도 안 된 학생이란 말인가.’
게다가 에르나스는 곧바로 적의 본진까지 뛰어 올라갔다.
에르나스가 적의 본진을 휘젓고 다닌 덕분에 마교 측은 추가적인 대응이 어려워졌고, 브랜틀리도 부하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직접 올라올 수 있게 되었다.
‘입학 직전까지만 해도 이런 놈이 아니었다.’
브랜틀리는 에르나스가 무능한 놈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입학시험에서 차석을 차지한 것도 조작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에르나스가 하인리히의 경쟁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니 루퍼스와 레스터, 고르트, 베리스리제를 연달아 쓰러뜨리고 하인리히까지 꺾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브랜틀리의 눈앞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 줬다.
‘대체 너는 어떻게 된 놈이냐,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하지만, 지금 에르나스를 붙잡고 그 본모습을 파헤칠 여유는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아르테클라스 대주교가 부하들과 함께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안겔라 교수.”
검을 치켜들면서 브랜틀리는 입을 열었다.
“아르테클라스 대주교는 내가 맡겠소. 안겔라 교수는 에르나스와 함께 잔챙이들을 맡아 주시오.”
“흠, 그렇게 하지.”
그렇게 말을 하면서, 브랜틀리는 에르나스를 곁눈질했다.
그는 약간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적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확인하게 해 다오.’
과연 이 싸움에서 에르나스는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
브랜틀리는 에르나스의 본모습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 * *
전투가 시작되었다.
브랜틀리는 아르테클라스 대주교에게 달려갔다.
한편 나와 안겔라 교수는 나머지 잔챙이 다섯 명을 상대하게 되었다.
잔챙이라고는 해도, 전부 다 그래듀에이트 상급에 해당된다.
‘흑천마교에서는 주교급 전투 사제라고 하지.’
이쪽으로 달려오는 주교급 전투 사제 다섯 명을 보면서, 나는 안겔라에게 말을 건넸다.
“교수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알고 있겠지만, 나는 다른 사람과 호흡을 맞춰 싸우는 걸 잘 못한다.”
안겔라가 음침한 목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네가 한 녀석을 담당해라. 나머지 넷은 내가 담당하지.”
“알겠습니다.”
“딱 보니 주교급 전투 사제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사실 나한테 한 녀석을 맡긴다는 것도 파격적인 일이었다.
주교급이면 아카데미의 정교수급이기 때문이다.
브랜틀리도 안겔라가 나한테 하나를 맡길 거라고는 예상 못 했을 것이다.
“그럼, 잘해 봐라.”
파앗!
안겔라가 빠르게 움직였다.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네 명을 동시에 견제하자, 나머지 한 명이 앞서 나오게 되었다.
‘저놈을 상대하면 되겠군.’
서로 눈이 마주치자, 놈이 미소를 지었다.
입술에 흉터가 있는 얼굴을 보고 어떤 놈인지 생각해 냈다.
“파르파티온 주교인가.”
“음? 내 이름을 알고 있나?”
놈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지. 서부에서 나름 큰 세력을 형성했다가 헨리 랭커스터에게 토벌당해 모든 걸 잃었던 주교니까.”
“…….”
파르파티온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차갑게 내뱉었다.
“이젠 더 이상 자체 세력을 굴리기도 어려워졌고, 아르테클라스 대주교 밑에서 아부를 떠는 것 말고는 살아남을 길이 없었겠지.”
“네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구나.”
소설 속에서 서술되었던 설정을 읊어 주자, 파르파티온이 나를 노려봤다.
“죽여 주마.”
파르파티온이 자신의 검을 치켜들었다.
마력 없이는 두 손으로도 들기 어려울, 크고 무거운 검이었다.
“할 수 있다면, 해 봐라.”
“흥……!”
파앗!
거대한 무기를 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파르파티온의 움직임은 날렵했다.
게다가 대검에 무시무시한 붉은색 검기를 전개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나를 일격에 해치우려 했다.
“……!”
휘익!
하지만 그 공격은 빗나갔다.
내가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펼치며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측면으로 이동해, 파르파티온의 어깨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너무 얕았군.’
파르파티온을 스쳐 지나가면서 공격을 명중시켰지만, 호신기를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파르파티온을 화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네놈……!”
흥분한 파르파티온이 나를 쫓아왔다.
하지만 나는 파르파티온과 정면 대결을 해 줄 생각이 없었다.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사용해 사방팔방으로 움직였다.
‘파르파티온의 돌진 공격은 상당히 위협적이야.’
소설 속 묘사를 떠올리면서, 파르파티온의 공격을 계속해서 피했다.
‘하지만 앞으로 달려들면서 공격하는 것에만 특화되어 있지.’
안겔라 클래스의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은 전후좌우뿐만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파르파티온의 돌진 공격을 회피한 뒤, 곧바로 방향을 꺾어 그 측면을 노릴 수 있다.
“윽……!”
또다시 내 검이 파르파티온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파르파티온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네놈… 역시 그래듀에이트 중급인가!”
파르파티온이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검기가 제법 날카롭긴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내 호신기를 뚫을 수 없다……!”
내 검기의 위력을 확인하고, 파르파티온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방어는 신경 쓰지 않고 공격 일변도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하압!”
쿠웅!
파르파티온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옥상 바닥에 금이 갈 정도였다.
그리고 전력을 다한 일격이 펼쳐졌다.
“……!”
콰앙!
파르파티온의 검기가 옥상 난간을 분쇄했다.
나는 그 공격을 피하고 파르파티온의 측면을 노렸다.
물론, 파르파티온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방어도 회피도 하지 않고, 바로 검을 측면으로 휘둘러 나에게 치명상을 입히려 했다.
어차피 내 검기는 자신의 호신기로 막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그렇게는 안 되지.’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을 다른 검술로 전환한다.
지난번에 테오도라 발트펠트에게서 얻어 낸, 파워 위주의 발트펠트 패검술로.
발트펠트 패검술 특유의 금색 검기가 펼쳐졌다.
“……!”
이걸로 끝이 아니다.
칼레시우스 창뢰검술의 원리까지 조합해, 그 위력을 극대화했다.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는 검으로, 파르파티온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크악……!”
파르파티온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무방비했던 왼쪽 어깨의 호신기를 뚫고 내 검기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파르파티온이 방어에도 신경 썼다면 이렇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무슨 공격을 하든, 자신의 호신기로 막을 수 있다고 자만한 탓이다.
“어, 어떻게 이런……!”
촤악!
피가 뿜어져 나오면서 파르파티온의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거의 동시에 파르파티온의 대검이 내가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지만, 나는 이미 위치를 이동한 뒤였다.
“윽, 으윽……!”
신음하면서 파르파티온이 왼쪽 어깨에 붉은 기운을 집중시켰다.
마력을 활용해 상처를 막아 출혈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네, 네놈, 어떻게 그런 위력의 검기를……. 그래듀에이트 중급 아니었나?!”
“그래듀에이트 중급이 맞다, 파르파티온.”
차갑게 대꾸하면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다만, 너는 내가 어느 정도까지 검기의 위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지.”
“……!”
뒤늦게 모든 걸 깨달은 파르파티온이 몸을 떨었다.
일부러 검기의 위력을 절제하여 자신을 방심하게 만들었다는 걸 이해한 것이다.
“에르나스 란즈슈타인……!”
파르파티온의 몸에서 붉은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마력을 최대한 끌어내서 육체 능력을 극대화하는 수법이었다.
“우오오오!”
기합을 내지르며 파르파티온이 나한테 달려들었다.
한쪽 팔을 잃었다고 하나, 그 기세는 아까보다 더 맹렬했다.
‘아직 여력이 남아 있군.’
나는 아이오니아 신속검술에 발트펠트 패검술을 조화시켰다.
아이오니아 신속검술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발트펠트 패검술의 금색 검기를 펼치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
파앗!
검기와 검기가 부딪친 순간, 파르파티온의 검기에 균열이 생겼다.
상대방의 마력을 깨부수는 것에 특화된 금색 검기의 효과였다.
“이건……!”
파르파티온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종횡무진 움직이면서 파르파티온에게 연속적인 공격을 펼쳤다.
내 공격이 파르파티온에게 닿을 때마다, 붉은색 기운이 주위로 흩어졌다.
“파르파티온, 그렇게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내서 힘을 극대화했을 때, 가장 큰 문제점이 뭔지 아나?”
“뭐, 뭐라고?”
“마력이 고갈되기 쉽다는 점이지.”
온몸에 붉은색 기운을 둘러서 방어력도 극대화할 수 있지만, 결국 체외에 마력을 방출해야 하기 때문에 마력을 잃기 쉽다.
그리고… 상대편의 마력을 깨부수는 것에 특화된 발트펠트 패검술에 매우 취약하다.
“윽……?!”
자신의 마력이 끊임없이 유출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파르파티온이 경악했다.
파르파티온이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면 조금 더 일찍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내가 연속해서 도발을 한 탓에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이제는 칼날에 전개된 검기에도 빈틈이 많아졌군.”
“……!”
콰직!
부실해진 붉은색 검기를 뚫고, 발트펠트 패검술의 금색 검기가 파르파티온의 대검을 파괴했다.
부러져 나간 검을 보고 파르파티온이 숨을 삼켰다.
“끝이다, 파르파티온 주교.”
“기다…….”
마지막으로 목숨을 구걸하려 하는 파르파티온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르파티온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지만,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내 시선은 이미 전방을 향하고 있었다.
“…….”
안겔라는 아직 나머지 주교급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무리 안겔라라고 해도 주교급 네 명을 해치우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안겔라를 도와야 할까.
“…….”
나는 입을 다문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안겔라 쪽으로 걸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안겔라는 종횡무진 움직이면서 싸우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는 동선이 얽혀서 서로 방해가 될 것이다.
“브랜틀리 님.”
그렇기에, 나는 브랜틀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아르테클라스가 채찍처럼 휘두르는 사복검 때문에 쉽사리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브랜틀리는 남부 최강의 절정급 검사지만, 아르테클라스도 흑천마교에서 손꼽히는 실력을 지닌 절정급의 대주교다.
다른 잔챙이들처럼 단숨에 해치우는 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가세하겠습니다.”
“…….”
내가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건네도, 브랜틀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저 사복검을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함께 협공하죠.”
내 당돌한 발언에, 브랜틀리가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